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0) : 유영모와 태권브이

어쩌면 내가 다석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것은 그만큼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기대한 만큼은 물론이고 실망할 만큼도 숙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는데, 어쩌면 다석의 "진미"를 알기도 전에 내 관심사가 아예 그쪽에서 멀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와서 다석이면 어떻고 일석이면 어떻겠는가. 내게는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문득 책장에 있는 <다석 유영모 어록>을 꺼내 뒤적뒤적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나는 예수, 석가를 좋아하고 톨스토이, 간디를 좋아한다. 그런데 예수를 좋아하다 보니 예수의 이름에서 이러한 생각을 얻었다. 예수의 '예'는 여이가 합하여 예가 되었다. 예는 곧 여기다. '수'는 재주의 능력이다. 할 수 있느냐의 수가 바로 능력이나 재주를 말한다.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 예수다. 나의 매 손가락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재주와 능력이 있다. 위로부터 한량없이 내리는 수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는 그 힘이 지금도 자꾸자꾸 내린다. 한없는 능력이 이 손끝에 내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의 손은 하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이다. 이어이어 내려진 그 능력이 예수와 나를 이어지게 한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절대자에게 이어져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모양은 같다고 생각된다. (143쪽)

근데 솔직히 "예수"라는 이름을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라고 해석한 것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언어유희일지는 몰라도, 원래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결국 이는 다석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이요, 달리 말하자면 억측일 수밖에 없다. 나로선 이 대목을 접하는 순간, 이전부터 일종의 "다석 르네상스" 현상을 지켜보면서 품었던 의구심이 한층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지금이야 너도나도 "독창적인 우리말 사상가"니 "시대를 앞선 인물"로 추앙하는 다석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는 의구심이었다. 물론 다석이 특이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나 그와 같이 살다 간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독특하고 그의 인격이 고매했다고 해서, 그의 사상조차 대단한 것으로 한꺼번에 추켜세워지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이른바 "다석 르네상스"에는 다석이란 인물의 "삶"과 "사상"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신비화와, 또한 이른바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앞뒤가 전도된 열성이 없지 않음을 지적하고픈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나로선 다석이 과연 "보편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칸트나 헤겔" 급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느냐는 거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다석을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칸트나 헤겔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리고 굳이 칸트와 헤겔을 들먹인 것은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보편적인 사상가"의 대표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감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일 수 없었던 고충을 이해하시라.) 물론 한국인인 우리가 보기에 칸트와 헤겔의 사상이 "보편성"을 띠게 된 데에는 이른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두 사람의 사상이 어떤 "외적 요소"에 의해 그토록 각광받았던 것이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가? 철학사를 뒤져 보면 칸트와 헤겔 사이에도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그리고 중요하게 평가되었던 사상가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쩌면 칸트와 헤겔 역시 그런 숱한 사상가들 가운데 한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보편적 사상가"가 되었고, 나머지는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단순히 어떤 철학 "외적 요소", 그러니까 요즘 하는 말로 서구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라든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라든지, 또는 (헤겔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두 사람의 사상에 있어 어떤 "보편적 관심"을 일깨워주는 요소가 없었더라면, 이들의 사상 역시 일회적이고 당대적인 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소리"만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었고, 분명히 시대적이거나 개인적인 한계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상이 다른 시대, 또는 사상에 비해 뭔가 탁월한 면을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석은 어떨까? 다석은 흔히 종교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교와 불교의 배경 안에서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끌어안은" 인물로 묘사된다. 좋게 말하자면 "한국식 통합"이고, 노골적을 말하자면 결국 "짬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긴 모든 사상이 "짬뽕"이고 "잡탕"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석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떤 체계나 주저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물론 칸트와 헤겔의 시대 이후에 어떤 "거대 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은 바람직하기는커녕 도리어 무의미하고 "헛점만 만들어내는" 시도로 여겨진 감도 없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처럼 생전에 짧은 논문 하나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수많은 해석자들이 자처하고 나서면서까지 "무체계의 체계"를 수립해 주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즉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해몽은 해몽, 결코 "해몽"이 "꿈"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해석은 오독과 오해의 여지를 남기며, 그렇기 때문에 다석의 경우처럼 주저나 주장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사상가의 경우에는 "원문"을 대하기보다는 "해석"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해석자에 따라, 그리고 해석자의 의도에 따라 그 해석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다석의 생애에 대해, 그리고 다석의 사상에 대해 나온 책들(특히 다석의 수제자인 박영호의 저서)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석의 "탁월성"이 일종의 "비교우위"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다석의 위대함은 매번 "예수, 석가,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과 비교되어서만 드러날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는 내 오해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박영호의 논법이 "다석은 이런 말을 했는데, 이는 예수의 저런 말을 연상시킨다"거나 "다석은 이런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톨스토이의 저런 주장과 상통한다"는 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다석이 "예수나 톨스토이"를 숙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석이 그 두 사람에 필적할 만한 사상을 실제로 지녔는지 여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석이 지금처럼 "대중화" 되어버린 풍조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다. 생전에 김교신이 다석을 가리켜 "놀라운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펼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던 것이며, 다석 스스로가 김교신에게 "내 생각은 워낙 비정통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은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운을 띄웠던 것 역시, 다석에 관한 "신화"를 한층 두텁게 만들어주기는 할지 몰라도 오늘날 다석에 대한 갖가지 오해나 오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여겨져선 안 될 것이다. 