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0) : 유영모와 태권브이

어쩌면 내가 다석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것은 그만큼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기대한 만큼은 물론이고 실망할 만큼도 숙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는데, 어쩌면 다석의 "진미"를 알기도 전에 내 관심사가 아예 그쪽에서 멀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와서 다석이면 어떻고 일석이면 어떻겠는가. 내게는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문득 책장에 있는 <다석 유영모 어록>을 꺼내 뒤적뒤적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나는 예수, 석가를 좋아하고 톨스토이, 간디를 좋아한다. 그런데 예수를 좋아하다 보니 예수의 이름에서 이러한 생각을 얻었다. 예수의 '예'는 여이가 합하여 예가 되었다. 예는 곧 여기다. '수'는 재주의 능력이다. 할 수 있느냐의 수가 바로 능력이나 재주를 말한다.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 예수다. 나의 매 손가락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재주와 능력이 있다. 위로부터 한량없이 내리는 수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는 그 힘이 지금도 자꾸자꾸 내린다. 한없는 능력이 이 손끝에 내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의 손은 하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이다. 이어이어 내려진 그 능력이 예수와 나를 이어지게 한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절대자에게 이어져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모양은 같다고 생각된다. (143쪽)

근데 솔직히 "예수"라는 이름을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라고 해석한 것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언어유희일지는 몰라도, 원래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결국 이는 다석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이요, 달리 말하자면 억측일 수밖에 없다. 나로선 이 대목을 접하는 순간, 이전부터 일종의 "다석 르네상스" 현상을 지켜보면서 품었던 의구심이 한층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지금이야 너도나도 "독창적인 우리말 사상가"니 "시대를 앞선 인물"로 추앙하는 다석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는 의구심이었다. 물론 다석이 특이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나 그와 같이 살다 간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독특하고 그의 인격이 고매했다고 해서, 그의 사상조차 대단한 것으로 한꺼번에 추켜세워지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이른바 "다석 르네상스"에는 다석이란 인물의 "삶"과 "사상"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신비화와, 또한 이른바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앞뒤가 전도된 열성이 없지 않음을 지적하고픈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나로선 다석이 과연 "보편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칸트나 헤겔" 급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느냐는 거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다석을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칸트나 헤겔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리고 굳이 칸트와 헤겔을 들먹인 것은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보편적인 사상가"의 대표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감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일 수 없었던 고충을 이해하시라.) 물론 한국인인 우리가 보기에 칸트와 헤겔의 사상이 "보편성"을 띠게 된 데에는 이른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두 사람의 사상이 어떤 "외적 요소"에 의해 그토록 각광받았던 것이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가? 철학사를 뒤져 보면 칸트와 헤겔 사이에도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그리고 중요하게 평가되었던 사상가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쩌면 칸트와 헤겔 역시 그런 숱한 사상가들 가운데 한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보편적 사상가"가 되었고, 나머지는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단순히 어떤 철학 "외적 요소", 그러니까 요즘 하는 말로 서구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라든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라든지, 또는 (헤겔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두 사람의 사상에 있어 어떤 "보편적 관심"을 일깨워주는 요소가 없었더라면, 이들의 사상 역시 일회적이고 당대적인 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소리"만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었고, 분명히 시대적이거나 개인적인 한계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상이 다른 시대, 또는 사상에 비해 뭔가 탁월한 면을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석은 어떨까? 다석은 흔히 종교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교와 불교의 배경 안에서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끌어안은" 인물로 묘사된다. 좋게 말하자면 "한국식 통합"이고, 노골적을 말하자면 결국 "짬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긴 모든 사상이 "짬뽕"이고 "잡탕"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석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떤 체계나 주저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물론 칸트와 헤겔의 시대 이후에 어떤 "거대 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은 바람직하기는커녕 도리어 무의미하고 "헛점만 만들어내는" 시도로 여겨진 감도 없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처럼 생전에 짧은 논문 하나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수많은 해석자들이 자처하고 나서면서까지 "무체계의 체계"를 수립해 주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즉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해몽은 해몽, 결코 "해몽"이 "꿈"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해석은 오독과 오해의 여지를 남기며, 그렇기 때문에 다석의 경우처럼 주저나 주장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사상가의 경우에는 "원문"을 대하기보다는 "해석"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해석자에 따라, 그리고 해석자의 의도에 따라 그 해석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다석의 생애에 대해, 그리고 다석의 사상에 대해 나온 책들(특히 다석의 수제자인 박영호의 저서)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석의 "탁월성"이 일종의 "비교우위"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다석의 위대함은 매번 "예수, 석가,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과 비교되어서만 드러날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는 내 오해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박영호의 논법이 "다석은 이런 말을 했는데, 이는 예수의 저런 말을 연상시킨다"거나 "다석은 이런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톨스토이의 저런 주장과 상통한다"는 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다석이 "예수나 톨스토이"를 숙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석이 그 두 사람에 필적할 만한 사상을 실제로 지녔는지 여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석이 지금처럼 "대중화" 되어버린 풍조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다. 생전에 김교신이 다석을 가리켜 "놀라운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펼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던 것이며, 다석 스스로가 김교신에게 "내 생각은 워낙 비정통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은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운을 띄웠던 것 역시, 다석에 관한 "신화"를 한층 두텁게 만들어주기는 할지 몰라도 오늘날 다석에 대한 갖가지 오해나 오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여겨져선 안 될 것이다. 또한 다석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사상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유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우리것으로 만들었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런지는 몰라도, 그의 "신학"(물론 이런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면)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것이었고, 차라리 일종의 신비주의자나 영성가로라면 몰라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칸트나 헤겔의 "보편적 사상"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물론 칸트나 헤겔 역시 기독교에 관한 논저를 남기기도 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사상이 "보편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와는 좀 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다석"인가? 나는 혹시나 그것이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다석은 <다석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네 권(거의 한 권이 무슨 국어대사전 만한)짜리 개인기록을 남겼는데, 이 대부분은 다석 특유의 언어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선 도무지 읽어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 어쩌면 다석이 일종의 "숨은 광맥"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 난해함, 또는 접근의 어려움에도 일말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모르니까 신기한 것이고, 모르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고, 몰라서 아직 연구가 안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연구하면 뭐라도 나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석이 오늘날 각광받는 한국 사상가로 떠오른 것은 신학 전공자이고 하이데거 전공자인 철학교수 이기상이 토로한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 문제로 고민한 한국의 사상가는 없는가?" 하는 의문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감히 지식인이라 말하기 뻘줌한 나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걸었으니) 서양사상으로 시작해 동양사상, 그리고 결국 한국사상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인데, 이는 오늘날의 서구화된 교육제도나 문화, 또는 사회풍조 속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회의 동기에 대해서도 일종의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서양사상을 파고들어가다 보니 한계가 느껴지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우리 사상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모조리 "전향자"나 "지적 속물"로 몰아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 앞에서 '우리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해 하다가 결국 '우리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철학자 이기상의 것이건 가수 김수철의 것이건, 어딘가 구차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들의 눈이 없었다면, 또는 "남들 앞에 우리 것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면 이들의 지적, 또는 음악적 경로는 지금과 또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기상이 다석을 들고, 또는 김수철이 국악을 들고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까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좋은 일일런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굳이 다석이나 국악 말고 이기상이 뛰어난 하이데거 해석자로, 그리고 김수철이 뛰어난 록 기타리스트로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의도를 오해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종종 그처럼 "남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계기로 인해 "우리 것"에 새삼 눈을 뜨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급조된 전통이나 급조된 "자랑거리"를 내세울 때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때로는 "초라한" 것을 초라한 그대로 내밀어보기보다는 오히려 "뭔가 있어 보이게" 과대포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만화영화 <로봇 태권 브이>가 복원되어 극장에 걸린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실제로 관객이 많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솔직히 이 뜬금없는 "복원" 소식을 듣고 좀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지금 갑자기 <태권 브이>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 그 만화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나는데, 그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걸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태권 브이>를 일종의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걸작"으로 치켜세우는 주장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태권"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일본 만화, 특히 <마징가 제트> 류의 거대 로봇물과 완전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개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만화의 직접적 영향하에서의 부분적인 개성일 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차라리 <태권 브이>를 전후해서 나온 또 하나의 "걸작" 애니메이션(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인 <호피와 차돌바위>와, 현재는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전편 <홍길동>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는 더욱 큰 의의를 지니지 않았나 생각한다.(이 두 편은, 역시 어려서 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윤석화에 의해 <돌아온 영웅 홍길동>인가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이 역시 원작들과는 달리 당시 국내에서 기세를 떨치던 일본만화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홍길동이 아니라 드래곤볼이더라"는 비아냥을 얻으며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안다.) 뭐,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와서 <로봇 태권 브이>에 열광하는 (열광하긴 하는지 모르겠지만) 풍조에는 이른바 애니메이션 산업이나 만화 산업이 일종의 미래형 고부가가치 콘텐츠 산업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일종의 "법통 만들기"나 "역사 만들기"의 의도가 은근히 엿보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굳이 한국 애니메이션, 또는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모든 계보 만들기가 그렇듯이 현재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권 브이>를 만들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웅으로 추앙되는 김청기 감독의 이후 작품 가운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노골적인 "베껴먹기"(대표적인 것이 <마크로스>에 나온 로봇-전투기가 <스페이스 간담 브이>란 제목으로 애니메이션 화 된 것을 들 수 있겠다)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계보 가운데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이왕 <태권 브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디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지켜볼 만 하겠다.

