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함께한 사람들
강현규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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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역사가 스포라 영화를 보기 전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가슴이 묵직하니 눈물이 흘렀다.

엄흥도가 실존 인물임을 영화를 보고 처음 알게 되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일까 궁금했는데 마침 관련된 책이 출간되어 반가웠다.

왕의 시신을 수습하면 삼족이 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사람답게 보내는 도리를 택한 엄흥도,

단종을 기억하며 존엄을 붙들고 살아간 정순왕후를 모시고자 정업원으로 돌아온 궁녀 매화,

사약 사발을 건넨 손으로 쓰러지는 주군을 받쳐 들었던 환관 안신을 비롯해,

사육신의 이야기로 주군의 마지막 온기를 지켜려는 이들의 의리를 담고 있었다.

<세조실록>의 건조한 기록 위에서 시작해서 영월 일대에 전해오는 민초들의 전승과

시대를 건너온 이름 없는 이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책이라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문장으로 기록되지만 의리는 민초들의 기억으로 전승된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실록이 침묵한 자리에서 이 책은 말을 잇고 있다.

엄흥도가 강을 건넌 이유, 안신이 강가에서 유품을 품에 안고 기다린 밤,

금성대군이 가시 울타리 안에서도 놓지 않았던 것들.

이 장면들은 공식 기록에 없거나 단 한 줄로 처리된 것들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 행간을 민간전승과 역사적 정황 그리고 개연성을 근거로 복원했다고 한다.

사실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어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인물은 공식 기록인 실록에 이름 한 줄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생겼으니,

죽음의 마지막 온기를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지극한 의리와 정성이 잊히지 않길 바란다.

금기를 깨고 왕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엄홍도를 지켜보던 집안사람들이 울며 그를 만류하자,

그는 나직하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이라면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바다."

이 말에 가족들은 더 이상 엄흥도를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이 복위되면서 엄흥도가 파낸 언 땅이 장릉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왕릉이 된 이후

당대에 대역죄로 분류되던 행위는 240년 만에 국가가 공인하는 충절의 기록으로 바뀌었다.

실록의 기록에는 단 한 줄만이 남았다고 한다.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엄흥도가 영월을 떠난 뒤 그의 가족이 어디로 흩어졌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후손들이 신분을 숨긴 채 여러 골을 나누어 살았다는 전승이 영월 일대에 전해온다는데,

야반도주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평생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이들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흥도가 겨울에 차디찬 강물에서 건져 올린 것은 왕의 주검이었으나

강물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한 가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모든 걸 각오하고 강물로 기꺼이 들어갔다니 그의 선택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처연하고 울컥했다.

영화에서는 매화가 왕에 따라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남양주와 영월 그리고 동대문 밖 숭인동 일대에는 '매화 혹은 시녀 권 씨'라 불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600년 넘게 흐르고 있는데, 이름이 실명인지도 알 수는 없다고 한다.

매화가 절개와 인내를 상징하는 꽃 이름이라 후대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기리며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영화는 극적인 죽음을 입혔지만 실제 전해오는 이야기 속 매화는 죽음 대신 더 처연한 삶을 선택했다.

그녀는 정순왕후가 시장에 나갈 때마다 앞을 가로막는 무뢰배들을 호통쳐 물리쳤고,

모든 고된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매화의 헌신으로 고립된 정업원 안에서 왕비는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영화 속 비장한 마침표가 아니라 이름조차 불분명한 채

64년을 버텨낸 것이 그녀의 진짜 삶이었다.

죽음이라는 선언보다 끈질긴 삶의 의리가 무엇인지를 그녀는 몸소 증명했다.

매일 새벽 정업원 마당의 서리를 제일 먼저 밟으며 하루를 열었고,

시장 바닥에서 장꾼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왕비의 끼니를 확보했다고 한다.

찰나의 결기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고독한 노동이 매화에 의리였다.

단종은 매화에게 보랏빛 비단 주머니를 꺼내서 건네며

"이 안에는 한양의 전할 내 마음이 담겨 있으니 내가 혹여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너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 왕비의 남은 생을 지켜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단종이 자신의 죽음을 우려하기보다 홀로 남겨질 아내의 고독을 더 걱정한 그 마음을 헤아린

궁녀는 주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64년의 긴 세월을 버텨내었다.

단종이 건넨 보랏빛 비단 주머니를 품 속 가장 안쪽 옷감에 바느질해 고정해서 자결의 대열을 이탈하여

어렵게 한양으로 향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비난의 시선을 감수하며 정업원으로 가서

정순왕후 앞에 엎드려 주머니를 바쳤다.

훗날 사람들은 강물로 뛰어든 세 시녀를 충절을 표상으로 기렸지만, 매화를 향한 시선은 달랐다고 한다.

주인의 죽음 앞에서 살기를 택한 연인이라는 비난이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왕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기 위한 정업원에서의 삶은 유배지 청령포보다도 더 가혹했다.

신분이 박탈되고 감시가 일상이 된 정순왕후의 곁에서 스스로 노비의 역할을 자처했다.

왕비가 남편을 죽인 자의 쌀을 먹지 않겠다며 세조의 시혜를 거부했고,

매화는 그 선언을 현실로 뒷받침하기 위해 장터의 거친 노동을 시작했다.

시장 상인들이 역적의 집안이라며 외면했으니 그녀의 현실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역사의 뒷면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알게 되니,

영화를 볼 때보다 더 마음이 무겁고 짠한 것이 사람의 도리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단종과함께한사람들 #왕과사는남자실존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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