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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포기한 사람들 - AI 시대,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메리 미즐리 지음, 여인옥 옮김 / 헤이북스 / 2026년 10월
평점 :
※본 게시물은 르온서평단 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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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판단을 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사람을 믿을지, 어떤 선택이 나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고 결정한다. 사소한 선택부터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결정까지, 일상은 크고 작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런데 요즘은 판단하는 일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면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간섭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각자의 취향이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내가 뭐라고 판단하겠어'라는 말은 어느새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처럼 자리 잡았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명분 아래 불편한 문제를 마주하지 않는 방법을 너무 쉽게 배워 온 것은 아닐까?
판단하지 않는 것이 정말 더 나은 태도일까?
판단하지 않겠다는 생각조차 이미 하나의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 옳은지 따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어떤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자신의 가치와 기준에 따른 선택이다.
그렇다면 정말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자는 도덕적 판단을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고의 토대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도덕을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 비유한 대목이 마음에 남았다.
🔖"도덕적 기준과 이상의 공동체는 훨씬 넓고, 훨씬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를 더 단단히 둘러싸고 있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매우 비슷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순간부터 이미 수많은 가치와 기준 속에 놓여 있다. 약속을 지키는 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일도 모두 그러한 공동체적 도덕의 일부일 것이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도덕 역시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다가도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당하거나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순간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도덕적 판단을 불편해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으로 돌려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 명백히 해로운 일이 벌어져도 그저 각자의 생각이 다를 뿐이라고 말하며 외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언제나 관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자가 판단하기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격 전체가 참여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판단하기는 미리 만들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동전 던지기도 아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이고, 개인의 인격 전체가 참여하는 종합적인 활동이다."
판단을 선택과 비슷한 의미로 생각한다.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판단은 그보다 훨씬 깊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경험과 가치가 나의 생각을 만들었는지 스스로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판단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요즘 얼마나 많은 판단을 외부에 맡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다. 검색창에 질문을 입력하면 수많은 정보가 나오고, AI에게 물으면 복잡한 문제도 순식간에 정리된 답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을 읽을지, 무엇을 구매할지,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지까지 추천받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AI가 제공하는 정보와 분석은 분명 유용하다.
나 역시 정보를 찾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편리함과 판단을 대신하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답을 얻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 답이 옳은지 생각하는 시간까지 줄어들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돌아봐야 할 문제다.
책에서 다루는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에 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상대주의는 문화와 사회마다 고유한 가치와 기준이 있으므로 외부에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주관주의는 도덕적 가치가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달려 있다는 관점과 맞닿아 있다. 두 관점은 서로 다르지만, 잘못 적용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판단에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문화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그 문화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더 잘하는 건 아니다."
당사자만이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경험과 목소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내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환경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잘못된 관습이나 불합리한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외부의 시선도 필요하고,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도 중요하다. 판단이란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내가 놓친 부분을 발견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판단과 비난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도 깊어졌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에는 근거와 책임이 따라야 하고,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살펴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은 때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도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이유로 침묵한다면, 지켜야 할 가치와 기준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판단에는 분명 위험이 따른다. 잘못 알고 판단할 수도 있고, 제한된 정보만으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판단의 의미는 부족한 지식을 인정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고 느꼈다.
🔖"비현실적인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일하고 오류 없는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판단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건넨다. 완벽하게 알고 난 뒤에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와 경험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을 수정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판단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살펴보고 근거를 찾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이야말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또한 책에서 다루는 도덕의 공적 측면은 개인주의와 고립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각자의 삶은 존중받아야 하고, 사생활과 자유를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내리는 선택은 때때로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내가 누리는 자유 역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도덕은 사적 영역에서 증발해 사라지지 않는다. 각자 다른 사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도덕을 시행하는 게 아니다."
자유와 책임은 서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취향과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공동체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만큼 공통으로 지켜야 할 가치도 필요하다.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서로의 판단을 근거와 대화로 검토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책 후반부에서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전에 해결 불가능해 보였던 딜레마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문장은 도덕적 판단이 잘잘못을 가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판단은 문제를 발견하게 하고, 문제를 발견하는 일은 변화를 시작하게 한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관습도 누군가의 질문과 비판을 통해 달라졌고,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문제도 여러 사람의 고민과 노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판단이 가진 또 다른 역할을 발견했다.
판단은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변화도 시작할 수 없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고, 익숙한 관습에 질문을 던지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쌓여 사회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을 판단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지속되는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고 후회하거나, 지금의 모습을 성찰하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일.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를 판단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이 내린 판단의 결과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이전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판단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할 기회까지 함께 내려놓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선물 즉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두고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정말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회의 분위기, AI가 제시한 답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침묵한 적은 없었는가?
모든 문제에 즉각적인 답을 내릴 필요는 없다. 때로는 더 알아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하며,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이 책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되 자신의 생각을 잃지 않고, 확신하되 의심할 줄 알며, 잘못을 발견하면 외면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지켜야 할 판단의 태도일 것이다.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
판단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놓지 말아야 할 능력이다.
오늘도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다.
그때마다 나만의 이유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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