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께서 석창우 화백의 그림을 읽어주시니 생명의 힘이 정말 펄펄 느껴졌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힘찬 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까지 들어와 말을 거는 생명력이,
자기 안에 갇힌 자기만족의 힘이 품은 폭력성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열림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부활의 힘이 느껴진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석창우 화백은 2만 2000볼트 전기 감전으로 12번 수술 후 두 팔을 잃고
죽음을 경험하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팔이 있던 시절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전환한
그야말로 부활의 생명을 살아가는 분이시다.
두 팔을 잃은 남편에게 "이렇게 되었으니 살림은 내게 맡기고 당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
라고 말한 아내와, 팔 없는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말한 4살된 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석창우 화백의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팔을 잃음으로써 두 팔보다 더한 참 생명과 사랑을 얻은 힘을 찬미하는 수녀님의 모습에서
화백의 생명력 넘치는 그림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일상의 평범함에서 나오는 비범함이라고 한다.
노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을 하고 있는 여인은 우유를 무슨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따른다.
험한 노동에 찌들리고 피곤한 모습이 아니라 품위 있다.
노동의 결실로 얻은 양식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은
제단 위의 미사 제의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세관원이라 직장을 그만둘 수 없어 쉬는 날인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렸던
일요일의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수녀님께서 <잠자는 집시>를 읽어주시니
더 꿈속같이 느껴졌다. 말단 세관원으로 일하다 49세가 되어서야 전업 화가가 되어
사후에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된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화가가 가난했기에 품을 수 있는 꿈이 담겨져 있어서 그런가보다.
잘 알려진 화가의 작품은 물론 처음 접하는 화가의 작품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