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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의 그림자
La Sombra del Viento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Carlos Ruiz Zafon
1권
잊혀진 책들의 묘지
잿빛 나날들 1945~1947
별 볼일 없는 일 1950
대단한 인물 1951
그림자의 도시 1952~1954
2권
그림자의 도시 1952~1954
바람의 그림자 1955
사후 1955년 11월27일
3월의 강물 1956
등장인물 1966
-낭 독-
거의 반시간 동안을 나는 낡은 종이와 먼지 그리고 매혹의 냄새를 풍기는 그 미로 사이를 돌아다녔다. 나는 내손이 책을 고르며 밖으로 드러나 서적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세월에 의해 희미하게 지워진 제목들 사이에서 나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된 단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수십가지 언어로 된 단어들과 이해 할 수 없는 수십가지 언어들로 된 단어들을 흝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수백 수천권의 책들이 나선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회랑과 복도를 돌아다녔다. 잠시 후 그 책들 각권의 겉표지 뒤에는 탐험자를 기다리는 무한한 우주가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벽너머에서는 사람들이-눈에 보이는 쉽고 하찮은 것들에만 만족해서-오후에 축구를 하거나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삶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아마도 우연 또는 우연의 잘 차려입은 친척인 운명이었겠지만, 바로 그때 나는 내가 양자로 들일 책이 이미 선택되어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나를 입양할 책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그 책은 어느 책장 맨끝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포도주 빛 가죽으로 제본되어 높은 곳으로부터 원형 지붕으로 새어 나도는 빛에 반짝이는 금장 제목을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손가락 끝으로 그 제목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읽었다.
-잊혀지 책들의 묘지 중에서-
비밀의 가치는 그 비밀이 지켜져야만 하는 사람들의 가치에 달려 있다.
어릴적 꿈은 변덕스럽고 미덥지 못한 연인 같은 것이다.
- 잿빛 나날들 1945~1949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그 거짓말들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 같았다.
계획적으로 아버지께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나를 좀 힘들게 했고 오전 무렵에 아버지가 일이 있어 잠시 나갔을 때 그런걸 페르민에게 이야기했다.
"다니엘, 부자관계는 수천개의 작은 선의의 거짓말의 토대위에 존재하는 거야. 동방박사 세사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또 다른 많은 예들이 있지. 이건 그런 것들중의 하나야. 죄의식 갖지 말라구."
-그림자의 도시 1952~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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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는 1945년 새벽 11살 소년이었던 다니엘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기묘한 이름의 헌책방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1966년 새벽 다니엘이 10살 남짓한 아들의 손을 잡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향하면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지적인 추리물은 그 내용이 담고 있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큐브 같은 복잡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엉킨 실의 한쪽 끝은 잡고 나머지 한쪽 끝에 숨어 있는 해답을 찾아 나서는 매력이 있다.
솔직히, '장미의 이름' 만큼 지적이고 정교하고 문학적인 추리물을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만, '바람의 그림자' 는 '장미의 이름'에 이미 중독된 독서가들의 흥미를 끌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가 '바람의 그림자'에 매료된 배경에는 추리물 특유의 흥미로움도 있겠지만, '거의 반시간 동안...' 으로 시작하여 '... 제목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읽었다'로 끝을 맺는 우아하게 빚어낸 저 문장에 뻑이 갔기 때문이다.
종이냄새와 먼지입자가 아무렇게나 뒤엉킨 서점에서 이전엔 알지 못했으나 그날 내 눈과 마주침으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무명의 책... 아직 내게 읽히지 않음으로 무명의 책이라 이름 갖은 지식과의 설레이는 첫인사를 "입양"에 비유한 이 책을 덜컥, "입양"해 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빠져들게 했던 매력적인 인물....어떤 주제에서든 지지고, 볶고, 튀겨내어 맛나고 풍성하게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지닌 명랑스런 페르민아저씨.
주책스런 박식함과 허풍스럽지만 천박하지 않은 입담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인물이라고 해야하나....그런 친구가 한명쯤 옆에 있다면 꽤나 다이너믹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까?
내가 열흘간 머물렀던, 바르셀로나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던 기괴한 형태의 아우디 건축이 이 도시를 이루는 전부 같았다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이 거닐던 새벽의 람블라스 거리와 음습하지만 아름다웠던 고딕거리 뒷골목을 걸으며 어느덧, 내 기억도 더듬어 그곳을 따라 가고 있다. <아름다운황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