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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0
서유미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 서유미를 읽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 사람의 데뷔작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당분간 인간』이라는 제목의 첫 소설집 이후에 꾸준히 그녀의 책을 읽고 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기억나는 서유미의 소설들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사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당분간 인간』으로 그녀를 처음 알았을 때, '눈이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 그 시선이 날카롭고 깊어 지켜보는 대상의 면면만 보고 끝나는 게 아닌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모종의 불안이나 공포, 어둠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유미는 인간관계를 결코 대충 넘기지 않는다. 가장 친밀했던 사이가 어떻게 멀어지는지, 그 멀어짐 사이에 어떤 두려움과 공포, 불안, 불신 등이 자라나기 시작하는지, 관계의 불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펑 터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진행되어 온다는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세하게 설정해 이야기 한다. 관계의 변화, 관계의 뒤틀림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재현되면서 내 곁, 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첫 소설집에서만 하더라도 서유미는 환상성 안에 숨어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그려냈다. 하지만 지금은 환상성이라는 베일을 걷어 버리고 우리가 익히 봐온 풍경, 익히 봐온 사람들, 익히 들어온 이야야기를 통해 일상적 풍경, 일상적인 인간관계의 변화와 불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전보다 깊고 따뜻하며 부드러워진 듯하다.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에 서유미의 『틈』이 출간되었음을 알고난 뒤 나는 그 중 일부를 사들였다. 서유미와 윤이형, 안보윤의 책이었다. 사놓고 보니 모두 여성작가였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내면을 쓰다듬거나 들여다보는 작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역시 서유미의 책. 슬픔이 가득 차올라 목구멍을 비집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상황인데도 몸 속에서 널을 뛰듯 오르내리는 열감을 식히느라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는 중년 여성의 아픔을 그렸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아내에게 보내는 위로라고 말하면 조금 거창해보일까. 연애 시절과 비교해 풍만해진 몸매를 노려보며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건 왜 남자들의 몫인가. 가부장적 사회현실이 이 시대의 많은 중년 여성을, 아내를,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손가락질하며 어떻게 공격하는지 이 책에 나와있었다. 그걸 견디며 남편을 챙기고, 자식을 챙기고, 가계를 유지하며 살림을 행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살림스트레스가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도 나와있었다. 결코 아름다운 소설은 아닌데 여자가 그 아픔을 묵묵하게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뜨겁게 다가와서 오히려 아름답다고 느끼고 말았다.
상냥한 책이길 바랐다. 표지의 삽화처럼 따스하게 안아주는 온기나 손길이 느껴지는 책이기를 바랐다. 나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따스한 온기 대신 눅눅한 습기와 울음이 북받쳤지만 제법 담담하게 책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아프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길게 괴로워하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열고 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다. 노벨라 특성상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언제든 펼쳐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틀 정도를 들고 다니며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올 때마다 책을 펼쳐 읽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었는데 문장 자체만 놓고 따져보면 그렇게 강렬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문장과 문장이 호응하며 문단과 문단이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해 낼 때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눈치 보지 말고 담배를 피워도 좋아, 외도를 묵인하지 않아도 좋아, 더 이상 견뎌내지 않아도 좋아, 라고 말하는 소설은 아니다.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많이 귀 기울이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공감하고, 보듬어주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 한마디가 이 책에 들어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높은 밀도를 가진 수증기를 들이마시며 탕에서 몸을 불리고, 몇 차례 얼굴만 마주쳤을 뿐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인물들과 말을 섞고 음식을 나눠 먹고 아픔을 나누다 이젠 서로의 등을 맡기게 된 그녀들은 소녀들처럼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을 뿐이다. 내 치부와 내 아픔이 소문처럼 퍼져 나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중년의 여성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은 결코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픔을 사소한 것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려 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위선과 가식을 일삼지도 않는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임은 세 개의 꼭짓점을 갖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로 고정된다.
여자는 더 이상 여자이길 거부한다.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엄마라는 호칭이나 여자라는 명사 대신 정윤주라는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한다. 여자가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버렸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토리 전반에서 보여주었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대고 문제상황을 마주하는 모습은 꽤 용기있게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목욕탕을 다니며 정희와 승진에게 심심한 위로를 받은 여자는 비로소 문제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류해오던 그녀들은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던 각각의 변을 하나의 길고 견고한 수평선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서로에게 서로의 등을 맡기며 서툴게나마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 그녀들은 목욕탕 안을 가득 채운 수증기 위로 아픔과 슬픔을 함께 떠나보낸다.
여자는 제 안의 슬픔과 분노를 떠나보낸 뒤에 어떤 결정을 내린다. 자신이 아끼는 원피스를 입고,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자연스럽게 내뱉어본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내뱉는다. 남편을 불러내는 통화에서 "임정호씨. 나 정윤주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비로소 여자가 아닌 정윤주가 되어 기억될 것이다. 결혼 후 달라진 모습에 실망하며 실증을 느꼈을 남편에게도 아내, 아이들 엄마라는 이름 대신 정윤주라는 이름을 확실히 기억시킨다. 『틈』에서 이름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본인이 본인으로 인정 받는다는 것. 어떤 의지적이거나 소외적이거나 내성적인 존재를 탈피해 주체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주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순간 완전한 개별성을 갖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