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부분의 두 장 <비우니 향기롭다>와 <카일라스 가는 길>은 오래전 책으로 펴낸 적 있는

순례기를 삼분의 일로 줄인 것이고 뒷부분의 두 장 <산티아고 가는 길>과 <폐암일기>는

최근에 쓴 원고들인데 제목에 합당한 자연스러운 하나의 글로 완성되었다.

글 쓴 시기는 사뭇 달라도 평생 그리워 한걸음으로 걸어온 날들이 맞춤하니

한통속인지라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작가의 겸손한 말이

일관성있게 작가로서 살아온 삶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라 존경스러웠다.

인생이란 시간을 따라 걷는 하나의 #순례 일텐데 나의 삶의 단편 단편도 모여

이처럼 짜임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카트만두를 떠날 때 한 교민이 네팔 국립공원 사가르마타 입구가 되는 몬조 마을에서

반드시 하룻밤을 유숙하라고 했건만 자신의 체력을 노인으로 보았구나 싶어 섭섭해하며

자랑스럽고 용맹한 한국인다운 기상으로 남체바자르까지 세 시간만에 파죽지세로

와서는 고소증에 걸린 작가의 모습이 빨리 빨리 부지런히 전진만 하다

쓰러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스러웠다. 몬조 마을이 해발 2600미터이고

남체바자르가 3400미터를 웃도니 하루 만에 해발 고도를 800미터 이상 올라가지 말라고

전문 트레커가 충고한 것인데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자신의 체력을 믿고 자만했다가는

큰 코 다치는데 말이다. 고소증에 걸려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누워 앓고 있는 자신의 꼴을 고백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목표로 정한 칼라파타르는 그냥 흔하디 흔한

검은 바위일뿐인데 고소증을 막무가내 견디며 그 허상의 목표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우스꽝스럽고 불쌍한 모습에서 상투적 욕망에 불러온 허상의 목표를 좇아

배회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보다니 역시 청년작가다운 시선이었다.

저질 체력이라 히말라야 트레킹은 꿈도 꾸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히말라야 트레킹을 계속 떠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히말라야가 거대한 묵음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자신의 문장들이 소음이 되어 자신의 몸으로 다시 꽂쳐 들어올 때 매번 미치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는 작가는 소리 없는 '묵음의 소설'이 제일 좋은 소설이라고 했다.

평생 소음 같은 말 속에 갇혀 살았고 소음 같은 말을 계속 지어내면서

잠시라도 조국의 말을 등지고 벗어나고 싶었던 작가의 심정이 아주 조금은 헤아려졌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해발 수천 미터의 산들도 마운틴이라 하지 않고 힐이라고 부른다.

이승에서의 고통스런 삶은 다음 세상에서의 충만 되고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의 예비 단계라고

여기는 그들은 4천 미터나 되는 산도 산이라 하지 않고 언덕이라 부르며,

환한 미소로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보면 행복해지는 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되돌아보며 쓸데없는 욕망들에

짓눌러진 몸을 리셋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티베트 사람들이 제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장례 풍습이 조장 또는 천장이다.

독수리 떼가 쪼아 먹고 남긴 뼈를 거두어 곱게 빻은 뒤 그들의 주식인 찜바와 버무려

다시 널어놓아 독수리 떼가 다시 쪼아 먹게 해 시신이 남는 부분이 하나도 없게 되는 천장은

공덕을 많이 쌓은 자일수록 독수리들이 더 많이 모여든다고 생각하는데,

생태계 순환측면에서는 완벽한 방법이긴 하나 그래도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티베트 고유의 자연환경을 고려하니 이해가 되었다.

티베트 고원은 대부분 메마른 암반층이어서 땅을 깊이 팔 수가 없고

습도와 산소가 부족해 파묻어도 잘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유족들 입장에서는

땅에 묻는 게 가장 나쁜 것이고 실제로 흉악범을 따에 묻는다고 한다.

 

누구가 걷다가 주르륵 눈물이 쏟아지는 구간을 체험한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기도 해서 더 천천히 읽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젊은이보다는 노인들에게 더 어울린다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시간을 가로질러온 노일들의 깊은 주름살과 굽은 등이

이 길과 닮았기 때문이라니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유독 우리나라는 젊은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찾는 게 청년들의 삶이 고단해서인지

순례도 하나의 유행인지 모르겠지만 뭐 이런 유행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에서는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되지만 인생길에선 다른 누가 그려주는 친철한 화살표가 없어서

스스로 그려야 한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길은 늘 두 갈래란다.

세상이 가리켜 보여주는 보편적인 길을 눈치껏 살피며 가장 무난한 길을 선택해 걸어갈 수도 있고

잣니의 정체성에 따라 특별하고 고유한 길을 선택해 갈 수도 있다.

 

인생 순례길의 끝에 보니 사랑 #에세이 인 것 같기도 해서 부러웠다.

"나는 지금 빠르게 서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렇게 상상해요.

선인들은 서쪽 끝에 당도하면 강이 있을 거라 했어요. 그 강을 넘는 일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난 그래도 비교적 편안히 건너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랑하는 당신이 배웅해줄 테니까요.

당신을 살아서 만나 참 좋아요. 어디 당신뿐일까요. 나와 함께했던 모든 '당신'.

당신들에게데 지금 말하고 싶어요.

고맙다는 말, 함께해온 시간이야말로 축복이었다는 말."

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하는 말이기도,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아

그런 말을 주고 받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