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 때마다 나는 빅터 프랭클을 읽었다 - 아무도 나를 구원할 수 없을 때, 스스로 구원이 되어라
빅터 프랭클 지음 / 닻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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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하다. "

라는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삶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편이다.

좋은 부모님, 다정한 연인, 좋은 직장, 부자가 되는 것 등가 원하는 것은 많지만,

대부분 채워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화가 나기도 하고 우울해지는 경우도 있다.

삶이 내 편이 아니라고 불만을 터트리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랭클은 정반대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리에서,

오히려 삶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물었던 사람이다.

질문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무너지던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바로 이 무너짐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은 의미를 갈구하는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의미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이라는 것을 부수적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의미를 상실한 인간은 프로이트의 쾌락이나 아들러의 권력과 같은

표피적인 대체물로 그 빈자리를 맹렬히 채우려 하지만 그 어떤 자극도 실존의 공백을 메워주지는 못한다.

'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

라는 문장은 프랭클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의 문장이

와전된 가짜 명언이다. 하지만 이 잘못된 인용구만큼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뼈저리게 증명해낸

선택의 자유라는 실존적 문제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문장도 드물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자극은 분명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 자극이 내 안에서 어떤 반응으로 번역되는가는

결국 나의 선택이 있다. 물론 모든 자극에 매번 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는 없다.

다만 결정적인 자극, 내 하루를 흔들고 내 관계를 흔들고 내 삶을 방향을 흔드는 자극 앞에서만큼은

그 사이의 공간을 의식해야만 한다. 반응을 통제할 내면의 공간을 넓혀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니 왠지 모르게 무척 부끄러워졌다.



부모 탓, 시대 탓, 운 탓, 상사 탓, 탓할 사람이 많을수록 스스로 짊어질 책임의 무게는 줄어든다.

그러나 그 무게가 줄어드는 만큼 실존의 크기도 함께 쪼그라든다는 무서운 진실을

사람들은 쉽게 외면한다. 태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환경을 부정하는 일 이 아니다.

환경은 분명히 존재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의 출발선은 당연히 다르다.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과 만성질환을 안고 사는 사람의 하루 또한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른 척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곧 나의 운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거짓이다.

같은 가난에서도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짓는다.

환경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태도가 사람의 시야를 만든다.

삶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아니라 삶이 지금 나에게 무엇이 요구하는지,

지금 나에게 어떤 응답을 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도 오늘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무한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유한한 삶을 산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도록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내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만약 내일 아침에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오늘 반드시 마쳤어야 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려 보며, 오늘을 낭비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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