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 일본 사상 -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
사사키 아쓰시 지음, 송태욱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사사키 아쓰시, 『현대일본사상』,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10.
1.
이 책은 일본에서도 2009년에 출간된 번역서치고는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1980년대 아사다 아키라로부터 대표되는 이른바 '뉴아카데미즘'부터 2000년대 후반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지도』까지를 '현대일본사상'이라는 규정에 묶어내 그 변천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논술 교재로도 활용되는 푸코나 롤스, 그리고 최근 사람으로는 마이클 센델같은 유럽이나 영미권 사상가들에 비하면 일본의 사상, 특히 현대일본사상이 상대적으로 낯설기도 하고 관심이 덜 동하는 주제임은 사실이다. 하물며 현대일본사상'사'라니?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과 『도주론』같은 책과 아즈마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특히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에는 80년대 이후의 주저들이 띄엄띄엄 번역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 거의 다 번역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 이렇게 번역된 저서들이 젊은 대학원생들의 학위 논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아직 스테디나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출간만 되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1,500은 넘기고 서평도 2~3개는 꾸준히 올라오는 것을 볼 때 한국 인문학계에서 현대일본사상은 꼭 그리 낯선 주제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한국 인문학 시장에서 현대일본사상에 대한 수요는 이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물론 본서에서 보여주듯이 오늘날 이 둘의 경계는 모호하다) 증대하고 있는 추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진 않았지만 젊은 인문학 소비층이 현대일본사상을 어떻게든 소화 활용하려는 모습을 세미나나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상 자체의 수요 증대는 사상사에 대한 진지한 수요 증대를 수반할 수 밖에 없는데 개별 저자들의 개별 저술만을 읽는 것으로서는 해당 저술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어떤 공백에서 시작되는 순수한 정신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사상은 언제나 배경을 가지는데 첫째, 그 이전에 있었던 사상에 대한 논평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둘째, 그 사상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셋째 그 조건과 관계맺는 자신, 그 안에서 사상이란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를 간과하면 독자는 유사한 부분들을 찾아 끼워맞춰보는 그림맞추기 수준 이상으로 개별 사상들을 묶어낼 수가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본서는 너무 일찍 도착한 손님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어를 할 줄 알고 현대일본사상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소수 이외에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이런 책이 필요했다고 생각할 만한 독자 풀이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출판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물론 서평자 자신도 후자에 속한다).
2.
그러나 모든 독서의 경험이 그러겠지만 특히 본서에서 독자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신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채우는 경험만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또 가장 강한 매력 가운데 한국 사상 시장과의 '동시대성'이다. 달력 위의 시간상으로만 봐도 본서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지금 여기'와 매우 가깝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시대적 조건이 지금 한국의, 특히 출판시장, 대안담론/비판담론 시장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테면 맛뵈기로 뉴아카데미즘 유행시 학생들의 상태를 회고적으로 묘사한 사사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비정치적이고 무슨 일에나 관심이 없는 세대라 불렸던 당시의 젊은이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향학열이라 부를 수 있는 에너지를 학생 운동이나 입시 전쟁에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비축하며 부풀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부끄럽지만,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지적 리비도가 향한 곳으로,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37쪽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성은 시공간적 근접성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그보다는 사사키의 '사상사'가 내용보다는 형식, 그것의 옳고 그름보다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서 행해졌던 방식을 기술한다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사키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일본의 사상>을 개괄한다고 하면서도 이 책에서는 개별적인 사상의 내실과 내용에 일일이 깊이 파고들어 각각의 변천을 논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 이유는 필자가 애초에 <일본의 사상>은 사상의 '내용' 자체보다 오로지 그 사상의 '행위'에 의해 성립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 그 사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고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쪽
