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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없는 건축 - 한국의 레거시 플레이스
황두진 지음 / 시티폴리오 / 2025년 9월
평점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1. 건축에게도 은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은 건축물이 쓸모가 다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건축은 무엇인가? 저자는 레거시를 시대에서 뒤떨어진 부정적인 의미와 아름다운 유산이라는 긍정적인 의미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한다. 부모님이 데이트했던 장소에서 자식이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의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것. 30년이 지나도 원래의 용도와 형태를 유지한 공간을 레거시 플레이스라 할 수 있다. 원래의 용도가 폐기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는 카페나 박물관 같은 건축은 제외하여야 한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현역이다. 그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향유하는 동반자인 것이다.
2. 황두진 건축가는 베테랑이다. 20년을 넘게 한국과 해외를 넘나드며 활동한 전문가이다. 그런 그에게도 초년생에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는 김종성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힐튼 호텔 로비의 단면 모형을 보았던 일화를 회상한다. 힐튼 호텔이 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호텔 로비에 앉아 있을 때 한 호텔 직원이 다가와 "그동안 좋은 건물에서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감사를 표한다. 얼마나 낭만적인 장면이지 않은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건축은 기술을 넘어서 우리에게 인생과 감정을 만드는 존재다. 건축가 김종성은 지금도 이 건물의 가치에 대해 주장하며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3. 레거스 플레이스는 웅장하고 화려한 곳에만 부여하는 특권이 아니다. 저자는 지방 소도시의 중국집이나 항구, 산업시설과 같이 전국 각지의 일상적인 장소를 아우른다. 그곳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증언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개발 만능 사회에 살고 있지 않는가. 독일 건축박물관장은 한국에서는 영원을 위해 건물 짓지 않는다며 지적한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은 매우 근시안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레거시 플레이스가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 한번 만들어 놓은 건물을 오래 잘쓰는 것은 친환경과도 연계된다. 한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문제의식이지 않을까.
4. 이 책은 건축가의 강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직접 생각하고, 나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와 같았다. 건축에도 레거시 플레이스가 있다면, 이 책은 레거시 북이 되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 사회의 불변하는 단단한 원칙을 논하고자 한다. 일단 기승전결이 없어 아무 데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54가지 사례는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있다. 그래서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원하는 건축물부터 시작할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소는 현재 존재한다. 레거시 플레이스를 직접 방문하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장소의 주인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단순히 관찰자가 아닌 도시 정책의 결정자로써 상상해본다. 우리가 평생을 살며 함께하는 장소, 그들의 미래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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