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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미래
앤서니 기든스 지음, 신광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노동의 존재는 까마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물관에 가면 우리는 수렵 채집에 필요한 도구들을 통해 조상들의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수고로이 일을 하여 그 결실을 먹고 살도록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흔적들과 오늘날 사회모습 속에 나타나는 노동의 의미를 비교해 보면 오늘날의 노동의 의미가 과거보다 확장되었으나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단어를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움직여 수로고이 일을 한다는 것으로 정의 내렸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와 함께 노동의 모습은 상당히 변하였다. 근대화 이전까지는 자급자족 수단으로써의 노동이었다면 근대화 이후에는 무형재산의 한 형태가 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아서 번 돈으로 먹고 살게 된 것이다. 이후 소비시대가 열렸고, 산업경제,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를 지나 현재 세계화라는 급격한 변화 속에 노동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화는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심화된 세계 시장의 확대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장은 지식경제를 기저로 두고 있다. 지식 경제란 생각, 정보, 지식이 혁신과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경제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많은 노동력이 물질 생산이나 물건의 유통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디자인, 개발, 기술, 마케팅, 판매와 서비스에 종사하는 경제를 말한다. (현대사회학, 기든스, p.345 인용)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물질 생산과 유통에 많은 노동력이 사용됐었으나 오늘날의 지식경제에서는 그 모든 일들은 대부분 기계가 할 수 있다. 당연히 많은 전문 육체노동자가 실업자가 되거나 낮은 보수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또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에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생산양식이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전문지식을 갖춘 노동자(피고용자)가 소규모로 팀을 이루어 활동하게 하였으며 고정된 지위에서 정해진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여러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다기능을 갖추게 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기업을 이끌어가는 고용주가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특히 앞으로 많은 날을 일하며 살게 될 젊은 층에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세계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더욱더 빠른 속도로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생산해 낼 것이고 고용주들은 그때그때 필요한 인력을 고용할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노동과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 시대의 피고용자(노동자)는 대부분 언제 소득이 끊길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확충은 단순한 소득의 재분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대응하려면 국가차원에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정책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미래>에서 기든스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가 주목받는 이유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란 자본주의의 문제점인 시장실패와 사회주의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이 둘의 장점을 통합하여 세계화라는 거대한 변화에 대응한다는 정치 이념이다. 이 이념이 추구하는 바는 첫째, 연대적 • 포용적 사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둘째, 불평등을 제거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공적제도의 구축과 적극적 정부에 의한 발전된 복지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은 다음의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공의 이익을 최상으로 높이기 위해 국가와 NPO, 기업, 제 3섹터는 협력하여 공적제도를 더욱 강화한다. 둘째, 경제 흐름에 대응하는 재정원칙을 세우며 지나친 조세지출을 지양한다. 셋째, 복지국가의 구조개혁을 단행하여 복지 의존성을 약화시키고 시민 권리와 책임을 강화 한다. 넷째,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여 사회적 약자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 기술 등에 투자한다. 다섯 째, 개인의 안정을 위한 법과 질서를 확립한다. 여섯 째, 환경정책에 더 높은 관심을 가져서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본 도서 제 2장 p. 41~61)상당히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기든스의 이러한 주장은 영국이라는 현실 공간에서 실현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 주체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신)노동당이다.
현재 노동당(신노동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노동당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부가 주체가 되어 복지국가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정책의 방향은 가진 자들로부터 없는 자들에게 사회 자원을 재분배하고 공공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인 복지개념을 바탕으로 하였다. 또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시민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이때까지의 복지란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You can just receive benefits.’의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위의 정책 프로그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 노동당은 ‘일’을 중시한다.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혜택을 베풀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약자가 노동 시장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 기술 투자 등에 더 중점을 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혜택을 받는 권리 외에 시민의 책임을 강조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조건적인 복지혜택은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해이’를 발생시킬 확률을 높일 수 있으며, 복지 혜택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복지 형태를 생산적 복지 또는 일하기 위한 복지(welfare-to-work)라고 한다.
기존의 노동당이 제시한 복지국가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신노동당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이전의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이 1973년 오일쇼크와 IMF를 겪으면서 복지 긴축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복지국가의 역할을 제한하여 정부의 공공지출을 통제하고, 자유시장적 경제 원리를 도입하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상호의존성이 심화되는 시대에 비대한 정부와 경직된 노동 시장 구조로는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는 이유로 생각된다. 그리고 복지제공 주체를 확대하여 민간부분의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신노동당은 그 뿌리는 노동당 즉, 사회민주주의에 두고 있지만 보수당이 편 정책 방향도 어느 정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며 산다. 다시 말해 자신의 노동력을 재산 삼아 노동 시장에서 돈을 벌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활동하는 모든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만 그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노동 시장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근로 능력이 있음에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기술을 갖추지 못해서 또는 노동 시장에 접근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개인의 삶을 위해서도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도 노동 시장의 유연함과 포용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 시장은 보다 많이, 보다 높은 질의 생산을 이루기 위해 유연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 결과 생산력은 높아졌어도 고용과 해고의 주기가 빨라져서 실업률이 높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도 그에 필요한 교육과 기술 훈련이 부족하여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의 미래>를 통해 기든스가 제시한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이념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장 아니면 분배라는 양자택일 논리에서 벗어나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는 정책 개발 및 실행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보다 상호의존적이며 수많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의 길은 이 같은 변화들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향후 20~30년 동안 세계 정치에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