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0
서유미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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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부터 서유미를 읽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 사람의 데뷔작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당분간 인간』이라는 제목의 첫 소설집 이후에 꾸준히 그녀의 책을 읽고 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기억나는 서유미의 소설들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사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당분간 인간』으로 그녀를 처음 알았을 때, '눈이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 그 시선이 날카롭고 깊어 지켜보는 대상의 면면만 보고 끝나는 게 아닌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모종의 불안이나 공포, 어둠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유미는 인간관계를 결코 대충 넘기지 않는다. 가장 친밀했던 사이가 어떻게 멀어지는지, 그 멀어짐 사이에 어떤 두려움과 공포, 불안, 불신 등이 자라나기 시작하는지, 관계의 불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펑 터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진행되어 온다는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설정해 이야기 한다. 관계의 변화, 관계의 뒤틀림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재현되면서 내 곁, 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첫 소설집에서만 하더라도 서유미는 환상성 안에 숨어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그려냈다. 하지만 지금은 환상성이라는 베일을 걷어 버리고 우리가 익히 봐온 풍경, 익히 봐온 사람들, 익히 들어온 이야야기를 통해 일상적 풍경, 일상적인 인간관계의 변화와 불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전보다 깊고 따뜻하며 부드러워진 듯하다.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에 서유미의 『틈』이 출간되었음을 알고난 뒤 나는 그 중 일부를 사들였다. 서유미와 윤이형, 안보윤의 책이었다. 사놓고 보니 모두 여성작가였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내면을 쓰다듬거나 들여다보는 작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역시 서유미의 책. 슬픔이 가득 차올라 목구멍을 비집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상황인데도 몸 속에서 널을 뛰듯 오르내리는 열감을 식히느라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는 중년 여성의 아픔을 그렸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아내에게 보내는 위로라고 말하면 조금 거창해보일까. 연애 시절과 비교해 풍만해진 몸매를 노려보며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건 왜 남자들의 몫인가. 가부장적 사회현실이 이 시대의 많은 중년 여성을, 아내를,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손가락질하며 어떻게 공격하는지 이 책에 나와있었다. 그걸 견디며 남편을 챙기고, 자식을 챙기고, 가계를 유지하며 살림을 행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살림스트레스가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도 나와있었다. 결코 아름다운 소설은 아닌데 여자가 그 아픔을 묵묵하게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뜨겁게 다가와서 오히려 아름답다고 느끼고 말았다.


상냥한 책이길 바랐다. 표지의 삽화처럼 따스하게 안아주는 온기나 손길이 느껴지는 책이기를 바랐다. 나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따스한 온기 대신 눅눅한 습기와 울음이 북받쳤지만 제법 담담하게 책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아프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길게 괴로워하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열고 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다. 노벨라 특성상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언제든 펼쳐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틀 정도를 들고 다니며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올 때마다 책을 펼쳐 읽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었는데 문장 자체만 놓고 따져보면 그렇게 강렬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문장과 문장이 호응하며 문단과 문단이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해 낼 때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눈치 보지 말고 담배를 피워도 좋아, 외도를 묵인하지 않아도 좋아, 더 이상 견뎌내지 않아도 좋아, 라고 말하는 소설은 아니다.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많이 귀 기울이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공감하고, 보듬어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가 이 책에 들어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높은 밀도를 가진 수증기를 들이마시며 탕에서 몸을 불리고, 몇 차례 얼굴만 마주쳤을 뿐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인물들과 말을 섞고 음식을 나눠 먹고 아픔을 나누다 이젠 서로의 등을 맡기게 된 그녀들은 소녀들처럼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을 뿐이다. 내 치부와 내 아픔이 소문처럼 퍼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중년의 여성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은 결코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픔을 사소한 것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려 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위선과 가식을 일삼지도 않는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임은 세 개의 꼭짓점을 갖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로 고정된다.

여자는 더 이상 여자이길 거부한다.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엄마라는 호칭이나 여자라는 명사 대신 정윤주라는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한다. 여자가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버렸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토리 전반에서 보여주었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대고 문제상황을 마주하는 모습은 꽤 용기있게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목욕탕을 다니며 정희와 승진에게 심심한 위로를 받은 여자는 비로소 문제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류해오던 그녀들은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던 각각의 변을 하나의 길고 견고한 수평선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서로에게 서로의 등을 맡기며 서툴게나마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 그녀들은 목욕탕 안을 가득 채운 수증기 위로 아픔과 슬픔을 함께 떠나보낸다.

