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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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사람을 돕고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인 인권을 다루는 일을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인권을 분리할 수 있다는 오해를 낳는 '인권 변호사'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서혜진 변호사는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젠더 폭력 피해자들,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건을 다수 맡아오며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공론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법률이 강압적 통제와 폭력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사례가 너무 많아 안타까웠고, 피해자의 모습에 대한 편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일생에 있어 너무나 큰 사건이다.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또한 피해 그 자체보다 더 힘든 일이다.

혼자가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과 사회의 국가 시스템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간신히 회복이 가능한데, 피해자를 정형화된 틀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피해자의 상처를 더 곪게 만든다.

합성된 음란물 유포는 성범죄로 취급되지 않아 가볍게 처벌됐됐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실제로 찍힌 사진이 유포된 게 아니라 합성된 게 얼마나 다행이냐는 위로를 하는 사회라니,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합성 사진 옆에 명예훼손성 또는 모욕성 글이 올라와

처벌 가능한 죄명이 생기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현실은

피해자를 고통 속에서 헤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합성 여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기술이 정교해지는 딥페이크 범죄에 대해

법이 진짜 피해에 한걸음 더 다가서서 반포의 목적이 없어도 편집, 합성뿐만 아니라

소지, 구입, 저장, 시청한 것 모두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어제 뭘 먹었는지 떠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매일 숨 쉬듯이 반복되고 지속된 피해는

하나하나 떠올리고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무척 어렵다.

피해자가 멍청해서도, 말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피해가 너무 오래, 너무 깊게,

너무 일상적으로 스며들어서 입증하기가 어렵다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친족 성폭력 범죄는 특히 피해자가 인생의 선택권을 갖기도 전에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범죄에 공소 시효가 있다니 정말 납득할 수가 없었다.

"시간의 경과로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약화되고, 피고인이 장기간 도피 생활을 하며 겪는

정신적 고통, 증거의 산일로 인해 공정한 재판이 어려워지는 점 등을 고려하여

형벌권의 적정한 행사를 위한 제도"가 공소 시효가 존재하는 이유라니

아무리 읽어봐도 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지 모르겠다.

피해자의 인권이 아니라 가해자의 인권이 왜 보호받아야 하는지 진짜 해괴망측한 법이다.

그리고 가해자가 죽으면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현실도 괴이하다.

가해자의 죽음은 형사 절차를 종결짓지만, 피해자는 가해자가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형벌을 받게 된다니

진짜 양심 없는 가해자는 죽음으로 끝까지 가해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혀 절단 사건은 여든을 바라보는 최말자가 재심 청구 당시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지금도 틀렸지만, 그때도 틀렸다." 가 맞다.

2021년 재심 청구가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라고

기각되었다니, 지금이 21세기가 맞나 경악스러웠다. 다행히 준항고한지 3년 10개월이 지나

2024년 12월 대법원이 파기 환송하고 2025년 2월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우리 사회에 현재 진행 중인 범죄가 너무 많아서 19살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제대로 된 사과도 받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인지 너무 씁쓸했다.

성적 수치심이란 말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성범죄가 더 이상 여성의 정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로

이해해야 하기에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고 명백한 권리 침해이자 범죄라는 말에

성적 수치심이 너무나 오랫동안 강요된 피해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창피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모든 법률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누군가는 화가 나고, 누군가는 짜증이 나고, 누군가는 두렵고 피해자 100명이면 100 그 감정이 다 다르다.

피해자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범죄가 남긴 고유한 흔적으로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수많은 피해자의 죽음과 피로 만들어지는 피해자 보호를 위한 특별법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책이었다.

#법정밖의이름들 #서혜진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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