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세계사에 남긴 발자국은 뚜렷하고도 복합적이다.
금은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는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파괴와 고통을 낳았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찬란함을 보여주지만,
그 금을 캐낸 누비아 노예들의 고통은 역사 속에 묻혀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진출은 금을 향한 욕망에서 출발했다.
골드 코스트로 불리게 된 지금의 가나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던 엔히크 왕자는
신세계 식민지들이 사탕수수 지배에 재배에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부족한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는데 아프리카에 마련한 발판이 잔혹한 해결책이 되었다.
검은 금(노예)이 기니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화물이 되면서 잔혹한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에 걸쳐 12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아메리카 대륙의 팔려갔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 전체가 이 대서양 노예무역에 가담했다.
검은 금이라는 냉혹한 표현이 암시하듯 금을 향한 욕망은 인간 자체를 상품으로 전략시켰고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수만 명의 원주민을 학살하고 환경을 파괴했다.
1844년 12만 명에 달하던 캘리포니아 원주민 인구는 1870년 3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포티나이너스(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 참여한 금 탐사자들) 12명 가운데 한 명은
금광 지대로 가는 도중, 체류 중, 귀환길에 목숨을 잃었다.
특히 골드러시 초기 10년 동안 백인 인구가 2000퍼센트 폭증하는 사이
원주민들은 질병과 폭력, 기아의 늪에 빠져 사라져 갔다.
미국 개척사에서 가장 명백한 제노사이드 사례라고 평가되고 있는 골드러시의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1886년 남아프리카 비트바테르스란트에서 거대 금강이 발견되면서
지금의 요하네스버그가 탄생하게 되었고, 수십 년에 걸친 참혹한 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금광을 둘러싼 영국인과 보어인의 전쟁에서 보어인 여성과 아이 25000명 이상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 후 금광 산업의 되살리려 유입된 64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 또한
하루 10시간 이상 지하에 어둠 속에 갇혀 학대와 공포를 견뎌야 했다.
금을 향한 인류의 갈망은 21 세기에도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페루와 파푸아뉴기니,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금 채굴로 인한
환경 파괴와 인권유린이 현재진행형이다.
풍부한 금광을 노린 다국적 기업들은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을 일삼는 무장단체와 결탁해
분쟁 광물이 유럽 제련소로 흘러가는 파이프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금의 역사가 탐욕과 파괴만으로 점철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평범한 강물이나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 평생을 바쳤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증류, 추출, 여과 기술이 현대 화학의 토대가 되었다.
1980년 화학자 글렌 시보그 연구팀이 비스무트를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면서
연금술사들의 오랜 꿈은 실현되었지만, 생산 비용이 채굴 비용을 훨씬 웃돌아
경제성이 없어서 실제로 사용되지 않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대 연금술사들이 지하에서 금을 찾은데 반해, 현대 과학자들은 금을 이용해
우주의 가장 깊은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다.
금은 우주탐사의 핵심 소재로 보이저 1,2호에는 금으로 코팅된 레코드판이 실렸고,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18개의 거울에는 금이 코팅되어 98 %의 적외선 반사 효율로
135년 전 우주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그는 습기와 부식에 강하고 연성이 뛰어나 첨단 기술 분야에서 높이 평가된다.
사진 현상용 토너, 우주장비와 우주비행사를 복사에너지로부터 보호하는 반사 코팅,
일부 촉매 변환기의 코팅제, 항공기 조종석 유리의 결빙을 방지하는 열전도체 등
금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