여자는 제 안의 슬픔과 분노를 떠나보낸 뒤에 어떤 결정을 내린다. 자신이 아끼는 원피스를 입고,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자연스럽게 내뱉어본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내뱉는다. 남편을 불러내는 통화에서 "임정호씨. 나 정윤주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비로소 여자가 아닌 정윤주가 되어 기억될 것이다. 결혼 후 달라진 모습에 실망하며 실증을 느꼈을 남편에게도 아내, 아이들 엄마라는 이름 대신 정윤주라는 이름을 확실히 기억시킨다. 『틈』에서 이름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본인이 본인으로 인정 받는다는 것. 어떤 의지적이거나 소외적이거나 내성적인 존재를 탈피해 주체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주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순간 완전한 개별성을 갖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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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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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읽어서 다행이다. 책을 구입한 건 꽤 오래전 일인데도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표지와 제목에 홀려 책을 구입했으나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적 글쓰기를 구현하고 있는 김선영의 소설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초반부에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2012년 4월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다. 소설가, 라고는 하나 김선영 작가가 출간한 작품은 고작 4권에 그친다. 청소년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거듭 책을 출간하며 더 나은 작가로 성장하지는 못한 듯하다. 『시간을 파는 상점』은 몰입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청소년 사이의 유대나 우정, 문제해결 능력을 빼고 바라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설이다. 작가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화적 성격이 제대로 융화되지 않았던 점이 특히 아쉽다.


2012년 당시 이 작품이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꼽힌 이유는 '어줍잖게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청소년인 척 쓴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너무 십대처럼 보이고 싶었던 과한 욕심이 물결(~)과 이모티콘(^^), 넷용어(~뎅, ~용)를 사용하게 만들었고 그런 식의 문장 구사력과 어휘 사용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소설이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N소설체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는데 사소한 연애담이나 일진놀이가 배제된 소설이라는 점만 빼면 큰 구별점이 없는 소설인 것이다. 그 말인 즉, 당시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이 작품에 '청소년의 시선에서 문제를 바라보았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통상적인 1318세대들에게 읽기를 권할 정도로 좋은 소설은 아닌 것이다.


『시간을 파는 상점』의 장점은 '시간'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거대 담론이자 가장 까다로운 소재인 시간 개념과 시간의 중요성, 상대성을 어떻게든 이야기에 녹여내려 한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 때론 시간에 발목 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는 말 등 시간에 관련된 상이한 관용어나 속담, 경험담을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로서 체득한 시간 이론이나 개념을 녹여내려 한 점은 가상하나 그러한 것들이 서사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단점으로 남는다. 김선영 작가는 그리스 신화의 태초신인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대지)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족의 막내 아들 크로노스를 주변 모티프로 가져왔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이아의 부탁을 받아 거대한 낫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버린 신으로 알려져 있다. 제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의 저주를 받아 아들 제우스에 의해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갇히고 만다. 이 소설에서는 크로노스를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두어 '상점'의 대표 아이콘으로 사용했는데,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크로노스와 온조를 동일선 상에 놓은 것 같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제목의 의미가 단순한 심부름 센터의 역할에 그쳤다는 점도 아쉽다. 10대의 온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낸 것이 심부름 센터를 벤치마킹 한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것은 억지스러우나 신선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온조가 내건 윤리 기준과 운영 방침은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고,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대처하고 반론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어린 온조가 얼마나 잘 대처하는가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온조만의 방식으로 '그런 류의 상점이 아니다'라고 어필할 수 있는 특이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일차원적인 사유로만 밀어 붙이기만 해서 답답해졌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가게라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고, 그런 오해에 대해 온조 나름대로 반론을 펼치거나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너무 미약하다. 그저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다. 또한 온조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소방사였던 아버지의 죽음이 한 순간에 가계를 휘청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한 비약이다. 단지 '엄마 혼자 일 하는 게 힘들고 피곤해 보여서'라는 이유만으로 온조가 아르바이트를 결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온조가 효녀라는 컨셉이 모든 것을 설득시켜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서사가 가지는 힘보다는 개개의 사건이 가지는 몰입력이 좋은 소설이었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유기적 흐름도 관계도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시간'에 대한 꾸준한 어필과 개념적 설명 같은 것들이, 개개의 사건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주변을 되돌아보는 온조의 태도가 따뜻하게 다가온 소설이다. 김선영 작가는 온조만큼이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작가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손을 많이 내밀고, 지나치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나치게 긍정적인 어투로 모든 것을 감싸려 하는 데 부러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십대들의 언어를 무리해 따라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건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겨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시간'이라는 모티프 아래 하나의 서사로 구성되지 못했다. 에피소드 각각의 흥미요소와 재미요소, 교훈과 몰입력은 상당했지만 단지 그 뿐. 서사 전체적인 흐름이나 맥락, 설득력은 상실된 불완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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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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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보다 기억하는 게 많았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도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싫은 내용은 더더욱 빨리 잊어버리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신경한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생각했고,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이나 비통한 경험을 떠올리며 깊게 공감해주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종종 그런 비난이나 질책에서 자유롭고 싶을 때에는 기억나지 않는 내용을 기억하는 척 넘어갈 때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가며 적당한 말을 던질 때도 있었다. 그들은 얼떨결에 떠벌린 자신들의 흠집이나 잊고 싶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안도했으면서도 동시에 어쩜 그렇게 무신경하고 둔하냐며 질책했다. 기억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인지 그들은 모르는 거다. 자신들만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되길 바라는, 기억해주길 바라는 그것들이 내게 혹은 남에게 기억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고,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굳이 기억해가며 공감하고 연대할 이유가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바꿔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나와 다를 바 없는, 취사선택형 기억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한 부분이 상대의 기억에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만 날카롭게 반응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많은 것을 자주 잊어버리기 보다는 기억하지 않는 쪽에 가깝고, 애써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스쳐가는 편에 가깝다. 쓸모와 필요가 충분하다 느껴지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는 취사선택형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런 방식의 기억이 다른 상황에서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되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다. 사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건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 독이 되는 부분이라서 항상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지난 이 년 동안 스토리텔링 교육을 받으며 만화/애니메이션 대본을 쓰거나 스토리 구성을 진행했는데,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모티프를 얻은 어떤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와 같은 매체 작품을 곁들여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중간한 기억력이 가장 큰 흠이 되는 것마냥 지적을 받곤 했다.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감독의 이름이나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보다는, 서사의 진행 과정과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 인물 개개의 캐릭터성과 대사 전달력 등 내가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기억을 하는데 "제목이나 출연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대충 이러한 영화의 어느 부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설명을 하면 열에 여섯은 "그건 굉장한 흠인데"라고 운을 땠다.


