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기억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9
윤이형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른 사람들보다 기억하는 게 많았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도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싫은 내용은 더더욱 빨리 잊어버리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신경한 사람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생각했고,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이나 비통한 경험을 떠올리며 깊게 공감해주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종종 그런 비난이나 질책에서 자유롭고 싶을 때에는 기억나지 않는 내용을 기억하는 척 넘어갈 때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가며 적당한 말을 던질 때도 있었다. 그들은 얼떨결에 떠벌린 자신들의 흠집이나 잊고 싶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안도했으면서도 동시에 어쩜 그렇게 무신경하고 둔하냐며 질책했다. 기억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인지 그들은 모르는 거다. 자신들만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되길 바라는, 기억해주길 바라는 그것들이 내게 혹은 남에게 기억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고,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굳이 기억해가며 공감하고 연대할 이유가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바꿔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나와 다를 바 없는, 취사선택형 기억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한 부분이 상대의 기억에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만 날카롭게 반응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많은 것을 자주 잊어버리기 보다는 기억하지 않는 쪽에 가깝고, 애써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스쳐가는 편에 가깝다. 쓸모와 필요가 충분하다 느껴지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는 취사선택형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런 방식의 기억이 다른 상황에서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되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다. 사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건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 독이 되는 부분이라서 항상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지난 이 년 동안 스토리텔링 교육을 받으며 만화/애니메이션 대본을 쓰거나 스토리 구성을 진행했는데,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모티프를 얻은 어떤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와 같은 매체 작품을 곁들여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중간한 기억력이 가장 큰 흠이 되는 것마냥 지적을 받곤 했다.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감독의 이름이나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보다는, 서사의 진행 과정과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 인물 개개의 캐릭터성과 대사 전달력 등 내가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기억을 하는데 "제목이나 출연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대충 이러한 영화의 어느 부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설명을 하면 열에 여섯은 "그건 굉장한 흠인데"라고 운을 땠다.


어중간하게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언제나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끄러움은 무신경함이 되었고, 이런 무신경함은 안 그래도 편협했던 기억력을 더욱 편협하게 만들었다. 내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도, 타인의 일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 것. 나와 관계된 주변인의 사건이나 대화의 내용조차 오래도록 기억하지 않는 게 때때로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에는 애써 기억하고자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은, 소재를 필요로 하거나 묘사 노트를 기록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뛰어나지 않더라도 부족하다 여겨지지 않을 만큼의 기억력을 바라곤 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본 풍경이나 사람들의 표정, 차의 색깔, 빛의 변화, 바람의 흐름, 코끝을 스쳐간 냄새 같은 것들을 시작해 내가 만난 사람들의 지어보인 표정과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 내 주변에 앉은 어떤 타인들의 고된 몸짓이나 대화 내용과 그들에게서 나는 향기 같은 것들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길 소원했다. 하지만 윤이형이 만들어 낸,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을 마주하고 나니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지율에게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지율의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것들은 각각의 클립 영상으로 저장 된 모든 기억들이다. 유년시절부터 마흔 살에 이르기까지 살아오며 경험한 수많은 일들이 각각의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다양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고 원할 때 꺼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지만 지율의 경우에는 달랐다. 필요한 장면을 기억할 수 있는 건 맞았지만 다른 기억자들처럼 사진을 찍듯 이미지화 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재생되는 수많은 기억들 사이에서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지율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으나 그것을 선택받은 개인의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질병'으로 여긴다. 모든 상황을 오롯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게 편리하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음을 지율은 보여준다. 윤이형 작가는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 가깝다면 가깝다고 말할 수 있고 멀다면 멀다고 말할 수 있는 2058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지율의 인생과 연애에 국한 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지만 그 개인적인 기억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강제된 객관화를 발휘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어머니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노려보지도, 아버지의 편에 서서 어머니를 나쁜년이라 욕하지도 못하는 지율의 상황은 무덤덤하다기 보다는 안쓰러운 쪽에 가까웠다.


지율은 '평범함'이라는 지점에 가닿고 싶어 한다. 남들처럼 기억나는 것만 기억하고, 기억나지 않는 것을 떠올리기 위해 애써보는 것,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대화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 어떤 한 가지를 우위에 두고 그것을 칭송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지율이 원하는 지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율은 그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복용 중인 약의 효과 때문이라도 그는 조금씩 망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온유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잘려나간 필름의 한 부분처럼 그 기억만 도려내진 것을 경험한 그 때처럼 그는 평범해질 것이다. 하지만 온유가 기억하고 있던 그와 지금의 그가 다르기에, 그가 기억하지 못한 기억의 일부분 때문에 그는 온유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겠지. 개인적인 연애소설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사소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평범하다 말하기도 어려운 소설이 된 데에는 지율 스스로 옮겨 놓은 무게점이 온유에 가깝지 않아서다. 시소의 양 끝에 앉아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들은 각각의 다른 시소를 타고 스스로 무게점을 설정하고 있었다. 온유는 기억나지 않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균형을 찾아갔고 지율은 그런 온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무게점을 옮기다 한 쪽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시소 아래로 떨어진, 고꾸라진 지율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것도 결국 온유라는 건 신기한 일이다.


"남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잊지 못해서 전 여자친구에게 불쑥 전화하는 거? 그거 비매너야." 확실히 그렇지만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니?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대가 유일하다면 어떨까. 지율은 더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지극히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여 온유에게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물론이지. 나는 너를 기억해.'라는 답장을 받았을 때 지율은 어떤 힘을,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윤이형이 써낸 『개인적 기억』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도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면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그런 힘을 얻기 시작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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