결국 다석이건 태권브이건, 굳이 "우리 것"으로 의미부여를 하려면 못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주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다. 이른바 "블록버스터"에 대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사실 초라하고 구차한 이야기일 수 있다.(이는 "느와르"와 "홍콩 느와르", 또는 "웨스턴"과 "마카로니 웨스턴"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뭔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기보다는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를 겉핥기 식으로 흉내내는 "한국형 물량공세"인 셈이니까.) 남들 앞에 뭔가 내세우기 위해 굳이 우리 것을 찾아야 할 때, 그리고 원래의 문맥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 나는 문득 예전에 24시간 편의점이 건물마다 들어서며 크게 유행할 때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저기서 24시간 내내 불을 밝혀 놓은 LG25시니, 패밀리마트니, 바이더웨이니 하는 편의점들이 문을 열자, 우리 동네의 어느 구멍가게도 이른바 "한국형 편의점 사이클론"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그 "한국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즉 그 "한국형 편의점"은 밤 12시가 되면 셔터를 내렸던 것이다. 내가 지금 다석과 태권브이를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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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진실과 거짓에 관한 우화 (1)
여자의 일생.단편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2
G.D.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1.

모파상의 단편 "노끈"은 고데르빌이라는 마을의 장터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장날이 되면 그 마을로 오가는 길 위에는 인근 마을에서 온 농부와 아낙들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중에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슈꼬르느 영감도 있었다.

  • 브레오떼의 오슈꼬르느 영감은 방금 고데르빌에 도착하였다. 그는 땅에서 작은 노끈 한 조각을 보자 광장 쪽으로 갔다. 진짜 노르망디 사람으로 검소한 오슈꼬르느 영감은 소용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주워 모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게 몸을 굽혔다. 류머티스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에서 가느다란 끈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막 정성스럽게 감으려고 할 때, 문지방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마구 제조인 말랑댕 영감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전에 말고삐에 대한 문제로 곤란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모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슈꼬르느 영감은 진창 속에서 노끈 토막을 주우려고 하는 것을 자기의 원수에게 들킨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얼른 그 찾아낸 물건을 작업복 밑에 숨겼다가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찾아내지 못한 그 무엇을 땅에서 아직도 찾는 듯한 시늉을 하다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고통으로 잔뜩 몸을 구부리고 시장 쪽으로 갔다. (351쪽)

땅에 떨어진 그까짓 노끈 한 조각,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 물건 때문에 이후에 자신이 어떤 곤란하고도 울화통 터지는 일을 겪게 될지 미처 알기만 했더라도, 오슈꼬르느 영감은 결코 그 노끈 조각을 주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점심 때가 되어 식사를 하던 영감은, 울브레끄 씨라는 사람이 현금 500프랑과 각종 서류가 든 지갑을 그날 아침에 분실해서 애타게 찾고 있다는 공고를 접하게 된다. 점심 식사가 끝났을 무렵, 지서 주임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면장 앞으로 간다. 면장은 마구상인 말랑댕이 "오슈꼬르느가 지갑을 줍는 것을 보았다. 그걸 줍고 나더니, 또 뭔가가 떨어져 있지 않나 싶어서 더 두리번거리더라"고 한 증언을 토대로, 오슈꼬르느 영감에게 지갑을 어떻게 했느냐고 신문한다. 오슈꼬르느 영감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채 "내가 주운 것은 노끈"이라고 항변하며, 자기 주머니에서 노끈을 꺼내 면장 앞에 흔들어 댄다. 그러나 면장은 "말랑댕 씨도 신용할 만한 사람인데, 그까짓 노끈을 지갑으로 착각할 리가 없다"며 영감을 몰아세운다.

