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두 가지 논쟁에 관하여...

 

 

 

 

 

"논쟁"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윌버포스 주교 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1860년) 이고, 또 하나는 F. C. 코플스턴 신부 대 버트런드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1948년) 이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할 겸,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서술한 책을 꺼내 보았다. 첫 번째 논쟁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이 공저한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김동광, 과학세대 옮김, 고려원)에 나오는 대목으로, 사실은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1930년대에 나온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한 대목을 시나리오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이 논쟁에서 유명한 클라이막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실제로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둥, 헉슬리의 말이 다르다는 둥)이 있지만, 일단은 여기 서술된 것처럼 그런 게 "있다"고 치겠다. 두 번째 논쟁은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송은경 옮김, 사회평론)에 나온 것이다.

 

1. 첫 번째 논쟁 : 윌버포스 대 헉슬리의 "진화론 논쟁" 중에서

  • 이튿날, 커다란 홀의 문이 활짝 열린다.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대고 있는 회장에 한 사람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조지 앨리스)의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된다. 손가락을 옷깃에 넣은 채 그는 노골적으로 헉슬리(잠시 후면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이도록 정해져 있는 그는 물론 그 자리에 있다)에게 얼굴을 향하고는, 일부러 꾸며낸 정중함을 가장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당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원숭이의 자손이라면, 그것이 당신의 할아버지 쪽을 통해서 이어져 온 것이오, 아니면 할머니 쪽 가계에서 온 것이오?"
  • 특히 "할아버지"라는 대목에서는 간살을 떠는 듯 이상한 비음을 섞어 발음했다. 그러자 청중들은 낮게 "오!" 하는 탄성을 질렀고,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은 헉슬리에게 모아졌다. 헉슬리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거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다행스럽게도 신이 윌버포스를 내게 인도해 주셨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으로 윌버포스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두 마리 원숭이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아무도 주교가 뭇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전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했다. 여성들은 실신하고, 남자들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챔버스는 그런 청중들 속에서 매우 유쾌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질랜드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막 영국으로 돌아왔던 전 해군 중장 로버트 피츠로이(로널드 레이건)이다. "다윈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는 벌써 30년 전에 비글 호 선상에서 그 본인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피츠로이는 성서를 꺼내 무기처럼 휘두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진리의 근원이오." 회장은 다시 숙연해졌다. (85-86쪽 : 인용문 가운데 일부는 문맥에 더 어울리게 약간 수정했다.)

 

2. 코플스턴 신부와 러셀의 "하느님의 존재 논쟁" 중에서

  • 코플스턴 : (...)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하겠죠. 그 본질과 실재는 동일함에 틀림없다. 만일 하느님의 본질과 하느님의 실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실재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하느님 너머에서 찾아져야 하니까요.
  • 러셀 : 그러니까 모든 게 이 충분한 이유라는 문제로 돌려지는군요. 그렇다면 나는, 신부님이 "충분한 이유"란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해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충분한 이유를 어떤 의미로 쓰시죠? 원인이란 의미 아닌가요?
  • 코플스턴 : 반드시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원인도 충분한 이유의 일종이니까요. 오직 우연적인 존재만이 원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곧 그 자신의 충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자신의 원인은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충분한 이유"라고 할 때는, 어떤 특정 존재의 실재에 적절한 설명이란 뜻입니다.
  • 러셀 : 하지만 설명이 적절할 때가 언제지요? 예를 들어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고 해봅시다. 이것을 "내가 성냥곽에 성냥을 긋는다"고 하면 신부님은 적절한 설명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 코플스턴 : 글쎄요, 실제적 목적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부분적 설명에 불과합니다. 적절한 설명이란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설명이어야 하며, 따라서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어야 합니다.
  • 러셀 : 그렇다면 나로선 신부님이, 가질 수도 없고, 따라서 가지길 바라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 코플스턴 :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독단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 러셀 : 글쎄, 모르겠네요, 내 말은, 한 가지를 설명하는 일은 다른 것으로 하여금 또 다른 것에 의존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일이기 때문에, 결국 신부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 딱한 사물 체계를 통째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긴데, 그건 우리로선 하기 힘든 일이란 거죠.
  • 코플스턴 : 그러니까 경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깁니까, 아니면 이 딱한 사물 체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전체의 실재 문제를 아예 제기하지도 말라는 겁니까?
  • 러셀 :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주'란 말은 문맥에 따라선 편리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의미를 가진 어떤 것을 대표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214-215쪽)

 

3.

