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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의 아바타일까 ㅣ 사계절 1318 문고 43
임태희 지음 / 사계절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누구의 아바타일까?
친구에게서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이 책의 주인공. 어쩐지 우리랑 닮은 것 같아.”라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주인공이 비관론자라도 되는 거야? 라는 장난식의 물음에 내 친구는 조금은 묘한 표정으로 “아니. 그냥 환경이.”라며 잘라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고에 다닌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 단지 이 두 가지 뿐. 이외의 것들은 모두 다른 것이었다. 그래. 이 책이 우리랑 닮은 것은 첫 구절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는 하나의 전쟁터로서, 가식과 위선이 가득한 세계이며 ‘선생’이 ‘학생’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자신들에 대한 ‘순종’과 ‘복종’ 뿐이다. 오직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말해주길 바라며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좁은 틀에 맞춰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세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학교다. 이런 교육 때문에 학생들과 선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는 가식과 위선, 거짓이 판을 치고 있다. 오직 상대가 바라는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서. 상대가 생각하는 좋은 이미지로 남기 위해 우리들은 가식과 위선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학교라는 작은 세상에서 선생이라는 정복자들에게 휘둘리는 나를 보며 줄곧 생각했었다. 왜 나는 누군가에게 휘둘려야만 하는 거지? 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 남에게 이해시키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면 학생들이 절대 반항하지 못하도록 ‘내신점수 감점’이라는 협박을 내걸면서 왜 그들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만 하는 걸까? 게다가 나는. 아니 우리 학생들은 왜 그런 시시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서까지 내신 점수를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우리 모두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사람에게는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데 어째서 선생들은 학생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고 자신들 멋대로 조종하려 드는 걸까? 중·고등학교 6년에 대학교 4년을 선생들에게 조종당하는 것도 모자라 나머지 인생까지 지배당해야 한다면 이 세상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이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는 것도 너무 억울한 일이라서 맞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아바타는 지금 날 보고 웃고 있다.
방실방실 잘도 웃는다. 감정 상태를 '기쁨'으로 설정해 놓아서 그렇다.
저 아이가 사실은 울고 싶다면… 저 아이는 언제, 어떻게 울까? -영주 독백 중-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을 이 책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영주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얼굴에 두꺼운 가면을 쓰고 생활해가는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사람. 언제나 ‘나’라는 자아는 가슴 깊숙한 곳에 가두어두고 부모, 친구, 선생님이 보고 싶어 하는 ‘나A’로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어야만 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는, 주체성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아이. 그게 얼마 전의 내 모습이었다.
어깨가 무거워 기지개 한 번 제대로 피지 못 할 정도로 잔뜩 굳어서 생활해야 하는 것에 지쳐 ‘자살’을 생각 했던 적도 있었고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위로 받지 못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생각만 할 때도 있었다. 언제나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고, 혼자이길 바랬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렇게 흥청망청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자살’이라는 것이 유일한 도피처가 아니라고. 그렇게 답을 얻은 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들어온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드디어 답을 찾아냈다는 안도감에서였다. 이제 진정한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그 뒤로 나는 매일같이 글을 썼다. 글을 쓸 때, 진정한 ‘나’를 바라볼 수 있다고 느낀 나는 죽어라 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하루하루 나는 진정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언제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가 누구인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남이 생각하는 ‘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인물이 중요할 뿐. 그동안 나는 단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주체성을 잃어버렸고, 조언 해 주는 사람 없이 혼자라는 생각에 우울증까지 겹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뻔 했었던 지난날의 나는 ‘어른’으로 가기 위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글에 빠져 살면서 나는 조금씩 변화해 갔다. 가끔씩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초조해 지는 것만 빼면 나 자신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 나는 점점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들과 조금씩 말문을 터가면서 ‘친구’라는게 어떤 건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를 떠나서 상대를 존중할 줄 알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이것저것들에 치이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품고 살았던 어둠에서 빠져나와 밝은 빛을 걸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준 <나는 누구의 아바타일까?>라는 책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