영감은 두 번 세 번 아니라고 맹세하지만 면장은 끝내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말랑댕과 대질하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진술이 엇갈리는 바람에 결국 한 시간이나 서로 욕설을 퍼붓고 나서 아무런 결론도 내려지지 않는다. 면장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난처해서 영감을 풀어주고 만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이미 장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다음이었고, 영감이 면사무소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영감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결백을 호소한다. 사람들은 영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아무도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노인은 사람들의 미지근한 반응에 더욱 울화통이 치밀어 자기 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주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그가 흥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영감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진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다른 마을에 사는 어느 농부가 울브레끄 영감을 찾아와 그의 지갑과 현금을 어제 길에서 주웠다며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 소문 역시 금세 사람들 사이에 퍼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슈꼬르느 영감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또다시 사람들을 붙잡고 "그것 봐라, 왜 멀쩡한 사람을 거짓말장이로 모느냐?"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듯미지근하기만 했다.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이젠 더 이상 자신이 의심받을 이유가 없을 텐데, 어째서일까? 다음 번 장날에 고데르빌로 간 영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문득 자신에게 또 다른 "혐의"가 덧씌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사람들은 오슈꼬르느 영감이 지갑을 주운 것은 사실이며, 그저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자 당황한 나머지 "한패거리"인 다른 농부를 시켜 그 지갑을 갖다 바침으로써 그 혐의를 벗어나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감은 말문이 막힌다.

  • 그러자 그는 그 뜻밖의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매일 자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서, 매번 새 이유와 보다 강력한 항의, 그리고 그가 상상한 것보다, 그가 혼자 있는 시간에 준비했던 것보다 더 엄숙한 맹세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노끈의 이야기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의 변명이 보다 복잡해질수록, 그의 논증이 보다 치밀해질수록,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거짓말장이의 해명이지" 하고 그의 등 뒤에서 사람들이 쑤군거렸다. (356쪽)

노인은 홧병으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불과 몇 주 되지 않아 숨을 거둔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듯, "짧은 노끈이요...... 짧은 노끈...... 자, 여기 있어요, 면장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2.

나 역시 이와 비슷하게 종종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보기에 뭔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기 때문에, 처음 모파상의 단편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공감하는 동시에, 또 무척이나 불안을 품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될까? 오얏나무 밑을 지나면서 갓끈을 매거나, 외밭을 지나면서 신발끈을 매다 보면 정말 이렇게 빼도박도 못할 궁지에 몰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이제껏 살면서 그런 억울하고도 한심한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억울하다는 것은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또는 내가 의도하지도 않은 결과 때문에 내 행동이나 의도를 의심받곤 했기 때문이고, 한심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계기로 인해 그런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의도를 품지 않았다는 것,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 자신이야 분명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에게 이를 어떻게 전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백 번 천 번 아니라고 말해도 상대방은 곧이 듣지 않는다. 아니, 아니라고 하면 할 수록 더욱 "수상쩍게" 보이기 일쑤다. 그저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울화통이 터져 살 수가 없다. 차라리 대판 난리법석을 치고 삿대질 하며 언성을 높이는 게 정신건강에는 더 낫다. 그로 인해 더 큰 오해를 사고, 심지어 아직까지는 내 진실성을 약간이나마 믿어줄 의향이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까지도 진저리를 치며 떨어져나감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광분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 억울함을 어떻게 호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중에 사건이 백일하에 밝혀지더라도, 어느 누구 하나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오해한 것이라고 시인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미 "진실"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겪은 "사건"을 문제시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드러낸 "인격"을 문제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죽어가야 할까?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일 수도 있다.

집사람과 문득 그 "석궁 교수"(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이름보다도 먼저 생각나는 게 "석궁"이란 단어다. 본인은 질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 "레저용 기구" 또는 "살상까지도 가능한 흉기"의 이름이야말로 그의 평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징이자 꼬리표가 된 것은 아닐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 단편을 떠올렸다. 사건의 발단은 "수학문제 오류 여부"로서 그 교수의 주장이 "맞다"고 해야 하는데,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는 문제의 핵심은 젖혀놓은 채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법으로 심판하는 격이 되어 "잘못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뭔가 잘못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교육자로서의 자질 여부도 법으로 판단하는 격"이 되었던 그 재판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파이드로스가 이야기한 양과 질의 문제가 떠올랐다. 어떤 도덕성, 자질, 인격에 대한 시비를 법의 잣대로 판가름한다는 것 역시,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산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정식 절차를 밟는 재판에서는 이겼다 하더라도, 이른바 "여론 재판"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법적으로까지 들어갈 정도면 정말 빼도박도 못할 난처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법은 평범한 한 사람이 호소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며, 바꿔 말하자면 거기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냥 앉아서 죽는 수밖에는 없다는 거다. 게다가 법은 결코 공정하지가 않다. 남들은 그래도 특권층이네 뭐네 하는 교수 정도가 되어서도 결국 석궁을 들고 나서야 했을 정도니, 솔직히 이건 뭐,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 등등에서 그보다 못한 일반인이야 굳이 갖다댈 것이나 있겠나. 석궁 쏜 게 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무슨 영화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폭력"에 호소해서 클라이막스를 이끌어내는 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지 몰라도, 엔드 크레딧과 함께 끝나 버리는 영화와는 달리 현실은 클라이막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석궁을 쏜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또 새로운 고초와 오해와 억울함과 비난과 기타 등등이 다시 한 번 시작된다는 거다. 다만 역지사지 해보니 또 한 사람의 약자인 나 같았더라도 어쩌면 고스란히 앉아서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내가 읽은 모파상의 단편 "노끈"은 <여자의 일생 / 단편선>(이정림 옮김,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1, 범우사, 1990 4쇄)에 수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크기가 좀 뻥튀기되어 나오는 책이지만 특별히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 흠, 요즘은 이것저것 떠오르는 소설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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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두 가지 논쟁에 관하여...