혹자는 이런 사상사가 사상의 컨텐츠, 핵심을 외면하는 몰지성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상이 현실에 끼친 영향도로 따지자면 '담고 있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아니면 '담고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사사키는 "때로는 내용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는데도(또는 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조차도?) 어떤 유효한 퍼포먼스에 의해 그 사상이 효력을 발휘하는 일도 있습니다(19쪽)"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상이 '보이고 싶어하는' 주관적 모습이 아닌 실제 '보인' 객관적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상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이런 객관화는 모욕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사사키는 거침없이 솔직한 관점을 택한다. 그는 거친 말투를 쓰진 않지만 현대일본사상가는 끊임없는 구별짓기의 과정이었으며 이를 멀리서 보면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시소'에 불과했다고 굉장히 거친 논의를 펼친다(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그는 현대일본사상에 '성과'가 없다고까지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사상>의 역사를 '행위=퍼포먼스'의 응수로 그리려 하면 그 변천의 양상도 내용을 좇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상이 새롭게 등장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 이전의 사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적어도 타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19~20쪽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사상>의 변천을 더듬어 가는 것은 시소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역전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전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22쪽
이렇게 사상을 철저히 탈신비화해서 보려는 태도에 입각해 『구조와 힘』15만부 판매로 시작된 화려한 뉴아카데미즘의 성공 요인을 그 내적 논의의 정교함이나 위대성이 아닌 마치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해외 문헌이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해외 문헌을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독자의 흥미와 갈망을 더한층 자극하여 그들의 책이 단지 '소개'라는 기능 이상의 흡인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읽을 수 있다/아직 읽을 수 없다'는 이 미묘한 상태도 뉴아카데미즘 현상의 절묘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40쪽
"뉴아카데미즘의 전성기인 1984년 말에 (...) 『알고 싶은 당신을 위한 현대 사상 입문』이라는 무크지가 간행되었습니다. (...) 이 '알고 싶은 당신'이야말로 뉴아카데미즘 현상이 산출한(또는 드러낸?) 새로운 독자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뉴아카데미즘의 퍼포먼스는 '알고 싶은 당신들'을 위해 이루어졌고 그것에 의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대량 생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92~3쪽
"여기에는 <일본의 사상>의 그 이후 흐름을 생각할 때 아주 시사적인, 어떤 중요한 동기 부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당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보다 될수록 빠르고 편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알 수 있게 되어) 그것에 대해 '말(할수 있는)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사다 아키라나 나카자와 신이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든, '작품=텍스트'를 '읽는' 행위(이것도 일종의 '노동'입니다)를 경시하는 뉴아카데미즘의 특징은 그들이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23쪽
헌데 이런 문제의식, 사상이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문제의식 내지는 위기의식은 사사키 자신의 고유한 관점만은 아닌 아사다나 가라타니같은 뉴아카데미즘의 논자들에 대해서 작든 크든 자각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사키는 고진의 「비평과 포스트모던」같은 논문이나 『탐구』이후 '타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작업을 이런 맥락에서 높게 평가한다. 또한 아사다 역시 그러한 반성을 수행했다는 것을 1987년 12월 『겐다이시소』 임시증간호에 실린 「어린이의 자본주의와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 - 하나의 요정 이야기」라는 강연기록문에서 찾는다.
"[아사다는] <1980년대 일본>에 나타난 '포스트모던'은 사실 1930년대의 전전 '포스트모던'과 비슷한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아사다는 그런 비전을 '관념론적 도착의 극치'로 단정하고 마치 자신이 제기한 논의를 내팽개치듯 강연을 끝내 버립니다.