어중간하게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언제나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끄러움은 무신경함이 되었고, 이런 무신경함은 안 그래도 편협했던 기억력을 더욱 편협하게 만들었다. 내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도, 타인의 일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 것. 나와 관계된 주변인의 사건이나 대화의 내용조차 오래도록 기억하지 않는 게 때때로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에는 애써 기억하고자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소재를 필요로 하거나 묘사 노트를 기록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뛰어나지 않더라도 부족하다 여겨지지 않을 만큼의 기억력을 바라곤 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본 풍경이나 사람들의 표정, 차의 색깔, 빛의 변화, 바람의 흐름, 코끝을 스쳐간 냄새 같은 것들을 시작해 내가 만난 사람들의 지어보인 표정과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 내 주변에 앉은 어떤 타인들의 고된 몸짓이나 대화 내용과 그들에게서 나는 향기 같은 것들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길 소원했다. 하지만 윤이형이 만들어 낸,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을 마주하고 나니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지율에게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지율의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것들은 각각의 클립 영상으로 저장 된 모든 기억들이다. 유년시절부터 마흔 살에 이르기까지 살아오며 경험한 수많은 일들이 각각의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다양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고 원할 때 꺼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지만 지율의 경우에는 달랐다. 필요한 장면을 기억할 수 있는 건 맞았지만 다른 기억자들처럼 사진을 찍듯 이미지화 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재생되는 수많은 기억들 사이에서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지율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으나 그것을 선택받은 개인의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질병'으로 여긴다. 모든 상황을 오롯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게 편리하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음을 지율은 보여준다. 윤이형 작가는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 가깝다면 가깝다고 말할 수 있고 멀다면 멀다고 말할 수 있는 2058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지율의 인생과 연애에 국한 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지만 그 개인적인 기억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강제된 객관화를 발휘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어머니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노려보지도, 아버지의 편에 서서 어머니를 나쁜년이라 욕하지도 못하는 지율의 상황은 무덤덤하다기 보다는 안쓰러운 쪽에 가까웠다.