 

 

 

 

 

"논쟁"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윌버포스 주교 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1860년) 이고, 또 하나는 F. C. 코플스턴 신부 대 버트런드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1948년) 이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할 겸,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서술한 책을 꺼내 보았다. 첫 번째 논쟁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이 공저한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김동광, 과학세대 옮김, 고려원)에 나오는 대목으로, 사실은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1930년대에 나온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한 대목을 시나리오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이 논쟁에서 유명한 클라이막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실제로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둥, 헉슬리의 말이 다르다는 둥)이 있지만, 일단은 여기 서술된 것처럼 그런 게 "있다"고 치겠다. 두 번째 논쟁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송은경 옮김, 사회평론)에 나온 것이다.

 

1. 첫 번째 논쟁 : 윌버포스 대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중에서

  • 이튿날, 커다란 홀의 문이 활짝 열린다.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대고 있는 회장에 한 사람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조지 앨리스)의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된다. 손가락을 옷깃에 넣은 채 그는 노골적으로 헉슬리(잠시 후면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도록 정해져 있는 그는 물론 그 자리에 있다)에게 얼굴을 향하고는, 일부러 꾸며낸 정중함을 가장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당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원숭이의 자손이라면, 그것이 당신의 할아버지 쪽을 통해서 이어져 온 것이오, 아니면 할머니 쪽 가계에서 온 것이오?"
  • 특히 "할아버지"라는 대목에서는 간살을 떠는 듯 이상한 비음을 섞어 발음했다. 그러자 청중들은 낮게 "오!" 하는 탄성을 질렀고,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은 헉슬리에게 모아졌다. 헉슬리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거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다행스럽게도 신이 윌버포스를 내게 인도해 주셨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으로 윌버포스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두 마리 원숭이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아무도 주교가 뭇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전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했다. 여성들은 실신하고, 남자들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챔버스는 그런 청중들 속에서 매우 유쾌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질랜드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막 영국으로 돌아왔던 전 해군 중장 로버트 피츠로이(로널드 레이건)이다. "다윈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는 벌써 30년 전에 비글 호 선상에서 그 본인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피츠로이는 성서를 꺼내 무기처럼 휘두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진리의 근원이오." 회장은 다시 숙연해졌다. (85-86쪽 : 인용문 가운데 일부는 문맥에 더 어울리게 약간 수정했다.)

 

2. 코플스턴 신부와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중에서

  • 코플스턴 : (...)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하겠죠. 그 본질과 실재는 동일함에 틀림없다. 만일 하느님의 본질과 하느님의 실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실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하느님 너머에서 찾아져야 하니까요.
  • 러셀 :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충분한 이유라는 문제로 돌려지는군요. 그렇다면 나는, 신부님이 "충분한 이유"란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해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충분한 이유를 어떤 의미로 쓰시죠? 원인이란 의미 아닌가요?
  • 코플스턴 : 반드시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원인도 충분한 이유의 일종이니까요. 오직 우연적인 존재만이 원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곧 그 자신의 충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자신의 원인은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충분한 이유"라고 할 때는, 어떤 특정 존재의 실재에 적절한 설명이란 뜻입니다.
  • 러셀 : 하지만 설명이 적절할 때가 언제지요? 예를 들어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고 해봅시다. 이것을 "내가 성냥곽에 성냥을 긋는다"고 하면 신부님은 적절한 설명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 코플스턴 : 글쎄요, 실제적 목적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부분적 설명에 불과합니다. 적절한 설명이란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설명이어야 하며, 따라서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어야 합니다.
  • 러셀 : 그렇다면 나로선 신부님이,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가지길 바라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 코플스턴 :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독단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 러셀 : 글쎄, 모르겠네요, 내 말은, 한 가지를 설명하는 일은 다른 것으로 하여금 또 다른 것에 의존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결국 신부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 딱한 사물 체계를 통째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긴데, 그건 우리로선 하기 힘든 일이란 거죠.
  • 코플스턴 : 그러니까 경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깁니까, 아니면 이 딱한 사물 체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전체의 실재 문제를 아예 제기하지도 말라는 겁니까?
  • 러셀 :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란 말은 문맥에 따라선 편리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의미를 가진 어떤 것을 대표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214-215쪽)

 

3.

난 솔직히 "논쟁"이란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다시한 번 확인하게 될 뿐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쪽이건, 지는 쪽이건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논쟁을 벌여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쉽게 승복하지 못할 것이고, 혹시나 궤변으로라도 이긴 사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적이지만 철저히 논리적이진 못하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승복하기보다는 그 궁지를 빠져나갈 또 다른 논리를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언젠가 유대교의 젊은 랍비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험삼아 그들을 논리적 모순의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그들이 이리저리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솜씨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을 표시한 적이 있다. 하긴 수천 년 동안이나 그렇게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의 감탄을 표시하는 것은 예의에 속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순수히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논쟁에는 백발백중 감정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감정을 겨냥하는 것은 비록 논리적이지는 않을 망정,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굳이 감정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논파된다는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다. 논리의 헛점이란 일종의 과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매사에 논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주장하고픈 것이 있으면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면 뭔가를 주장하거나 옹호하거나 함으로써 논쟁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외면하고 사는 게 낫다. 아무도 내 의견을 묻지 않고, 나 역시 아무에게도 내 의견을 표시하지 않으면 그보다 속 편한 일이 또 없다. 청맹과니처럼 살아가는 것인데, 진정으로 매사에 청맹과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는 앞에서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소개했다. 우리가 흔히 "논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모습은 사실상 (1)에 가깝다. 즉 클라이막스가 있고, 멋진 "한 방"이 있으며, 두고 두고 읊어댈 만한 "명언"이 등장하는 논쟁이다. 승부는 깨끗하게 갈리고, 비록 상대방이 승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둘 중에 어떤 쪽이 "이긴"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양상은 오히려 (2)에 가깝다. 클라이막스고 "한 방"이고 "명언"이고 승부고는 간 데 없고, 그냥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또 이에 대한 해명으로 소꼬리를 제시하는 식으로 끝도 없이 한도 없이 언쟁이 지속되지만, 실상 두 사람의 입장은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내가 논쟁을 싫어하는 이유랄까 하는 점은 아마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 내용에 고스란히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유명한 <철학사>를 쓴 사람들이지만 어째서인지 가장 근본적인 철학 문제(하느님, 도덕 등)에 대해서조차 합의가 쉽지 않다. 우선 두 사람의 입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똑같은 용어조차도 다른 뉘앙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결국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을 붙여놓고 논쟁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논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의 논쟁이 되진 못했다. 이야기는 맨 처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이 의미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의미 없다고 보는 입장 차이에서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무슨 시간 낭비인 것인가. 러셀이 이 토론의 내용을 굳이 자기 책에 수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본인으로서도 코플스턴의 문제 제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논쟁 내내 코플스턴은 무엇을 "인정"하자는 쪽인 반면, 러셀은 오히려 상대방이 쓴 단어의 "의미"를 걸고 넘어지는 쪽이다. 물론 그것은 논리를 강조하는 러셀의 철학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사실 정말 그가 논리적 명확성을 원했다면 그는 애시당초 이런 토론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은 지루하고도 짜증스럽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현실의 실제 논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참으로 읽기가 곤혹스럽다. 대 철학사가와 논리학자도 결국 논쟁에 있어서는 한 이불 속에서 벌어지는 부부싸움의 수준("그건 니 생각이지, 아니 니 생각이야, 아님 말아라, 너 잘났다")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그야말로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