난 솔직히 "논쟁"이란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다시한 번 확인하게 될 뿐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쪽이건, 지는 쪽이건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논쟁을 벌여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쉽게 승복하지 못할 것이고, 혹시나 궤변으로라도 이긴 사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적이지만 철저히 논리적이진 못하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승복하기보다는 그 궁지를 빠져나갈 또 다른 논리를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언젠가 유대교의 젊은 랍비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험삼아 그들을 논리적 모순의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그들이 이리저리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솜씨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을 표시한 적이 있다. 하긴 수천 년 동안이나 그렇게 치고 빠지고 비틀어서 달아나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의 감탄을 표시하는 것은 예의에 속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순수히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논쟁에는 백발백중 감정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감정을 겨냥하는 것은 비록 논리적이지는 않을 망정,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굳이 감정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논파된다는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다. 논리의 헛점이란 일종의 과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매사에 논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주장하고픈 것이 있으면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논리가 정연하지 못하면 뭔가를 주장하거나 옹호하거나 함으로써 논쟁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외면하고 사는 게 낫다. 아무도 내 의견을 묻지 않고, 나 역시 아무에게도 내 의견을 표시하지 않으면 그보다 속 편한 일이 또 없다. 청맹과니처럼 살아가는 것인데, 진정으로 매사에 청맹과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는 앞에서 두 가지 논쟁에 대해 소개했다. 우리가 흔히 "논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모습은 사실상 (1)에 가깝다. 즉 클라이막스가 있고, 멋진 "한 방"이 있으며, 두고 두고 읊어댈 만한 "명언"이 등장하는 논쟁이다. 승부는 깨끗하게 갈리고, 비록 상대방이 승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둘 중에 어떤 쪽이 "이긴"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양상은 오히려 (2)에 가깝다. 클라이막스고 "한 방"이고 "명언"이고 승부고는 간 데 없고, 그냥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또 이에 대한 해명으로 소꼬리를 제시하는 식으로 끝도 없이 한도 없이 언쟁이 지속되지만, 실상 두 사람의 입장은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내가 논쟁을 싫어하는 이유랄까 하는 점은 아마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 내용에 고스란히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유명한 <철학사>를 쓴 사람들이지만 어째서인지 가장 근본적인 철학 문제(하느님, 도덕 등)에 대해서조차 합의가 쉽지 않다. 우선 두 사람의 입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똑같은 용어조차도 다른 뉘앙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결국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을 붙여놓고 논쟁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논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1)의 논쟁이 되진 못했다. 이야기는 맨 처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이 의미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해 또 한 사람은 의미 없다고 보는 입장 차이에서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무슨 시간 낭비인 것인가. 러셀이 이 토론의 내용을 굳이 자기 책에 수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본인으로서도 코플스턴의 문제 제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논쟁 내내 코플스턴은 무엇을 "인정"하자는 쪽인 반면, 러셀은 오히려 상대방이 쓴 단어의 "의미"를 걸고 넘어지는 쪽이다. 물론 그것은 논리를 강조하는 러셀의 철학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사실 정말 그가 논리적 명확성을 원했다면 그는 애시당초 이런 토론에 나오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코플스턴과 러셀의 논쟁은 지루하고도 짜증스럽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현실의 실제 논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참으로 읽기가 곤혹스럽다. 대 철학사가와 논리학자도 결국 논쟁에 있어서는 한 이불 속에서 벌어지는 부부싸움의 수준("그건 니 생각이지, 아니 니 생각이야, 아님 말아라, 너 잘났다")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그야말로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

물론 (1)의 논쟁과 달리 (2)의 논쟁은 단순히 각자의  "신념", 또는 "믿음"에 근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이른바 "사실"에 대한 문제에서도 이런 식의 어려움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념"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한 사람은 어떤 것을 "사실"이라 여기고, 또 한 사람을 같은 것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경우, 이는 단순히 정보의 유무보다도 "신념"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즉 사실을 직시하지 않거나 간과함으로써 일종의 취사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과연 100퍼센트짜리 "사실"이 존재하느냐 하는 쪽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어떤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회의적인 태도는 논쟁 자체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물론 그 당장에는 유용한 방법이지 모르지만, 솔직히 나로선 인간이 영원히 회의적이진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뭔가 단단한 것을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처럼 부슬부슬 흩어지는 기반 위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무의미나 불가지로 돌리는 것은 단순히 논쟁의 전략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생의 지침으로는 그리 유용하지가 않다. 인간은 결국 뭔가 의미있는 것을 말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타협 밖에 없는데, 이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한 회피로 가능한 것이다. 논리적으로야 만족스러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 일단 뭔가를 매듭짓긴 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젠가는 다시 끌러질, 어설픈 매듭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은 하기 싫어도 그래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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