지율은 '평범함'이라는 지점에 가닿고 싶어 한다. 남들처럼 기억나는 것만 기억하고, 기억나지 않는 것을 떠올리기 위해 애써보는 것,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대화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 어떤 한 가지를 우위에 두고 그것을 칭송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지율이 원하는 지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율은 그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복용 중인 약의 효과 때문이라도 그는 조금씩 망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온유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잘려나간 필름의 한 부분처럼 그 기억만 도려내진 것을 경험한 그 때처럼 그는 평범해질 것이다. 하지만 온유가 기억하고 있던 그와 지금의 그가 다르기에, 그가 기억하지 못한 기억의 일부분 때문에 그는 온유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겠지. 개인적인 연애소설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사소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평범하다 말하기도 어려운 소설이 된 데에는 지율 스스로 옮겨 놓은 무게점이 온유에 가깝지 않아서다. 시소의 양 끝에 앉아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들은 각각의 다른 시소를 타고 스스로 무게점을 설정하고 있었다. 온유는 기억나지 않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균형을 찾아갔고 지율은 그런 온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무게점을 옮기다 한 쪽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시소 아래로 떨어진, 고꾸라진 지율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것도 결국 온유라는 건 신기한 일이다.


"남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잊지 못해서 전 여자친구에게 불쑥 전화하는 거? 그거 비매너야." 확실히 그렇지만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니?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대가 유일하다면 어떨까. 지율은 더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지극히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여 온유에게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물론이지. 나는 너를 기억해.'라는 답장을 받았을 때 지율은 어떤 힘을,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윤이형이 써낸 『개인적 기억』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도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면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그런 힘을 얻기 시작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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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기 - 삶의 속도를 늦추는 독서의 기술
데이비드 미킥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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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기』는 문학적 텍스트를 깊게 향유하기 위한 '독자의 태도'를 이야기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동반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것에 앞서, 작가를 존중하고 텍스트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독자로서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보다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 제대로 읽는 방법

 의도치 않게 꽤 오랫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었다. 대략 한 달 가까이 이 책을 붙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읽은 기간은 2주 정도. 읽어보자, 결심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만 책의 구성이나 이야기하는 방식, 이야기하는 내용이 문학과 독서,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깊게 빠져들어 읽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웠던 건 이렇게 좋은 책을 이제야 만났다는 점. 졸업 전에 학과 수업을 복습하는 기분이었다. 교수님들이 해주셨던 이야기나 미학에 대한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부터 희곡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 우리 과 친구들을 포함해 '정성 어린 독자'이길 원하는 이들에게는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미국 휴스턴 대학 영문학자 교수인 데이비드 미킥스는 텍스트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독자가 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느리게 읽기(Slow Reading)』를 썼다. 당신이 문학을 소비하는 쪽에 관심이 있든, 생산하는 쪽에 관심이 있든 더 잘 읽고, 잘 생각하고, 잘 살고 싶어 한다면 이 책은 지적인 생존 바이블이 되어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진정한 독자를 만들기 위한 인문 실용서 즉, '제대로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다양한 읽기 방식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책 읽는 방법'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방식은 '효율적으로 책을 읽는 방법'이지 '책을 통해 깊게 사유하는 방법'이 아니다. 당신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원하는 정보만을 수집해 읽는 방식인 통독,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읽어내는 속독과 달리 데이비드 미킥스가 강조하는 '느리게 읽기'는 '필요 이상의 정독' 쯤으로 표현 가능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느리게 읽기(Slow Reading)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 나가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사유하고 탐색하는 과정을 즐기는 독서 방식이다. 덧붙여 당신이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해 책을 읽거나 '즐거움(쾌락)'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독자가 아니라면 '느리게 읽기'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느리게 읽기를 실천하면 느림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자아를 마주한 이후엔 보다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느리게 읽는다는 것: 즐겁게 이해하며 읽기

 느리게 읽기는 텍스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앞서 작가의 창작행위에 대한 존중과 완성된 텍스트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두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편의 글이 나오기까지 작가들이 얼마나 고심하는지, 그 한 편은 완성시키기 위해 몇 번의 수정(퇴고)이 이루어지는지, 예상 가능한 결말과 독자가 희망하는 결말, 작가가 선택한 결말을 사이에 두고 어떠한 필연성과 개연성, 의도가 포함되었는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다. 모든 독자들이 작가의 결정에 순응하고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작가의 사상이나 내러티브 전개방식에 존경을 표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작가가 텍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소요한 시간과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작가 나름의 의도와 판단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 의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신형철 식 표현을 빌리자면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 충분하지 않은 근거와 정황, 생각만을 가지고 쉽게 제단하지 않는 것이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자 작가에 대한 존중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존중을 바탕으로 할 때 '느리게 읽기'는 시작된다.

