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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술은 사람을 쾌락에 빠지게 만들고, 공포는 사람을 절망으로 내몬다.
작가 김이환은 『절망의 구』에서 사람의 내면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해 냈다. 400페이지가 넘는 스토리 속에서 주인공인 '남자' 김정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한 할아버지의 "'무엇'을 조심하게, 젊은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남자'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현대라는 사회 속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있던 남자는 어느날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공포. 사람을 절망으로 내몰 수 있는 두마디이자, 사람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단어. '남자'는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아니, 이겨내려 하지도 않았다. 단지 끈임없이 도망치고 도망칠 뿐.
공포의 앞에서 돈도, 사랑도, 우정도 필요가 없었다. 그 누구에 대한 믿음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고, 밀치고, 죽이고, 밟고 지나가는 현대인의 지독한 이기적 심리에 치를 떨었다. 사람이 극한의 공포 앞에 서게 되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내면 심리를 꿰뚫어 보는 것으로 모자라 독자에게까지 고독과 공포가 주는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며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만드는 작가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사람을 빨아들인다고? 웃기지 마. 이 책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두려워해야 마땅할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게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죽음'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가진 이기적 심리다. 어떤 것을 계기로 품게된 이기적임은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병기니까.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남자'의 뒤나 곁에서 함께 도망쳤고, 어쩔때는 검은 구가 되어 남자의 뒤를 쫓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나 역시도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과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공포의 끝에 남은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구가 사라졌다는 기쁜 소식?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과 겸손함? 아니. 인간은 그런 것을 느낄 정도로 단순하지도 성숙하지도 않다. 오직 자신만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물일 뿐.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그 결말도 소설의 끝과 같지 않을까? 검은 구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은 밑바닥이 없는 절망을 맛보았다는 사실과 재앙을 가지고 온 '누군가'를 향해 들끓는 분노뿐.
소설의 구성요소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책은 '고정된 판에 맞게 만들어진 소설'보다는 '고정된 양식에 비롯하지만 차원을 뛰어넘는 소설'이었다. 거기다 예리있는(Edge있는) 작가의 시선이 한 몫 거들었다.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 검은 구를 연구해 신식병기로 만들려고 했던 정부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소설 속에 그려내며 작가는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고달픔과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절망을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는 메세지와 함께.
하지만 한 가지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 '남자'와 부딪힌 할아버지가 말한 '무엇'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소설 속에서도 나의 마음 속에서도 그것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남자가 자신과 부딪힌 할아버지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듣고 기억해 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사건의 전반부에서도 끝나지 않는 사건의 후반부에서도 나타나 남자 곁을 지나치며 "'무엇'을 조심하게, 젊은이"라는 말을 남긴 할아버지는 대체 무엇을 알리고 싶었을까? 곧 닥칠 대재앙을? 아니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기적 심리를?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기적인 마음은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절망으로 내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