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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 - 나도 작가 2
이현희 지음 / 나라말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고르다 보면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유독 선명하게 보여지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대단한 책인 것도, 시시한 책인 것도 아닌 것 같은 그저그런 평범한 책이 그냥 마음에 콕 박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만드는 것. 바로 이 책이 그랬다. 가만 보면 다른 책들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일러스트에 지나치게 추상적인 제목이 붙어있는 책이었지만, 이 책은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지나치게 닮아있는, 아니 닮았다는 말 보다는 이 시기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법한 괴리감이 너무나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죽어서도 거미줄을 놓지 못하는 거미 다리의 숙명이 소름끼치게 무섭고 안타깝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사는 하루하루도 저런 모습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미 습관이 된 일과에 맞추어 시간을 그럭저럭 흘려보내지만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어린 시절에는 열여덟 살이 되면 아주 멋지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게될 줄 알았는데, 지금 나의 열여덟은 몸통 없이 거미줄에 들러붙어 있는 거미 다리와 다를 게 없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제1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작가, '이현희'가 쓴 첫번째 소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에서 <거미 다리의 숙명>이라는 단락이 기억난다. 다른 거미에게 잡아먹혀 몸통이 너덜너덜해진 거미는 죽어서까지 거미줄을 놓지 않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사실은 나도 그런게 아닐까? 너덜해진 몸통과 다리만 남은 거미가 거미줄을 놓지 못했던 것처럼 한 손에는 입시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글에 대한 열망을 쥐고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서라도 붙어있는 나는 그런 거미 다리의 숙명과 같지 않을까? 이대로 놓쳐버리면, 여기서 놓아버리면 그동안의 시간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쏟아 부었던 시간과 노력들이 다 헛된게 될까봐서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젠가, 학교를 '전쟁터'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전쟁터의 피비린내 보다는 짠내음 풍기는 눈물이 가득하고, 살벌한 총성과 폭음 보다는 평균점에 호들갑을 떨어대야만 하는.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총격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상관 보다는 죽도록 공부해서 학년 과중 1등 좀 하자는 담임의 극성이 전쟁터의 그것들과 닮아있었으니까. 제 아무리 친하게 지내던 친구더라도 알게모르게 성적에 대한 신경전이 붙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은 대학과 회사를 차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서 1년을 함께 공부한 친구들을 밟고 올라 서야만 하는 학교라는 공간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잔인한 전쟁터와 닮아있다. 난 이런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밟혀야만 하는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남아 후회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그런 것 처럼. 이 자리를 지나쳐간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어른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 좋은 미래. 좋은 생활'을 위해 공부와 꿈. 두가지 모두를 놓지 못하는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의 난 예전처럼 상 하나 타오지 못해 안달이 나있거나,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지 못해 안달이 나있지도 않다. 그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가까운 미래보다는 조금 더 멀리 바라보는 법을 습득하면서 놓는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내 나이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아직도 가끔은 부모님께 반항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로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삶이 지루하기도 하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사랑이 두렵기도 하고, 덜 자란 사랑니가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열여덟은 물속에 사는 인어가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용감한 나이이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제1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나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 하지도 않고, 내 앞에 닥치지 않은 무언가에 벌벌 떨며 미리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공부와 이루고 싶은 꿈. 이 두가지는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단지 '지금의 나'를 즐기려고 한다.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버렸고, 성인이라고 하기엔 한참 어린. 샌드위치 빵 사이에 낀 토핑처럼 어중간한 위치지만 그런 어중간함이 가지는 매력은 두번 다시 맛 볼 수 없을테니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 모두가 어떤 누군가가 앞서 겪었던 일이라는 점이 내겐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고 있는 샘이다. 그동안 두려웠으니까. 한치 앞도 분간 할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손만 허우적 거리고 있던 내 손에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라는 등불이 쥐어져서 다행이라고, 전부를 비추어 볼 수는 없지만 내 발치 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등불만이라도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꼭 열여덟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말 할지도 모르겠지만, 열여덟이라는 나이이기에 더욱 절실히 와닿았던. 나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라는 안도와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해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