아사다는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히 자조적으로 "이 비전이 자괴에 이르는 것처럼 저는 감히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를 계속해 왔다"고 말한 뒤 "이 도착을 철저히 해체하고 그 안에서부터 현실적인 분석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발언은 이 강연에서의 논지에 대한 것이겠지만, 뉴아카데미즘의 스타인 아사다 아키라의 '행위' 전반에 대한 자기반성의 변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86쪽
회고담이긴 하지만 아사다와 함께 뉴아카데미즘을 주도한 나카자와 신이치에 따르면 이런 불안과 반성, 자각은 뉴아데미즘의 시작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사키는 그런 사후적 회고가 진실이든 말든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뉴아카데미즘에 대해서 가차없는 평가를 아끼지 않으며 이를 재밌게도 가라타니의 메인 테마이기도 했던 '아는 자'와 '행하는 자' 논의를 활용해 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해도, 그들은 계속 '뉴아카데미즘'이라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 춤은 밝고 경쾌하고 멋있었고, 무엇보다 무척 즐거운 것이어서 옆에서 보기에는 그런 의심이나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춤'이 확실한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쇼와'가 끝나고 '1980년대'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39~40쪽
어찌보면 이런 비평을 사상의 주논지를 무시한 '탈맥락화' 내지는 '트집잡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사키의 비판에는 치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사상을 다룰 때에도 사사키는 판매 데이타나 '몰이해한' 독자들만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라(그런데 이들을 근거로만 내세우면 과연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뒤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다시 답해볼 것이다.) 해당 사상가들이 딛고 서있으나 뚜렷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론적' 전제를 함께 제시한다. 이를테면 사사키는 아사다 아키라가 뉴아카데미즘 풍조와 이를 따랐던 사람들에 대해서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혹한 비판을 하는 대목을 두고 "<일본의 사상>의 '병적인 성격'" 중 하나를 본다.
" (...) 아사다 아키라는 여기에서도 철저하게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일 정도로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왜 사람들은 때로 그렇게 '바보'같고 '하찮은' 생각에 빠지는 것일까? 둘째, 도저히 그런 '바보'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일까?하는 물음입니다. (...) 굳이 말하자면 '지성'의 차원과는 별도로, 그래도 사람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옴진리교가 뜻밖에 가르쳐 준 것은 오히려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정리해 버리는 것은 간단합니다. 아사다 자신이 '지진아'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사실 그 자체가 현실을 회피한, 지적 엘리트주의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짐)" -215~6쪽, 강조는 인용자.
사사키는 여기서 아사다, 그리고 뉴아카데미즘을 규정해 오던 근본적인 '부도덕'을 본다. 그것은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초월적'이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멍청'하기도 한 타자를 용인할 수 없이 자신의 템포로만 세계를 재단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사사키가 보았을 때 90년대의 사상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80년대와의 차이가 가장 뚜렷히 드러난는 대목이 바로 천황제에 대한 태도와 옴진리교 사건에서였다.
"하지만 그[오쓰카 에이지]는 아사다 아키라와 같은 세대이기는 해도 '1980년대 뉴아카데미즘' 논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쓰카의 연구는 철학적인=이론적인 해독 코드를 '현실=현재'에 적용해 가는 '현대사상'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어디까지나 '현실=현재'를 향한 시선과 필드 워크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182쪽
"그러나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과 달리 세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천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일본의 사상> 사이에 가로놓인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요쿠'(좌익)와 '우요큐'(우익)의 차이가 아니라 '이념(ideal)'과 '리얼(현실=현재)'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1990년대의 세 사람은 현실로서는 어떻게든 천황이 존재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199~200쪽
"'바보 같고 하잖은 현실=세계'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1980년대의 사상과, 아니, 바로 그것을 논해야 한다는 1990년대의 사상,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옴진리교 사건'이었습니다." -216쪽
하지만 그렇다고 사사키가 뉴아카데미즘을 지워야 할 부끄러운 과거로 넘겨버리고 90년대 사상에 양 손을 들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우선 90년대 사상의 경우에는 철저히 가장 평면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에 근거하려고 했다는 점은 중요한 전회로 본다. 비록 서문에서 현대일본사상을 '시소'에 비유하긴 했으나 그는 이런 반성들과 그에 기초한 작업들을 나름의 '성과'로 보기는 하는 것 같다. 다만 세계에 내재적으로 접근해 변혁보다는 기술에 초점을 두다보니 비판을 포기하고 세계를 그냥 긍정하는 것으로 기울 위험이 90년대의 사상에 있었다.
