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 가장 느린 것들이 가장 오래 빛난다
이유리 지음 / 청림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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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독학사 출신의 서울대 교수님이라고 하니,

평범한 진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편견일까,

아니면 우리나라가 여전히 학벌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짚어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시작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험해서 그 벽을 넘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틈틈이 독학사 시험을 준비해서 마침내 학위를 얻었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고엽제에 대한 국가 지원이 확대되면서

아버지 병원비와 대학 등록금이 면제되면서 경제적 부담이 한결 줄어들어

마음 놓고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늦은 나이에 생물학과에 진학해 대학과 대학원을 거친 교수님의 인생이

느리지만 천천히 자신의 계절을 기다리는 식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 임용을 준비하면서 혹독한 세상의 시선을 발견했다는 고백이 와닿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교의 서열을 따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학부를 나온 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능성을 재단하던 갑론을박 속에서,

독학사 출신은 아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에겐 전혀 부끄럽지 않은 학위이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움츠러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경계를 넘는 것보다 그 경계를 넘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막상 마음먹고 손을 뻗어보니, 생각보다 경계는 단단하지 않았고

실제의 벽은 자신 안의 벽, 그리고 사람들 인식 속의 벽이었음을 말이다.

용기를 내어 그 벽을 뚫고 교수가 되어 연구를 업으로 이어가면서

실패도 경험이라는 걸, 해보지도 않고 접는다면 결국 움츠러듦을 축적할 뿐이라는 걸,

움츠러들다 보면 절실하게 손을 뻗어야 할 때조차 뻗을 수 없게 된다는 걸 말이다.

식물다움의 정의를 뒤흔드는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카펜시스, 아그나타 등

식충 식물은 이름도 생김새도 기이하고 낯설다.

독립 생명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배반하고

뿌리로는 얻기 힘든 질소와 인, 칼륨 같은 필수 원소를 동물의 몸에서 직접 흡수한다.

식충 식물의 육식 행위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장과 번식을 가능하게 하는데,

500종의 식물들이 서로 다른 계통에서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진화한 결과이다.

식물계의 이단아처럼 보이는 이들의 육식성이 우연한 이탈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 변이이자 전략이라는 뜻이다.

이미 존재했던 가능성의 연장으로 유전체 분석 결과, 포식 기구로 활용되는

식충 식물의 잎이 식물 고유의 방어 기능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생경한 육식성이 사실은 식물성과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가까이에 내재해 있던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식물성과 육식성, 정통과 이단, 가능과 불가능.

이 모든 구분은 우리 인간이 그어놓은 선일 뿐,

생명의 진화가 그러하듯

삶 역시 뚜렷한 경계보다 스펙트럼에 가깝다는 말이 가슴 묵직이 스며들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할 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라는 말을 곧잘 들었다고 한다.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

안정된 길을 걷길 바라는 걱정과 따뜻한 마음도 함께 담겨 있었을지라도

송충이와 솔잎은 억울했을 것이다.

40만 종에 이르는 곤충의 80%가 단 한 과의 식물이나 그와 가까운 식물만을 섭식한다.

특정한 식물만 먹는 것은 식물과 곤충이 수억 년 동안 서로를 길들이며 맺어온

상호진화의 보편적인 결과이다. 보고된 천연물질의 80%가 식물에서 유래한다.

곤충이 소화효소를 무력화하고 세포막을 파괴하는 물질까지 만들어내는 긴 전투에서

대개의 곤충은 패배했고 극소수만이 특정 식물에 적응했다.

솔잎의 독성과 질긴 섬유를 이겨낸 송충이가 솔잎을 먹는 것은,

수억 년 동안 이어진 협력과 적응의 기록이다.

언뜻 하찮게 보여도 그 안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생존의 역사와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랜 적응 끝에 비로소 맺어진 솔잎과 송충이를 함부로 바라본

우리의 시선을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공생은 선의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자원을 배분하는 섬세한 협상,

균형을 지탱하는 끝없는 조정 속에서만 지속된다는 것 또한 인상 깊었다.

협력의 균형은 갈등을 피한다고 지켜지지 않고,

갈등을 감지하고 그때마다 마주하며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협력 뒤에는 호의가 아니라

역할과 책임 그리고 신뢰를 유지하려는 질서가 있음을

식물과 균류의 공생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협력은 의지만으로 이어지는 않으며, 끝없는 감지와 조율이 있어야만

오래간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

갈등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흡수해

새로운 관계로 전환해나갈 수 있는지 공존 가능한 방식을 모색해 봐야겠다.

식물은 겨울이 오면 성장을 멈춘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멈춤은 사실 생존을 위한 치밀한 준비 중이다.

잎을 떨구고 에너지를 줄기나 뿌리 속에 저장하며,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작동한다.

후퇴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해 멈춤이라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은 식물들을 보며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시대보다 반 박자 늦은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제대로 뿌리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어

너무 포근하고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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