물론 (1)의 논쟁과 달리 (2)의 논쟁은 단순히 각자의  "신념", 또는 "믿음"에 근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이른바 "사실"에 대한 문제에서도 이런 식의 어려움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념"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한 사람은 어떤 것을 "사실"이라 여기고, 또 한 사람을 같은 것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경우, 이는 단순히 정보의 유무보다도 "신념"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즉 사실을 직시하지 않거나 간과함으로써 일종의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과연 100퍼센트짜리 "사실"이 존재하느냐 하는 쪽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어떤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회의적인 태도는 논쟁 자체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물론 그 당장에는 유용한 방법이지 모르지만, 솔직히 나로선 인간이 영원히 회의적이진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뭔가 단단한 것을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처럼 부슬부슬 흩어지는 기반 위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무의미나 불가지로 돌리는 것은 단순히 논쟁의 전략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생의 지침으로는 그리 유용하지가 않다. 인간은 결국 뭔가 의미있는 것을 말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타협 밖에 없는데, 이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한 회피로 가능한 것이다. 논리적으로야 만족스러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일단 뭔가를 매듭짓긴 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젠가는 다시 끌러질, 어설픈 매듭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은 하기 싫어도 그래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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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대결에선 모두가 패자다!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폴 윌리스는 교육학 전공자들에게는 꽤 잘 알려진 학자이고, 국내에도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 문제나 교육 문제를 다룬 국제 심포지엄에 다녀간 적이 있다. 예전에 모 신문에서 인터뷰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책을 교재로 세미나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꽤 될 거라고 생각한다. 본래 원저는 "Learning to Labour"로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노동자로 학습하기" 또는 "노동계급으로 교육하기" 정도가 될 듯 하다. 원저명도 그렇지만 그것을 좀더 쉽게 풀어쓴 국내판 번역명이 책의 내용을 좀더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기는 한데 다소 미흡한 부분도 있다.

책의 내용은 소개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노동계급이 주로 다니는 해머타운의 공립학교 문제아 남자 아이 12명을 질적연구방법을 이용해 장기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관찰해본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국내에도 이런 연구방법과 주제를 응용해 진행된 연구가 상당수 있다. 예를 들어 김고연주의 "길을 묻는 아이들 - 원조교제와 청소녀(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92)" 같은 연구 역시 심층면접이란 방식을 이용해 진행된 것이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연구방식이란 점에 주목해서 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학교'라는 장소에서 어떻게 '계급재생산'이 일어나는지, 이른바 문제아들은 왜 문제아가 되는지를 미시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윌리스가 다루고 있는 연구 현장이 1970년대 중후반의 영국사회란 점에서 이것을 그대로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연구가 보여주는 통찰이 한국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갈등의 중요한 부분들이 계급고착화 현상,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한 계급상승의 길이 닫히고 있다는 점에서 초래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말이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제1부 문화기술지'에서는 문화기술지(ethnography)라는 낯선 연구방식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제2부에서는 이에 관한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교육선진국처럼 받아들여지는 영국의 교육체계가 공립과 사립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영국사회가 오랜 세월 굳어진 계급사회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평준화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최근까지도 치열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내 돈 가지고, 내 자식을 내가 원하는 대로 특수하고, 특별한, 좀더 수준높은 교육서비스를 받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아이를 한국이 아닌 교육선진국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영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비슷한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리는 일부 계급의 자녀들이 입학하는 사립학교가 있고,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지역에서 통학하며 다니는 공립학교가 있다.

영국 사회에서 계급격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고해서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대학에 노동계급 출신이 진학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막혀있지는 않지만 해마다 상류계급의 대학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계급 출신 학생이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국의 대학문화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미국 대학 중에서도 일년 학비가 3만 달러에 달하는 귀족학교로 명성이 높은 예일대는 높은 학비 못지 않게 학교내에 존재하는 비밀엘리트 집단인 "Skull and Bones"로 유명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부시나 케리 모두 이 클럽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노동계급의 자부심 또한 매우 강해서 그들만의 독특한 노동계급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어쨌든 폴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현장의 문제아들, 이른바 "싸나이들"이란 작은 그룹의 악동들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하고 관찰하여 계급재생산 구조를 분석한다. 어째서 이들 어린 "싸나이들"은 기존의 권위에 대해, 특히 교사에게 반항하고, 교사의 훈육을 따르는 순응적인 아이들을 못 살게 굴고, 거부하는 것일까? 왜 "싸나이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일가? 왜 "싸나이들"은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며 다른 인종의 아이들을 혐오하는 태도를 보일까? 이들이 주로 기존의 권위(교사)에 도전하는 방식은 한국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주로 개기고, 거짓말하고, 까불고, 익살을 떨며 그것을 즐긴다. 끼리 문화를 만들어 범생이들을 깔보고 괴롭히며, 그들을 폄하한다.
 