뉴아카데미즘에 있어 그는 그 컨텐츠가 있던 없던 자기과시였던 말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건 사회적 사실이고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행이든 스노비즘이든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가 일정한 수의 '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 적군 사건' 이후 대략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93쪽)" 그리고 그 의미를 '도주'와 같은 시대적 과제나 전복 전략보다는 좀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찾는다. 즉 아사다라는 인물 자체도 시대를 속해 있는 인물로서 비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도주론』]이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론적인 틀을 거의 억지로 '대학론'에,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대학생(젊은이)으로서의 생활방식론'에 적용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차이화라는 용어는 단숨에 생활 방식의 모드로, 이른바 처세술로 변환합니다. (...) 마지막 문장에 아사다 아키라의 '대학생=젊은이' 에 대한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집필 당시 스물네 살의 젊은이였던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55쪽, 강조는 인용자
3.
사사키가 보기에 2000년대의 아이콘, 아즈마 히로키는 이런 <일본의 사상>의 특성에 대해, 그리고 이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아즈마는 데뷔 이후 뉴아카데미즘에 거리를 두는데 흔히들 그 단절점을 오타쿠 분석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찾는 것과 달리 사사키는 그의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적』의 말미에서 찾는다. 거기서 아즈마는 데리다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을까 묻다보니, 결국 자기가 궁금했던 것은 내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는 읽는 것일까이였으며, 이것이 하나의 "함정"이었다고 말한다. 사사키이 대목에서 아즈마를 80년대와 90년대가 주는 교훈을 가장 의식적으로 잘 섭취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언급적인 함정'이란, 뭔가에 대해 말하는(생각하는) 것이 어쩐 일인지 '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말하는) 것으로 반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여기서 아즈마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문학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더한층 '이 나'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즈마 히로키는 어떻게든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이지 않은 사고의 양상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나'가 품고 있는 '악순환'을 어떻게 뒤집을까, '자기 언급'이라는 '함정'에 어떻게 '타자'를 도입할까(...) 이를테면 '타자 언급성'을 어떻게 작동할까 하는 시도였습니다." -257~8쪽
이에 근거해 보았을 때, 데리다에서 오타쿠로 넘어간 아즈마의 행보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아즈마의 뉴아카데미즘과의 단절은 앞서 보았던 아사다의 다소 위선적으로도 느껴지는 자기반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99년 초에 열린 『비평공간』의 심포지엄에서의 아즈마와 아사다의 직접 대화에서 드러난다.
아즈마: 아사다 씨와 저의 의견이 다른 단 한 가지는, 아사다 씨는 좋은 텍스트가 어딘가에 있으면 누군가 읽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사다: 아니,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즈마: 읽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 보면 그저 사라진 것일 뿐입니다.
아사다: 사라져도 어쩔 수 없겠지요.