또한 다석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사상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유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우리것으로 만들었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런지는 몰라도, 그의 "신학"(물론 이런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면)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것이었고, 차라리 일종의 신비주의자나 영성가로라면 몰라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칸트나 헤겔의 "보편적 사상"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물론 칸트나 헤겔 역시 기독교에 관한 논저를 남기기도 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사상이 "보편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와는 좀 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다석"인가? 나는 혹시나 그것이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다석은 <다석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네 권(거의 한 권이 무슨 국어대사전 만한)짜리 개인기록을 남겼는데, 이 대부분은 다석 특유의 언어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선 도무지 읽어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 어쩌면 다석이 일종의 "숨은 광맥"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 난해함, 또는 접근의 어려움에도 일말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모르니까 신기한 것이고, 모르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고, 몰라서 아직 연구가 안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연구하면 뭐라도 나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석이 오늘날 각광받는 한국 사상가로 떠오른 것은 신학 전공자이고 하이데거 전공자인 철학교수 이기상이 토로한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 문제로 고민한 한국의 사상가는 없는가?" 하는 의문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감히 지식인이라 말하기 뻘줌한 나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걸었으니) 서양사상으로 시작해 동양사상, 그리고 결국 한국사상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인데, 이는 오늘날의 서구화된 교육제도나 문화, 또는 사회풍조 속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회의 동기에 대해서도 일종의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서양사상을 파고들어가다 보니 한계가 느껴지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우리 사상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모조리 "전향자"나 "지적 속물"로 몰아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 앞에서 '우리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해 하다가 결국 '우리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철학자 이기상의 것이건 가수 김수철의 것이건, 어딘가 구차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들의 눈이 없었다면, 또는 "남들 앞에 우리 것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면 이들의 지적, 또는 음악적 경로는 지금과 또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기상이 다석을 들고, 또는 김수철이 국악을 들고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까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좋은 일일런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굳이 다석이나 국악 말고 이기상이 뛰어난 하이데거 해석자로, 그리고 김수철이 뛰어난 록 기타리스트로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의도를 오해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종종 그처럼 "남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계기로 인해 "우리 것"에 새삼 눈을 뜨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급조된 전통이나 급조된 "자랑거리"를 내세울 때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때로는 "초라한" 것을 초라한 그대로 내밀어보기보다는 오히려 "뭔가 있어 보이게" 과대포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만화영화 <로봇 태권 브이>가 복원되어 극장에 걸린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실제로 관객이 많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솔직히 이 뜬금없는 "복원" 소식을 듣고 좀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지금 갑자기 <태권 브이>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 그 만화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나는데, 그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걸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태권 브이>를 일종의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걸작"으로 치켜세우는 주장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태권"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일본 만화, 특히 <마징가 제트> 류의 거대 로봇물과 완전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개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만화의 직접적 영향하에서의 부분적인 개성일 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차라리 <태권 브이>를 전후해서 나온 또 하나의 "걸작" 애니메이션(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인 <호피와 차돌바위>와, 현재는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전편 <홍길동>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는 더욱 큰 의의를 지니지 않았나 생각한다.(이 두 편은, 역시 어려서 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윤석화에 의해 <돌아온 영웅 홍길동>인가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이 역시 원작들과는 달리 당시 국내에서 기세를 떨치던 일본만화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홍길동이 아니라 드래곤볼이더라"는 비아냥을 얻으며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안다.) 뭐,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와서 <로봇 태권 브이>에 열광하는 (열광하긴 하는지 모르겠지만) 풍조에는 이른바 애니메이션 산업이나 만화 산업이 일종의 미래형 고부가가치 콘텐츠 산업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일종의 "법통 만들기"나 "역사 만들기"의 의도가 은근히 엿보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굳이 한국 애니메이션, 또는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모든 계보 만들기가 그렇듯이 현재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권 브이>를 만들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웅으로 추앙되는 김청기 감독의 이후 작품 가운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노골적인 "베껴먹기"(대표적인 것이 <마크로스>에 나온 로봇-전투기가 <스페이스 간담 브이>란 제목으로 애니메이션 화 된 것을 들 수 있겠다)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계보 가운데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이왕 <태권 브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디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지켜볼 만 하겠다.

결국 다석이건 태권브이건, 굳이 "우리 것"으로 의미부여를 하려면 못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주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다. 이른바 "블록버스터"에 대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사실 초라하고 구차한 이야기일 수 있다.(이는 "느와르"와 "홍콩 느와르", 또는 "웨스턴"과 "마카로니 웨스턴"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뭔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기보다는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를 겉핥기 식으로 흉내내는 "한국형 물량공세"인 셈이니까.) 남들 앞에 뭔가 내세우기 위해 굳이 우리 것을 찾아야 할 때, 그리고 원래의 문맥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 나는 문득 예전에 24시간 편의점이 건물마다 들어서며 크게 유행할 때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저기서 24시간 내내 불을 밝혀 놓은 LG25시니, 패밀리마트니, 바이더웨이니 하는 편의점들이 문을 열자, 우리 동네의 어느 구멍가게도 이른바 "한국형 편의점 사이클론"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그 "한국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즉 그 "한국형 편의점"은 밤 12시가 되면 셔터를 내렸던 것이다. 내가 지금 다석과 태권브이를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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