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마는 열심히 산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8
김화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6월
평점 :
🔻이 게시물은 민음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_
처음에는 제목이 재미있었다. 악마가 열심히 산다고? 보통 악마라면 게으르게 인간을 유혹하거나, 특별한 힘으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존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정반대였다. 읽고 나니 제목은 농담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핵심 문장이었다. 가장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 Z였고, 사람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사랑과 관계, 그리고 사람의 말과 시선이었다.
책을 덮는 순간 '정말 악마가 열심히 살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정작 인간인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악마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정작 인간들을 못나게 슬프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들고, 인간들을 붕 띄우거나 나락으로 처박는 건 자꾸만 사랑이다. 악마의 몫인 걸 자꾸 사랑이 해냈다."
이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면서도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악마보다 사랑이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역설은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까운 사람의 말 한마디, 기대와 실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는 사실을 씁쓸하면서도 유머 있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악마는 오히려 인간보다 덜 무서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영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세상과의 연결을 끊은 채 살아간다.
사람을 좋아했기에 더 크게 다쳤고, 그래서 누구도 만나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악마가 소원을 물었을 때의 장면은 삶에 대한 의욕마저 사라진 한 사람의 마음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화려한 비극보다 이런 무기력함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런 가영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것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악마 Z와 종현,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 간다.
몸을 바꾸는 설정은 판타지지만,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감정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악마 Z는 처음에는 인정받기 위해 거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살아가며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발견한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고,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 말이다.
너무 익숙해서 잊고 살아가는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처음 느끼는 기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행복은 평범한 하루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악마가 먼저 깨닫는다는 설정도 참 재미있었다. 몸은 바뀌었지만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도 끝내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기 안의 상처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준다.
🔖"행복은 언제나 스몰 사이즈 정도여야 좋았다. 가늠이 가능할 때. 몸에 맞을 때."
이 문장을 읽으며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더 큰 성공과 더 많은 것을 바라느라 지금 손에 쥔 행복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영은 자신의 크기에 맞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그 담담한 문장이 오히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종현은 어린 시절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진짜 소원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채 엉뚱한 능력을 빌었던 사람이다. 사람의 체온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생겼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현이 건네는 다정함에는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상대의 말을 묵묵히 들어 주는 작은 행동들뿐이다. 그런데 그 작은 행동이야말로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작품은 보여 준다.
🔖"체념은 얼마간의 자유가 되었다. 어차피 난 사랑받지 못하니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껏 다정할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슬픈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역설적인 해방감도 느껴졌다. 기대를 모두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누군가를 대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물론 체념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사랑받으려 애쓰느라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개를 끄덕일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남기 싫다는 마음, 미움받기 싫다는 마음이 어설프게 뭉쳐지면 중요한 것을 잊게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잊어버리기 쉽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동안, 정작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 문장은 인간관계 속에서 흔들렸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 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천사긴 한데 건망증이 심해서 자꾸만 잊는 거야. 자기가 누군지, 우리가 누군지. 그러나 우리는 알지. 그는 천사라는 걸."
이 문장을 읽고 처음부터 다시 제목을 떠올렸다.
어쩌면 악마 Z는 처음부터 악마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파멸시키기보다 다시 살아가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인정받고 싶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악마 사회를 인간 사회처럼 그려 낸 설정도 흥미로웠다.
인정을 받기 위해 성과를 내야 하고,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악마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인정은 모든 악마의 둘도 없는 목표"라는 문장은 결국 인간도 평생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악마를 통해 인간 사회를 비추는 방식이 무척 영리했다.
이 작품은 판타지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시대적 배경, 고립과 상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끌어 안으며 작은 온기가 사람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책을 읽고 느낀 바와 같이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커피 한 잔, 함께하는 식사, 스쿠터를 타며 맞는 바람처럼 아주 작은 행복들은 의외로 오래 남는다. 악마 Z가 인간 세상을 살아가며 발견한 즐거움도 모두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여기서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는 전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 앞에서 당황하고, 울고, 배우고, 성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하루를 함께 견뎌 줄 사람,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 그리고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읽고 악마가 귀엽다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악마는 열심히 산다》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이야기였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버텨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덮고 난 뒤에는 악마보다 인간을, 기적보다 다정을 더 믿고 싶어졌다.
_
#악마는열심히산다 #김화진 #민음사
#소설책추천 #소설책 #신간소설 #신간소개 #신간도서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