윌리스의 분석을 거칠게 인용해보자면 이것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노동현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들의 문화로 전유된 탓이라는 것이다. 가끔 미디어는 놀라운 모범생 신화를 만들어 내고, 널리 유포한다. 부모세대의 낮은 생활 수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입학한 입지전적인 청소년을 등장시켜서 그렇지 않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봐! 공부하니까, 되잖아. 넌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가난해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라고... 통계와 과학적 입증을 즐기는 기자들도 이때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지방보다는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 출신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의 서울 명문대 입학 비율이 높으며, 대한민국 사회의 계급재생산 구조가 완성단계에 이르러 이들을 통해 부의 세습과 계급 세습이 고착화되어 가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는 대신 평준화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이 지닌 다양한 자질이나 개성이 평준화되는 문제로 치부된다.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맹렬한 과외열풍, 논술열풍이 부는 이유는 계급상승의 막차라도 올라타고 싶은 부모 세대의 욕구가 상승기류를 타고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산층 부모의 맹렬한 욕구를 바라보면서 더 높은 상위계급에 속한 부모들은 이들의 다급한 추적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 그런데 교육정책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들만의 끼리문화를 만들어 낸 "싸나이들"은 학교와 교사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미래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싸나이들"은 산타클로즈를 믿지 않으며 교육이 신분상승을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을 만큼 영악하다. 그들은 세상의 이면을 속속들이 모두 깨우쳤다고 거만하게 웃으며 학교에 있는 동안 자신들의 즐거움과 약한 사냥감을 찾아 즐긴다. 이들이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앞으로 접하게 될 현장이 육체의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뒤처지는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실제 사회에서 여성 노동이 취급받는 현실을 보라)에 대해 우월감을 만끽한다.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은 이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들이다. 만약 학교가 학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이루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간파되었을 때, 교사는 무엇으로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조주은의 "현대가족 이야기(퍼슨웹)"는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의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현대공장의 가족 이야기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현대가족 사회의 독특한 문화는 영국 노동계급의 가족문화와 일견 흡사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남성의 사회노동을 여성의 가사노동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가볍게 바라보는 시각 등이 그렇다. 이와 같은 남성중심 노동사회의 신입구성원으로 편성될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싸나이들"은 미리부터 그와 같은 과정들을 학습하고, 그들의 문화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폴 윌리스는 이와 같은 "싸나이들"의 간파과정이 사실은 국가와 사회구조로부터 받는 이중의 교란이라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습득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윌리스의 통찰을 한국의 "싸나이들"에 빗대어 보면 한국의 싸나이들은 부모문화(한국사회에서는 남성중심의 지배문화)와 갈등하고 순응하면서 냉소적인 현실주의를 내면화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탓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힘에 대한 갈망과 순응 속에서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패배주의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라크 파병을 묵인하고, 비정규직 노동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이면서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했으므로 자신보다 더 약자에게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때로 그 자신이 강자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하는 것이다. 교육에 적응하는 것도, 교육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 체제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처럼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지 않는 한 그 앞에 선 우리들의 입장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폴 윌리스도 그런 우리들의 입장을 간파했는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로 마지막을 맺고 있다.

"Whistle down the wind or whistle in the dark"

* 폴 윌리스는 이후 해머타운 학교의 "싸나이들"과 범생이들의 삶의 행로를 지속적으로 살핀 모양이다. "싸나이들"이 평생동안 반항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 가운데 한 명은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아 이후 그 사회에 순응하게 되었고, 범생이 가운데 한 명은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아가 되었다고 전한다. 사실 이와 같은 계급재생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어쩌면 그 해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사회가 노동계급 젊은이들에게 베풀었던 대학교육의 혜택, 혹은 성인 교육이 어떤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영국 문화연구는 그 자체로 좋은 본보기이다. 영국 문화연구의 주요 연구자들이 노동계급 출신으로 전후 영국에서 행해진 성인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빈곤계층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은 인문학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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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를 다 읽고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8~18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10. The condition of Women

11. The Reproduction of Labor Power

12. Consumerism, Spectacle, and Leisure

13. Community and Class

14. Natural Relations

15. Science and Sentiment, Modernity and Tradition

16. Rhetoric and Representation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Part Three Coda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8. Abstract and Concrete Labor & 9. The Buying and Selling of Labor Power

우선 ‘Abstract Labor' ’Concrete Labor'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맑스가 상품과 가치라는 자본주의에 현상에 대해서 이론화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다.

상품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이므로, 어느 한 상품의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양적인 비율로 규정되는 '교환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상품은 사용가치임과 동시에 교환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교환가치는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항상 유동적이며, 하나의 상품은 그것이 교환되어 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어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다양한 교환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환되는 각 상품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해야 하며, 따라서 서로 동등하게 교환되는 모든 상품을 표현하는 상품이 있게 마련이다. 즉 교환가치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의 현상형태이다. 동일한 양이라는 이 공통요소는 그 상품들의 이질성 때문에 해당 상품의 물리적 및 자연적 속성과 화합될 수 없다. 교환과정에서는 동질적인 것이 표현되며, 모든 상품이 갖는 유일한 공통적 속성은 상품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환과정은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형태의 모든 노동을 동질화 시킨다. 상품을 생산하는 동질적 노동을 추상적 노동이라 부른다. 이 때 가치는 추상적 노동의 구체화 또는 물질화로 규정되고, 가치의 현상형태는 상품의 교환가치이다. 그러므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로 된다.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가치>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

즉 ‘구체적 노동’은 말 그래도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인 반면, 추상적 노동은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 노동 (모든 총 노동자들의 구체적 노동을 추상화 시킨 형태)이다.

당시 노동자는 4가지 계층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직업에 관련된 모든 국면에 통달한(대개 도제기간을 통해) 수공업 노동자, 세밀하게 분화된 노동 범주 내에서 전문화된 과제에만 국한된 기술을 지닌 숙련 노동자, 대개 떠돌이 막벌이꾼이며 “위험한 계급”이라든가 “룸펜 프롤레타리아” 등의 다양한 이름 아래 빈곤한 범죄적 계급으로 분류되는 비숙련 노동자, 글을 읽을 줄 알 고 숫자를 아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그것이다. (253 참고)

부르주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제외하고 (그들은 소부르주아지로 점차 변모되어 갔고) 모든 노동자들이지만, 각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르다. 우선 노동자 계급에서는 ‘맏이’뻘 (중세적이라는 의미에서, 또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에서)인 수공업 노동자는 말그대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장인’과 비슷한 존재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일정기간의 숙련을 통해 대체하기 힘든 노동력으로, 근대화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지만 때문에 불만도 많고 목소리도 크다.

