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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ㅣ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8
김민하 지음 / 텍스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김민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텍스트, 2009.
나는 이 책을 꽤 오래 전, 그러니까 출간된 2009년 11월부터 대강 알고 있었는데 이는 저자나 출판사의 인지도가 아닌 정치평론가 한윤형의 강력한 추천을 통해서였다. 그 무렵 나는 소문으로만 알던 한윤형의 블로그에 일부러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가 '이 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추켜 부르고 있던 김민하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마침 만인보 시리즈 중 한윤형의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를 읽고, 무려 세미나까지 한지라("우편함이 없는 세대에게 보내는 선배의 편지 한 통", [링크]) 김민하와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키워전투일지』의 서평에 썼듯이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느꼈기에 '이름을 가진 자'들, 취업과 잉여질이 아닌 방식으로 세상에 접속한 이들의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맥락에서 지인들에게 한윤형의 책을 권하며 김민하의 책 역시 함께 권하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개인적 이유로 인해 계속 미루다가 1년하고도 조금이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야 이 책을 사보게 되었다. 책의 첫인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좋지 않았다. 책값이나 분량 사이즈에서 이 책은 소극적인 대중성을 가지지만, 책 제목에서 매우 적극적인 비상업성을 가진다. '레닌'과 '오타쿠'. 만인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 중에 현대소비사회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처지를 늘어놓는 오타쿠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그냥 혁명가로서의 레닌도 아니고 그 오타쿠가 사랑한 레닌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표지에 그려진 두툼한 살집에 적당히 우울한 캐리커쳐는 애써서 짜낸 구매 및 독서욕구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 쓰인 텍스트들은 이런 선입견들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다소 염려했던 '하악하악' '모에모에' '투쟁투쟁' 같은 환청이 들릴 일은 없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욕망은 배려할 줄도 심지어 이해할 줄도 모르는 귀머거리(적지 않은 누군가들에게 '운동권'과 '오타쿠'는 이런 캐릭터의 전형이다)가 아니라, 남들 다 하는 거 다 하고 살았던, 단지 그것들을 너무 열심히 했을 뿐인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삶이 기록된 매 페이지에서 나는 내 삶의 일정 부분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도스게임, 일본 애니메이션, 피아노, 클래식 음악, 락 음악, 단말기 PC 통신, 교환일기, 자기 홈페이지 만들기, PC 통신 동호회, 고등학교 때의 학내 저항(?), 일렉 기타, 자의든 타의든 아마추어리즘을 모토로 삼는 대학 내 소규모 스쿨밴드, 키보드워리어질 등등... 오늘날 2~30대 남성들이라면 김민하만큼 빡쎄게는 아니어도 다들 조금씩은 건드려 봤을 그런 일상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자는 부분부분마다같은 동네, 같은 반, 같은 과의 누군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중 몇몇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이고 이 이후 이어지는 진보정당활동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활동들 역시도 그 활동에 참여한 동기나 의미를 사후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거기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전개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그리 빡빡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마치 옛날에는 잘 알다가 오랜만에 만나 서로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나누게 된 형 술자리 얘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는 이를테면 낯선 호칭에 어색해하는 덤프 '노조' 아저씨들 이야기(142~4쪽)나 허술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력서나 질의응답이 있긴 있는 민노당 강남구위원회 면접 장면들(154쪽)같은 경우가 그랬다. 노조든 진보정당 사무실이든 들릴 일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도 피식 웃을 수 있을 그런 내용의 그런 말투의 서술.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대충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찬 것은 아니다. 김민하는 불친절(?)하게도 다소 전문적이고 누군가들에게는 재미없을 주제들을 꺼내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 여러 계파들에 대한 정리라든가 그 자세하고도 깔끔한 맥락 설명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었던 이들로서는 '이런가 보구나'하고 들을 수밖에 없는 이념적 전망과 제시들. 이런 점들을 보았을 때 결국 김민하는 굉장히 제한된 독자들, 아마도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이미 자신의 이름을 들어봤을 사람들만을 독자로 가정하고 쓴 것일까? 그런데 또 그렇게 말하기에 애매한 점이 이 책이 너무 '친절'하다는 것이다. 특히 주석에서 이런 친절한 면모가 뚜렷히 드러나는데 그는 허큘리스나 '동을 뜬다', 심의민주주의같은 특정한 분야 내부에서만 주로 쓰이는 용어들뿐만 아니라 '롤플레잉' '어드벤쳐' '뻘글' '키보드워리어'같은 인터넷을 할 줄 아는 남자 아니 여성들도 왠만해서는 모를 리가 없는 말들에도 주석을 달고 있다.
그렇다면 김민하는 어디서는 주변인들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어디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살아온 얘기를 이어가면 될 것이지 왜 후반부에 들어가 '키보드워리어'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희박한 진보정당 내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김민하가 그런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현재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이 다. 예상 독자 그룹이나 독자의 친절도를 기준으로 이 책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 책은 특정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정직함'으로 불러보고 싶다. 무엇이든 주어지면 끝까지 나간 그의 '오타쿠'적 행동들은 특정한 문화적 선호보다는 그때그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해내고자 한 모범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이 기묘한 평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이 지금까지 그린 궤적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하면 참으로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180쪽)
어쩌면 이런 소시민적 성실함과 진보정당 활동가라는 독특한 사회적 지위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을런지 모른다. 이 생각은 소시민과 진보적 성향 사이에 어떤 '깨우침' '영웅적인 도약'이 있어야 함을 가정하고 있다. 좌파는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김민하가 소시민으로서 자신의 딸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걱정하기 때문에 정치를 고민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역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게 된다. 진보는 그저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생활'의 결과이다. 다만 그 생활이라는 것이 하루하루가 아니라 몇 십년을 바라보고 너무 열심히 하려다 보니 남들과 조금 다른 위치에 도달했을 뿐이다.
살다보니 이리 되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도 없으니 다른 '사는 사람들' 심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잠재 독자는 한윤형을 비롯한 김민하의 지인들만도, 어떤 정치 서클도, 그냥 아무개도 아닌(혹은 그러하기도 한) 어떻게든 자기 할 일 해오고 이제는 책임질 가족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김민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에게 "살다보니 이리 되었다"는 말이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