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말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 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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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작가는 왜 굳이 '문학일기'라는 타이들을 이 책에 붙인 것일까?  기존의 '일기'라는 명칭이 아닌 '문학일기', 분명 김도언 작가에게 왜 사나요? 라는 질문은 왜 소설을 쓰죠? 왜 문학을 하나요? 라는 질문과 동음이의어일 것이다. 미래부터 과거로 흐르는 그의 일기들은 삶과 문학이 따로 떨어진 지대가 아닌 교차되고 중첩된 특수한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특수한 영역이 바로 그의 '일상'이다. 특수하면서도 너무나 일상적인 그의 삶, 그가 전업작가이면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소설을 쓴다는 생활양식과 많이 닮아있다.   

특히 나의 시선을 끈 부분은 그의 지인들과의 만남에 관한 대목들이었다. 정말 일상적인 만남들이었지만 시인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 같아 나름 흥미진진했다. 그 시인들이 바로 내 옆에 있는 느낌이었달까?  아래층에 사는 시인과의 술자리, 그에 관한 묘사, 그리고 여러 인용된 시들과 그 시에 대한 작가의 느낌, 누군가의 가벼운 메모나, 일기를 읽는 듯이 재미가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그의 문학론, 그의 세계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하는지 말이다. 

현실인식이 없는 예술은, 뱀이 없는 용처럼 황당무계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상상계가 만들어낸 용이라는 동물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뱀이라는 누추한 현실의 동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 p111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끄러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물끄러미'바라볼 때, 그대가 입을 열고 꽃은 몽우릴 터뜨린다. '물끄러미' 내다볼 때, 기다리던 편지가 오고 지하철의 막차가 들어온다. -p80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가 처음 '시'를 썼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법 하다. 곳곳에 시적인 문장들이 많이 깔려 있어 나는 연필을 들고 밑줄을 치곤 했다.  

나는 내게 흘러들어오는 영감이나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묘사하는 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77 

이 문장은 많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런 고민은 누구나가 하는 고민이 아닌가 싶다. 산다는 것의 방식 또한 이런 논리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흡수되는 모든 상황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이 요구된다. 시나 소설 또한 감성적인 부분으로 치우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훈련이 필요할 듯 싶다. 그래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글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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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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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자크나 스탕달의 시대에 다른 작가들이 과연 없었겠느냐고. 그 시대에도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고. 다만 시간이 흘러 후세의 사람들에겐 발자크나 스탕달만 남아 있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오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저 또한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사라지는 소설가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비하도 아니고 현재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글을 쓰는 한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조건의 최전선에서 싸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죠" 

 표절로 시작하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이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병상에 누워 죽음의 막바지에 다다른 선생님은 삼십 년이 지난 반성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소설가는 오래된 숙제를 하듯 반성문을 써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작업이었지만 그 작업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변명으로 바뀌어진다.  더 우스운 사건은 마지막에야 드러난다. 소설가가 어린 시절 표절해 장원의 영광을 안았던 그 이야기의 작자마저 사실은 누군가의 글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축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성문을 요구하는 선생님은 예술가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똑똑한 작가는 남의 글을 훔치고 천재적인 작가는 훔쳐 온 남의 글을 '자기화'시킨다는 비슷한 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창작물은 '최초'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모방과 모방이 뒤엉키며 조금 더 나은 새로움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표절에 표절을 거듭하는 행태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이야기의 묘한 매력 때문에 이야기를 가져오게 되고 그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대어 아름다운 사건을 탄생시킨다. 그러다보니 그 이야기는 이제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문학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그런 체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남의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스스로 '정류장'의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가 사라진 뒤에 남겨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그 소녀와의 만남은 미술실로 이어지며 스스로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표절했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괴로워하며 절방에 들어가 선생님이 요구한 반성문을 작성하려고까지 한다. 성장의 켠켠마다 그는 그 진실의 무게를 짐으로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에 임박한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써오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는 과거의 사건들을 꺼내오며 반성문을 집필한다. 그것은 반성문을 가장한 소설이었고 한 생명을 위해 연재하는 단 하나의 소설이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반성문, 가치 있는 소설이 있을까? 

이것은 예술가가 느끼는 이편과 저편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이면서 스스로를 옹호하는 변명문이고 그 변명으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질지도 모를 것 같아 내리는 채찍이다. 그 기본 자세에 대한 묻는 소설이다. 

누구나 이런 표절의 유혹은 있다. 하지만 모방이라는 것에서 또한 창조는 나온다.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의 글을 쉽게 팔아먹는 '작가'는 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발자크나 스탕달이 될 수는 없지만 발자크나 스탕달 만큼의 자존심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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