 

 데이비드가 가장 경계한 것은 속독과 통독이다. 제한된 시간 내에 주어진 텍스트를 빨리 읽어내려가는 속독. Z, V, F등 다양한 속독 기술이 있지만 이런 식의 읽기는 문제풀이에만 도움이 될 뿐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거나 기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통독 역시 마찬가지다. 정보를 얻기 위해 텍스트를 빠르게 훑어보는 통독은 자신이 원하는 내용만 기억하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기억되기 쉽다. 많은 책을 빨리 읽을 때는 이런 두 가지 읽기 방식이 도움될지 모르겠지만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이야기 나눌 때에는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슬로우리딩은 빨리 읽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때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슬로우리딩에 어떤 특별한 공식이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러 번 반복해 생각하며,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하면 된다. 반 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책도 하루 혹은 이틀, 아니면 일주일 정도 공들여가며 읽거나 읽었던 책을 한 번 더 되짚어가며 읽는 것도 좋다. 궁금한 것, 의심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이다. 

 

 느리게 읽기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읽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SNS에서 내가 놓친 게 있는 건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고, 친구들이 보내오는 카톡을 즉시 확인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느리게 읽기를 실천하려 한다면 책을 읽는 동안은 SNS와 인터넷 모두에서 멀어져야 한다.이 지루하고 따분한 느리게 읽기의 최대 장점은 읽고난 후에 찾아오는 즐거움에 있다. 텍스트를 이해했다는 즐거움, 작가의 목소리에 일정 수준 반응했다는 즐거움, 독자 내면의 일부가 변화했음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느껴졌던 텍스트 속에서 '나의 일부'를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도 포함된다. 느리게 읽는다고 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읽을 필요도 없고 이제 막 글자를 배운 아이처럼 더듬거리며 읽을 필요는 없다. 텍스트를 다 읽고 난 뒤에 천천히 곱씹어보며 의미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텍스트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가 처음부터 핵심 단어나 문장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읽는 동안 이정표를 찾아내려면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하다. 가장 편한 방법은 마음이 맞는 동료를 찾아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작가와 마주하며 함께 대화를 나눈다. 가장 좋은 대화의 기술 중 하나가 경청이라면, 가장 좋은 독서의 기술은 인내하며 읽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책을 통해 열 네 가지 규칙을 소개한다. 데이비드 미킥스는 이 규칙들을 소설에만 적용시키려 하지 않는다. 문학 전반. 그러니까 단편소설, 장편소설, 시, 에세이, 희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적 텍스트에 느리게 읽기를 적용한다. 모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시, 느리게 읽을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던 에세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었던 희곡에도 느리게 읽기는 적용 가능하다.


느리게 읽기의 규칙

1.인내심을 가져라

2.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라

3.목소리를 파악하라

4.문체를 감지하라

5.처음과 끝에 주목하라

6.이정표를 찾아라

7.사전을 적극 활용하라

8.핵심 단어를 추적하라

9.작가의 기본 사상을 발견하라

10.의심의 기술을 길러라

11.작품을 분해하라

12.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13.다른 길을 탐험하라

14.또 다른 책을 찾아라


 

왜 읽어야만 하는가?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2013년 기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내 성인 평균 독서량은 0.76권에 불과하다. 1권도 안 읽고 다음 달로 넘어갈 때가 수두룩하다는 이야기인데 책을 읽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을 책으로 알려준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책 속에 정보가 있어서도, 교훈이 있어서도, 쾌락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어서다. 자아성찰과 성장. 이 두 가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자신과 마주한다. 문장 한 줄, 인물 한 명, 사건 하나에 몰입하기 시작할 수록 사람들은 내면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던 자신과 만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자신과 만나는 일은 명상을 통해 자신과 만나는 일과 다르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나 화자를 통해 유년의 기억, 혹은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는 것. 현재의 본인조차 외면하고 있었던 본성에 가까운 자아를 마주했을 때 발현되는 카타르시스는 단순한 독서보다 느리게 읽기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독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책읽기는 어디까지나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행위이기에 필요 이상으로 권유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슬로우리딩(Slow Reading) 적용의 문제점

