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진실과 거짓에 관한 우화 (1)
여자의 일생.단편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2
G.D.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1.

모파상의 단편 "노끈"은 고데르빌이라는 마을의 장터 풍경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장날이 되면 그 마을로 오가는 길 위에는 인근 마을에서 온 농부와 아낙들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중에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슈꼬르느 영감도 있었다.

  • 브레오떼의 오슈꼬르느 영감은 방금 고데르빌에 도착하였다. 그는 땅에서 작은 노끈 한 조각을 보자 광장 쪽으로 갔다. 진짜 노르망디 사람으로 검소한 오슈꼬르느 영감은 소용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주워 모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게 몸을 굽혔다. 류머티스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땅에서 가느다란 끈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막 정성스럽게 감으려고 할 때, 문지방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마구 제조인 말랑댕 영감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전에 말고삐에 대한 문제로 곤란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모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슈꼬르느 영감은 진창 속에서 노끈 토막을 주우려고 하는 것을 자기의 원수에게 들킨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얼른 그 찾아낸 물건을 작업복 밑에 숨겼다가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찾아내지 못한 그 무엇을 땅에서 아직도 찾는 듯한 시늉을 하다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고통으로 잔뜩 몸을 구부리고 시장 쪽으로 갔다. (351쪽)

땅에 떨어진 그까짓 노끈 한 조각,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 물건 때문에 이후에 자신이 어떤 곤란하고도 울화통 터지는 일을 겪게 될지 미처 알기만 했더라도, 오슈꼬르느 영감은 결코 그 노끈 조각을 주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점심 때가 되어 식사를 하던 영감은, 울브레끄 씨라는 사람이 현금 500프랑과 각종 서류가 든 지갑을 그날 아침에 분실해서 애타게 찾고 있다는 공고를 접하게 된다. 점심 식사가 끝났을 무렵, 지서 주임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면장 앞으로 간다. 면장은 마구상인 말랑댕이 "오슈꼬르느가 지갑을 줍는 것을 보았다. 그걸 줍고 나더니, 또 뭔가가 떨어져 있지 않나 싶어서 더 두리번거리더라"고 한 증언을 토대로, 오슈꼬르느 영감에게 지갑을 어떻게 했느냐고 신문한다. 오슈꼬르느 영감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채 "내가 주운 것은 노끈"이라고 항변하며, 자기 주머니에서 노끈을 꺼내 면장 앞에 흔들어 댄다. 그러나 면장은 "말랑댕 씨도 신용할 만한 사람인데, 그까짓 노끈을 지갑으로 착각할 리가 없다"며 영감을 몰아세운다.

영감은 두 번 세 번 아니라고 맹세하지만 면장은 끝내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말랑댕과 대질하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진술이 엇갈리는 바람에 결국 한 시간이나 서로 욕설을 퍼붓고 나서 아무런 결론도 내려지지 않는다. 면장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난처해서 영감을 풀어주고 만다. 그러나 이 소문은 이미 장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다음이었고, 영감이 면사무소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영감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결백을 호소한다. 사람들은 영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아무도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노인은 사람들의 미지근한 반응에 더욱 울화통이 치밀어 자기 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주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그가 흥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영감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진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다른 마을에 사는 어느 농부가 울브레끄 영감을 찾아와 그의 지갑과 현금을 어제 길에서 주웠다며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 소문 역시 금세 사람들 사이에 퍼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슈꼬르느 영감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또다시 사람들을 붙잡고 "그것 봐라, 왜 멀쩡한 사람을 거짓말장이로 모느냐?"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듯미지근하기만 했다.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이젠 더 이상 자신이 의심받을 이유가 없을 텐데, 어째서일까? 다음 번 장날에 고데르빌로 간 영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도중에 문득 자신에게 또 다른 "혐의"가 덧씌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사람들은 오슈꼬르느 영감이 지갑을 주운 것은 사실이며, 그저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자 당황한 나머지 "한패거리"인 다른 농부를 시켜 그 지갑을 갖다 바침으로써 그 혐의를 벗어나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감은 말문이 막힌다.