수공업 노동자들은 모범성과 정치적 지도력을 무기로 이론의 여지없이 1840년대의 파리 노동시장을 주도하는 존재였으며, 1848년 노동자 운동의 핵심이었다. 자본의 연합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그들이었다. (253)

둘째인 숙련 노동자는 비숙련 노동자보다는 ‘숙련’되었지만 수공업처럼 완전히 자신이 한 분야를 장악하고 그 일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에 의해서 조그만 부분에 숙련된 노동자이다. 이들은 근대화와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자본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바라기 마련이고, 그러면 언제나 대체가능한 비숙련 노동으로도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 (요즘 ‘신자유주의’도 매한가지. 다만 이제 그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왔던 고용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를 붕괴하려고 투쟁하는 것) 그리고 분업은 생산성의 향상과 함께, 모든 노동을 간단하게 만들어 숙련의 정도가 낮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임금은 낮아질 수 있었다. ‘수요-공급’에 의해. 또 소생산자와 장인들은 대량 시장의 형성과 신용 재정에 있어서 대규모 산업에 의해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 산업과 상업의 관계에서 상업이 산업을 진두지휘하는 형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실제로는 개인과 소기업과 외주 노동자와 삯일꾼들이 고도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에 통합되는, 점점 더 복잡하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많은 소기업들은 보다 큰 조직 형태의 하도급 단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가-생산자나 원격조종 상인들에게 매여 있는, 도제적 노동 시스템에서 활동하는 존재였다. (233)

제2제정에서는 생산과 판매의 격리가 점점 커지며 권력 관계가 점진적으로 뒤집혀 파리 산업의 많은 부분이 점점 더 상업의 지시에 복종하는 꼭두각시의 처지가 된 것이 특징이었다. (...) 전형적으로 하도급 조직망, 즉 주문 생산이나 삯일에 의한, 혹은 외주에 의한 생산 조직망의 축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자율성이 점점 강해진 상인 계급은 직공과 수공업 노동자를 상인 자본의 지배 아래 포섭하는 공식적인 중개자가 되었다. (238)

소생산자들은 한때 자부심 있고 독립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이었지만 점점 더 빚과 의무, 특정한 지시와 통제된 공급의 그물 속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발전해나갈지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체 생산 시스템 속에서 세부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지위를 강요당했다. (241)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인’ -문화재 전수자와 모닝글로리 노동자를 비교해보라!

제2제정기에는 노동시장에 대한 수공업 노동자의 장악력이 점점 줄었다. 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탁월하게 묘사하는 과정인 기술의 재규정, 즉 생산과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노동의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이 기계와 공장제 생산으로 넘어가는 현상도 일어났다. 일부 산업에서는 수공업 기술이 배제되고 세분화된 분업 체제에서 요구되는 전문화된 기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저품질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의 탈기술화 경향과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쪽으로의 이동이 대세였다. 기술과 조직에서의 변화를 감안할 때, 기술 없는 이주민이나 여성을 작업장에 들여놓기가 쉬워질수록 기술자와 비기술자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려졌다. (.....) 1870년의 노동시장의 성격이 1848년의 것에 비해 경쟁적 개인주의가 훨씬 더 강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254)

결국 그 어떤 정치적 탄압보다도 그들의 힘을 잠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노동 과정의 변화였다. 추상적 노동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수공업 노동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 노동의 중요성이 감소했다. 하지만 새로운 노동 배치도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할 기회는 여전히 충분했다. 장인과 노동자 사이의 경계선이 대개 아주 엉성한 것인 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향 이동은 여전히 가능했다. 그들 자신의 노동 시스템이 가진 위계적 조직 역시 세밀하고 사회적인 노동 분업 내에서 감독이나 심장, 하도급자로 투입될 기회를 주었다. 기술과 교육, 적응능력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직종이 만들어질 때 그 분야를 장악하고 새로운 기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수공업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1871년 이후 노조사회주의의 기반이 되는 “노동 귀족”의 핵심이 되었다. (.....) 그것이 대표하는 이념은 수공업 전통에서 나오는 상호부조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산업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노동조합 의식으로 바뀌었다. (255-257)

여기서 우리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 책 진짜 많은데, 특히 민주노총 쪽에서 나온 책이 많은데, 읽지도 않고 무지를 들어내며 세미나때 나불대기만 했다. -_-; 공부하자! )

당시 노동자들은 ‘중앙집중적인 국가 통제보다는 생산조합이나 자율 관리, 혹은 상호부조의 형태를 기대했’고 ‘대부분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1848년에 노동을 재조직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개혁하여 앞으로 올 몇 십 년 동안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진보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사회주의 공화국의 창설’을 기대했다. (227)

산업의 동일 직종 또는 동일 분야에서 노동자들의 결합은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널리 퍼져있는 운동으로서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성장의 산물이다. 초기 노동조합은 보통 파괴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국가의 탄압도 빈번하였다(프랑스에서는 1884년까지, 독일에서는 1890년까지 불법이었다). 법의 방치 상태는 폭동적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결합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 영국 노동쟁의의 급진주의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했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상황》의 한 장을 "노동운동"에 할애했으며 (주로 랭카셔 목화공장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고 또한 석탄광부들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해서 논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을 영국의 조합 투쟁에 대한 열정적 평가로 끝맺었다. 그리고 점점 더 확대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져오는 지역적 결합에 대한 견해는 《공산당 선언》에서 반복되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은 중요한 세 가지 논의를 전개 시켰다. 첫째,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즉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나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에 대항하는 방어책으로서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조합은(푸루동이나 뒤에 라살레가 주장한 것처럼)경제적으로 비효과적이지 않다. 즉 조합은 고용주들이 노동력의 가격을 그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낮추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은 그 수준 위로 임금을 올릴 수 없고, 그들의 방어력 조차 자본의 집중과 순환되는 경제위기에 의해서 마멸된다(마르크스, 《임금노동과 자본》). 셋째, 그러므로 방어적 경제활동의 제한된 효력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은 더욱 더 폭넓은 계급적 기반 위에 점증적으로 조직되며,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고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계급투쟁에 종사하게 된다(인용된 영국의 예들은 목화 노동자들의 10시간 노동 운동, 인민헌장 운동, 그리고 1845년의 전국노동조합연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외의 노동조합 경험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확대시켰다. 즉 "전쟁의 학교로서 조합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엥겔스, 앞에서 인용한 책).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운동은 곧 붕괴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신 왕래에서 자신들의 환멸을 토로하였다. 즉 조합은 노동자귀족의 보호처가 되었으며, 조합지도자들은 시민계급 정치가들에 의해서 타락했으며 전체 노동자계급은 식민지 착취의 열매로 매수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날에서 영국의 주요 조합지도자들과 협력하였는 데, 그들의 참여가 제1인터내셔날의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에서, 그리고 다음해 제네바 회의를 위한 결의안 초고에서 조합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확대하도록 촉구하였다. 비록 그러한 측면에서의 기대는 곧 실망스런 결과로 나타났으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행하지 않고 있는 고타강령을 비판하면서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 1875년 3월 18일-28일)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계급적 조직"이었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었다.

