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 세계 대지면적의 15%가 보호되고 있으므로
여섯번째 대멸종에서 살아남을 생물종은 절반 정도뿐이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겠지만 되살아난 생태계는 대기 중 탄소를 격리시키거나
인수공통전염병의 출현을 막는 완충지대의 확대 등 더 많은 이득을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윌슨이 지구절반이 존재하려면 그것이 반드시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놓쳤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자연보존지역의 확장, 육식의 감소 등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우리가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 아는데도 탄소 배출은 증가하고 대량 멸종은 무자비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자본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내가 먹는 닭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서 공장식으로 사육되었는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음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 정신을 식민화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라고 말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상품 밑에 깔린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엄청난 위험이다.
그래서 저자는 지구의 절반을 정말 실현하고자 한다면
지구의 절반을 넘어서 자본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지구절반 사회주의(Half-Earth socilalism)를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만큼
에너지와 자원을 지구로부터 탈취해서 써야만 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지구의 유한함을 넘어서면서
인류 생존의 기반이 무너지는 징조가 보이자 신자유주의는
SRM(태양복사조절, Solar Radiation Management)와
BECCS(바이오 에너지 탄소포집저장, Bioenergy with Carbon Capture Storage)
와 같은 기술 진보로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한 입으로 두말하며 SRM과 BECCS으로
시간을 벌며 어떻게 기후 위기를 부정하고 있는지를 비난하고 있다.
사유화된 지구공학이 최적의 기후를 만들어내리라는 발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프레온 기체가 하늘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를 알지 못한 채
과학자들은 오존층이 5% 감소하는 데 50~100년이 걸릴 거라고 믿었던
오존층 구멍의 충격을 기억하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지구절반 사회주의의 목표는 여섯번째 멸종을 막고,
SRM보다는 생태계의 재야생화로 탄소량을 낮추는 '자연적 지구공학'을 실행하여
완전히 재생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이다.
생물다양성이 확대되면 생태계의 탄소 격리 잠재력이 늘어나고,
화석연료에서 벗어난 채식성 농업 시스템으로 재생 가능한 재야생화를 위한 공간이 생겨날 것이다.
지구절반 계획에서 대양의 역할도 중요하다.
대양은 생물의 절반을 품고 있고, 1년간 배출된 탄소의 약 30%인 약 20억 톤의 탄소를 격리한다.
살아있는 고래의 몸에는 로키 국립공원의 숲에 포함된 만큼의 탄소가 들어 있다.
고래가 죽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으면 매년 3만 톤, 개체 수를 예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다면
무려 16만 톤의 탄소를 매장할 것이라고 추정된다니 어마어마했다.
환경 위기를 조장하는 자본주의를 거론하지 않은 지구절반은 신식민주의의 형태로
가능한 한 현상태를 유지해 보자는 보존의 역할을 확대하는 권력의 아첨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무력으로 빼앗지 않는 한, 권력자들의 양보를 얻을 방법은
오로지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운동에만 있다는 말이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야생화와 에너지 할당제, 광범위한 채식이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해결책이라고 한다.
나의 소비 기쁨보다 우리의 관계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함에
동참할 수 있는 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강렬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