  • 그러자 그는 그 뜻밖의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매일 자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서, 매번 새 이유와 보다 강력한 항의, 그리고 그가 상상한 것보다, 그가 혼자 있는 시간에 준비했던 것보다 더 엄숙한 맹세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노끈의 이야기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의 변명이 보다 복잡해질수록, 그의 논증이 보다 치밀해질수록,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저것이 바로 거짓말장이의 해명이지" 하고 그의 등 뒤에서 사람들이 쑤군거렸다. (356쪽)

노인은 홧병으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불과 몇 주 되지 않아 숨을 거둔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듯, "짧은 노끈이요...... 짧은 노끈...... 자, 여기 있어요, 면장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2.

나 역시 이와 비슷하게 종종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보기에 뭔가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기 때문에, 처음 모파상의 단편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공감하는 동시에, 또 무척이나 불안을 품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될까? 오얏나무 밑을 지나면서 갓끈을 매거나, 외밭을 지나면서 신발끈을 매다 보면 정말 이렇게 빼도박도 못할 궁지에 몰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이제껏 살면서 그런 억울하고도 한심한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억울하다는 것은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또는 내가 의도하지도 않은 결과 때문에 내 행동이나 의도를 의심받곤 했기 때문이고, 한심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계기로 인해 그런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의도를 품지 않았다는 것,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 자신이야 분명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에게 이를 어떻게 전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백 번 천 번 아니라고 말해도 상대방은 곧이 듣지 않는다. 아니, 아니라고 하면 할 수록 더욱 "수상쩍게" 보이기 일쑤다. 그저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울화통이 터져 살 수가 없다. 차라리 대판 난리법석을 치고 삿대질 하며 언성을 높이는 게 정신건강에는 더 낫다. 그로 인해 더 큰 오해를 사고, 심지어 아직까지는 내 진실성을 약간이나마 믿어줄 의향이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까지도 진저리를 치며 떨어져나감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서 광분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 억울함을 어떻게 호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중에 사건이 백일하에 밝혀지더라도, 어느 누구 하나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오해한 것이라고 시인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미 "진실"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겪은 "사건"을 문제시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드러낸 "인격"을 문제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죽어가야 할까?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일 수도 있다.

집사람과 문득 그 "석궁 교수"(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이름보다도 먼저 생각나는 게 "석궁"이란 단어다. 본인은 질색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 "레저용 기구" 또는 "살상까지도 가능한 흉기"의 이름이야말로 그의 평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징이자 꼬리표가 된 것은 아닐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 단편을 떠올렸다. 사건의 발단은 "수학문제 오류 여부"로서 그 교수의 주장이 "맞다"고 해야 하는데,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는 문제의 핵심은 젖혀놓은 채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법으로 심판하는 격이 되어 "잘못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뭔가 잘못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교육자로서의 자질 여부도 법으로 판단하는 격"이 되었던 그 재판 절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파이드로스가 이야기한 양과 질의 문제가 떠올랐다. 어떤 도덕성, 자질, 인격에 대한 시비를 법의 잣대로 판가름한다는 것 역시,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산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정식 절차를 밟는 재판에서는 이겼다 하더라도, 이른바 "여론 재판"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법적으로까지 들어갈 정도면 정말 빼도박도 못할 난처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법은 평범한 한 사람이 호소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며, 바꿔 말하자면 거기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냥 앉아서 죽는 수밖에는 없다는 거다. 게다가 법은 결코 공정하지가 않다. 남들은 그래도 특권층이네 뭐네 하는 교수 정도가 되어서도 결국 석궁을 들고 나서야 했을 정도니, 솔직히 이건 뭐,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 등등에서 그보다 못한 일반인이야 굳이 갖다댈 것이나 있겠나. 석궁 쏜 게 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무슨 영화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폭력"에 호소해서 클라이막스를 이끌어내는 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지 몰라도, 엔드 크레딧과 함께 끝나 버리는 영화와는 달리 현실은 클라이막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석궁을 쏜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또 새로운 고초와 오해와 억울함과 비난과 기타 등등이 다시 한 번 시작된다는 거다. 다만 역지사지 해보니 또 한 사람의 약자인 나 같았더라도 어쩌면 고스란히 앉아서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내가 읽은 모파상의 단편 "노끈"은 <여자의 일생 / 단편선>(이정림 옮김,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1, 범우사, 1990 4쇄)에 수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크기가 좀 뻥튀기되어 나오는 책이지만 특별히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 흠, 요즘은 이것저것 떠오르는 소설도 많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