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하다. "
라는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삶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편이다.
좋은 부모님, 다정한 연인, 좋은 직장, 부자가 되는 것 등가 원하는 것은 많지만,
대부분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화가 나기도 하고 우울해지는 경우도 있다.
삶이 내 편이 아니라고 불만을 터트리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랭클은 정반대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리에서,
오히려 삶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물었던 사람이다.
질문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무너지던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 무너짐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은 의미를 갈구하는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이라는 것을 부수적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를 상실한 인간은 프로이트의 쾌락이나 아들러의 권력과 같은
표피적인 대체물로 그 빈자리를 맹렬히 채우려 하지만 그 어떤 자극도 실존의 공백을 메워주지는 못한다.
'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
라는 문장은 프랭클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의 문장이
와전된 가짜 명언이다. 하지만 이 잘못된 인용구만큼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뼈저리게 증명해낸
선택의 자유라는 실존적 문제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문장도 드물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자극은 분명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 자극이 내 안에서 어떤 반응으로 번역되는가는
결국 나의 선택이 있다. 물론 모든 자극에 매번 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는 없다.
다만 결정적인 자극, 내 하루를 흔들고 내 관계를 흔들고 내 삶을 방향을 흔드는 자극 앞에서만큼은
그 사이의 공간을 의식해야만 한다. 반응을 통제할 내면의 공간을 넓혀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니 왠지 모르게 무척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