1850년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험과 저작에는, 합법적이면서 안전한 제도로서의 조합관과 보다 더 급진적 잠재력과 그 실천이라는 전망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긴장은 결코 체계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본론》은 노동조합에 관해서는 매우 부분적 언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록 노동시간을 제한하려는 정치투쟁이 다소 자세하게 거론되고는 있지만).

나중에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관점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특히 전미노동조합연맹(AFL)과 관련되어 있지만, 또 영국 조합주의의 성격이기도 한,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는 알게 모르게, 그리고 명백하게 조합의 목적과 방법의 골격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수용한다. 그것은 1890년대에 유럽에서 형성된 가톨릭 노동조합에도 적용된다. 무정부주의적인 생디칼리즘적 노동조합주의는 매우 혁명적이었으며, 투쟁적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조합을 자본주의 전복을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토대라고 보았다(→생디칼리즘). 실제로 점점 개량주의로 빠져들어간 제2인터내셔날의 지배적 입장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은 서로 보완적이지만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곳에서는 전국적 조합이 사회-민주적 지도 아래 생겼으며, 20세기로 접어든 뒤 그들은 대부분 자율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보았다. 즉 관료적 관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조합은 고용이라는 좁은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식"이라는 레닌의 개념은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양자는 조합 안에서 혁명적 전략을 위해서 싸우며, 경제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타파하고, 사회민주당이 이 조정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파업). (다중생활도서관 노동자의 책 <맑스주의사상사전>의 <노동조합> 항목 중에서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17&keyword=노동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망은 파리에서 노동계급을 없애려고 일자리를 줄이려는 정책(산업을 교외로)을 쓰면서 노동자들의 정치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또 토지 가격과 임대료 때문에 도심에서 견딜 수 있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산업들이 모두 교외로 이동했다. 도심에 남아있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3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고, 그들의 임금은 최저 생계비 아래였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나타난 당시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함이나, <전태일 평전>에서 나타난 70년대 남한 노동계급의 비참함! 당시 ‘숙련노동자’였던 제단공 전태일이 비숙련 ‘시다’들이 딱해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물론 맑스 시대에 공장주들이 ‘공장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나 70년대 ‘근로기준법’이 유명무실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맑스 시대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을 우려한 정부에서 공장법 관리들을 파견하고, 노동자 계급 생활상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부각된 반면, 우리는 ‘전태일’의 분신에 의해서야 이러한 악조건이 환기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파리에서는 삯일로 유지되는 직업이 있는데, 그 일을 20년간 하다보면 노동자는 불구가 되고 탈진해 버린다. 다행히 그때까지 목숨이 부지된다면 말이다.(234))

70년대 남한의 ‘도시화’과 농촌의 억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듯이,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노동예비군은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 이주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1850년대 농촌의 불황에 원인이 있다. 또 그 불황은 부분적으로는 농촌 산업을 와해시키고 지역의 자족성을 무너뜨리며 프랑스 농업의 근대화 속도를 늦춘 공간관계의 변화 때문에 유발되었다. (261)

17. The Geopolitics of Urban Transformation & 18. The Building of the Basilica of Sacre-Coeur

결국 결론-결말에 가서 이 책의 집필(구성) 의도가 드러난다.(또는 독자는 결론-결말을 통해 이 책의 주된 집필-구성 의도를 추론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서론에서 이 책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파리의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1848혁명으로 인한 제2제정(오스망)의 개혁 시도와 결국 이의 좌절로 인한 파리 코뮌의 발발까지의 역사적 행보이다. 그 와중에 하비의 특장이라면 ‘지정학적’인 관심과 문화-상징적 기술물들에 대한 관심으로 미시사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을 통해 동시대 프랑스의 혁명적 성과들에 대해 논평을 하며 운동을 끌어간 것과 같은 배치.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

각기 2월 혁명 직후, 제2제정이 시작되는 때, 그리고 마침내 파리 꼬뮌을 다루고 있는 이 세 역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17과 18장은 17장이 앞선 2부의 결론과 같은 형태로 ‘요약’이라면 18장은 이제 이 책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임무를 띠는 ‘파리 꼬뮌’에로의 초대이다. 지금까지 하비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설명을 한 것들이 모두, ‘파리 꼬뮌’이라는 역사의 결절점으로 모여든다.

1860년대에 파리에서 전개되어 코뮌을 예고한 투쟁은 영웅적이라 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동체와 계급 개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계급 연대와 적대감의 진정한 기반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들의 요구를 강제하고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물리적 공간을 찾아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그것은 파리의 정치와 문화뿐 아니라 파리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지정학적 투쟁이었다. (422)

잘 나가던, 자본의 흐름에 최대한 따라가던 오스망과 제국은, 자본과 서서히 그 연결이 부식되어 갔다. ‘정부’주도식 파리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둘 다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들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생한 파리 꼬뮌은 중앙집중론자와 탈집중론자들로 분열되고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로 일관성이 결여되고 내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패퇴하던 프랑스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대규모 봉기로 이어지자, 부르주아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와중에 시민에게 발포하려던 프랑스의 군대 장군에게 거부하던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시민은 그 장군을 총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꼬뮌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 티에르는 파리에서 군대와 정부 요원들을 완전히 철수시키며 파리의 침공과 탈환을 준비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를 진압하는데 필요한 프랑스 군대의 재조직을 허락하고,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 주위에 주둔시킨다. 그들은 파리 코뮌과 프랑스 군대의 자국민 학살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파리 시민들은 철수된 행정 기관을 모두 접수하고 빠르게 이를 다시 운영하며 3월 26일 선거를 치르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부르주아들은 당혹해 했고, 상당수가 파리를 ‘탈출’했다. 파리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2만에서 3만 명 사이의 코뮌 가담자들이 그 과정에서 죽고 또 처형당했다. (역사는 끊임없이 차이와 함께 반복된다. 이는 인식 주체의 한계 때문에 '반복‘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들의 공통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프랑스 꼬뮌으로부터 100년후, 1980년 광주 ’꼬뮌‘. 마찬가지로 부르주아들은 침묵했고 광주를 ’탈출‘했다. 파리 꼬뮌에 대한 연구는 은연중에 프랑스 학계에서 배척당하고, 파리 꼬뮌을 연구주제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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