 데이비드 미킥스가 이야기하는 슬로우리딩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책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읽기 방식 자체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슬로우리딩을 국내에서 적용할 경우 '적용 가능한 작품'을 찾기 힘들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어떤 작품을 읽는 게 좋을까? 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읽기를 권유한다. 반드시 고전을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놀부전, 심청전, 열하일기와 같은 고전을 제외하면 '고전'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도 많지 않다. 국내 문학은 역사가 짧고 주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탓에 10년 단위로 사조를 나눌 수 있을만큼 급격하게 변해왔다. 그 사이 명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이 나오긴 했지만 톨스토이, 헤밍웨이, 허먼 멜빌, 카프카에 준하는 작가들이 배출된 것도 아니며 그들의 작품에 준하는 단편/장편 작품이 출판된 것도 아니라 작품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두 번째는 느리게 읽기의 정도다. 얼마나 느리게 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이후에 서평으로 올릴 예정이지만 일본에서 슬로 리딩으로 이름 날리며 EBS에도 소개된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은 교과서 대신 『은수저』라는 작품을 3년에 걸쳐 읽기, 쓰기를 병행한 독후활동과 함께 가르쳤다. 물론 그 학교는 한 명의 담임이 장기간에 걸쳐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곳이기에 3년 동안 한 권의 책으로 슬로 리딩 교육이 가능했지만, 국내에서는 부적합하다. 국내에서는 최장 1년, 최소 3개월 정도인데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3개월에서 6개월 정도가 적당하며, 개인적으로 읽을 경우에는 아무리 길어도 한 달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이 외에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문제점은 많지만 지금은 대표 문제 두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슬로우 리딩(느리게 읽기)이 독자들이 실천하는 읽기 방식 중 가장 최선의 읽기 방식이며, 모두에게 전파해주고 싶을만큼 유익한 읽기 방식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독자가 이렇게까지 읽을 필요가 있느냐? 고 묻는다면 속 시원하게 답해주긴 힘들 것 같다. 모두가 평론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데이비드 미킥스가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처음에 밝혔지만 '보다 나은 독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는 이 책을 서술했다. 후반에는 실제로 작품을 분석해 놓아서 다소 지루하게 읽힐지도 모르겠지만, 분석된 텍스트를 읽기 전에 분석의 대상이 된 작품을 먼저 읽고 데이비드 미킥스의 시선과 본인의 시선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 최대한 다양한 작품을 자세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많은 작품을 읽기 위해 가볍게 읽는 것보다 한 편의 작품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중요하다. 느리더라도 조급해 하지 말고 자세히 읽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눠보길 추천한다. 느리게 읽기만큼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이야기하며, 많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당신의 세계는 보다 확장될 것이고, 당신의 삶 역시 풍요롭게 변화될 것이다.

 

 기억하자. 모든 것은 '느림'에서 출발한다.

한순간이 아닌 오래 지속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독서를 하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몇 번이고 책으로 다시 돌아가 그 책을 제대로 알고, 들인 시간만큼 보상을 얻어야 한다. 가치 있는 독서의 비결은 바로 시간이다. -p.20

최선의 방식으로 독서하는 법을 배워 지적인 독서를 하는 사람은 매 순간 선택을 하게 된다. 눈앞에 놓인 문장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인지, 작품 속의 논리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작가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최대한 많은 측면을 깨달을수록 텍스트의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닌 작가의 파트너가 된다. 글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무엇이 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지 파악해 나간다. …책에 반응하는 법을 선택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p.39

가치 있는 문학 작품은 어떤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개념 혹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처럼 양면적인 감정을 가진 복잡한 생물이다. 한 작품을 진정으로 보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 작품과 함께 살아야 한다. 바로 그래서 브라우어가 말했듯이 느린 동작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작품을 꿀꺽꿀꺽 삼키기보다는 찬찬히 씹어 소화해야 한다. -p.52

책과 독자는 서로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책들은 "지금 나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책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다. 좋은 책일수록 그 메시지는 더욱 절박하며,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인내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p.85

한 작품을 붙들고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여백 메모를 이용하여 자신의 반응을 느끼고 그 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좋다. 작품에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동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메모를 하는 의미는 작품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이며, 작품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집필 방식을 음미하기 위해서이다. -p.211

하지만 독자로서의 목소리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저 작가의 말과 생각을 흉내 내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독자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역설적이게도 작가의 비전을 따를수록 `진정한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렇게 따르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존경과 존중의 마음으로 작가와 씨름하는 것이다. -p.222

관객은 일종의 확대된 운명, 혹은 배우의 운명을 판결한 법관 -p.341

독창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독창성과 겨루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나약하든 유력하든 혁신적이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동등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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