아즈마: 그건 일종의 니힐리즘인데, 글을 쓰고 싶은 저로서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
필자는 이 어긋남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병 통신'에 대한 위화감과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그 후 아즈마 히로키의 퍼포먼스를 구동시켜 가는 최대의 행동 원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61~2쪽
이렇듯 '읽히는 글'을 쓰고 싶고, 또 그래야만 사상이 의미가 있다는 아즈마의 아이디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하나는 콘텐츠, 내용, 콘스탄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저널리즘적 측면의 강화이다. 아즈마는 이제 데리다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오타쿠나 정보자유에 대해서 말한다. 사사키는 이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이 논고[「정보자유론」]에서 '뉴아카데미즘'적으로 '현대 사상'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타쿠'로서 '모에'만 말하는 것도 아니며 확실하게 사회나 공공성에 대해 자극적이고 유효한 말=사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280쪽
"이에 따라 그는 '이념=이론'에서 '현실'로, 아카데미즘에서 저널리즘으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이행이 아닙니다. 1980년대의 요소도 적당히 유지하면서 1990년대에 다리를 놓고 중심을 이동한 것입니다. (...) 오히려 아즈마는 그 사고의 발판을 커다란 '거대 서사'에서 작은 '거대 서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철학이나 문학이라 불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상'에서 좀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강한 관심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사회학도 심리학도 이를테면 '거기에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학문입니다.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데이터 수집과 그 해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희구하는 철학이나 문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공학이나 법학에 대한 관심도...)" -285쪽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스타일, 행위, 퍼포머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아즈마는 현대일본사상가들 중 거의 최초로 자신이 사상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려고 한다. "(...) 단지 콘스탄티브하게 뛰어난 '텍스트=작품=사상'을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퍼포머티브한 '효과'를 짜 넣으면서, 그러나 콘스탄티브이기도 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퍼포먼스'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비평가 양성 프로그램 '아즈마 히로키의 제로아카 도장'이다. 이 이벤트에서는 거기에 참가한 비평가 예비군들이 차례로 몇 개의 관문에 의해 걸러지고 최종 관문을 돌파한 사람은 단행본으로 초판 1만 부를 내며 데뷔를 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비평가 예비군들은 리얼리티쇼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만든 비평 동인지를 들고 서점에 나가 제한시간 내에 더 많은 부수를 파는 쪽이 우승하게 된다.
사사키는 이런 아즈마와 2000년 <일본의 사상>의 전개를 마냥 긍정하지만은 않는다. 우선 콘텐츠의 측면에 있어서는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스타일의 측면과 얽혀 다음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때때로 후자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공공성' 개념이 이를테면 '사상'을 하기 위한 구실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진실로 리얼한, 필사적이 되어야 할 '문제'로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누구의 머리가 가장 좋은가 하는 경쟁'의 게임보드로서 일단 '공공성'이라는 규칙"이 내세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90쪽
스타일의 측면에서는 그것은 자본주의나 승자독식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사키는 다음과 같이 현대일본사상의 흐름을 정리한다.
"198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비판적(부정적)'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관여적(보류가 붙은 긍정)'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수용적(긍정적)'입니다. 2000년대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개변)'하려고도, 세계를 '기술(설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 세계를 '감수'하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285쪽
나는 이를 '사상과 세계와의 관계설정'을 기준으로 80년대=초월적, 90년대=긴장을 띤 내재적, 2000년대=긴장을 잃어가는듯한 내재적 식으로 정리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사키는 이런 2000년대 사상의 특색이 그저 안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극약처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사상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현실 안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재설정된 게임 보드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쨌든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는 것, 둘째는 어떤 구체적인 성공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 확실히 거기에는 고이즈미 정권하에서 양성된 '이기는 쪽/지는 쪽'이라는 나쁜 이항 대립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사상'은 그에 대항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같은 도식에 감히 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놀이가 되어 벌비니다. 2000년대의 사상이라는 게임은 이제 '유희'일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든 진지한 '경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일부러 '사상'같은 걸 하려 하겠습니까?" -292쪽
"다만 한가지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만, 저는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게임 보드를 '재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일본의 사상'의 생존과 연명을 깊이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92쪽
4.
급마무리하자면 사상 역시 다른 인간의 이런저런 활동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과정이며, 또 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본서는 보다 보편적인 질문 "사상이란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었고 현실과 어떤 관계(해석? 변혁? 비판? 규범? 상품?)를 맺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이를 현대일본사상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사사키를 이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아마 사사키 자신 역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전개했다기보다는 이들 대답으로부터 배운 관점을 역으로 적용해 본 것일 게다. 아마 우리도 비슷한 것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특히 나같은 잉문학도가 생각해 볼 지점이 널려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