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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미의 딸
이서 지음 / 반타 / 2026년 10월
평점 :
※본 게시물은 리뷰어스클럽 서평단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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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이 오랜 세월 지켜온 전통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대를 이어 지켜온 자부심이자 소중한 유산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쉽게 버릴 수 없는 삶의 터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통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딛고 세워진 것이라면 어떨까. 오랜 시간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아름다운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수탈과 착취로 부를 축적한 일본의 간장 명가,
120년의 역사를 간직한 양조장, 그리고 대를 이어 내려오는 기이한 저주.
여기에 씨간장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결합해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오랫동안 썩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모녀의 평범하지만 간절한 생존에서 비롯된다.
엄마 준요와 함께 퓨전 간장게장집 '기와'를 운영하던 은재.
어렵게 마련한 가게가 이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건물주의 퇴거 통보로 삶의 터전마저 잃을 위기에 놓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준요가 스스로 입을 검은 실로 꿰맨 채 숨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도 전에 은재에게 남겨진 것은 일억 원의 빚과 막막한 현실이었다. 그런 은재 앞에 나타난 일본인 미쓰즈는 준요가 사실 일본 간장 명가 키네장유의 후손이며, 은재에게도 물려받을 유산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엄마가 감추고 살아온 과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외가의 존재,
그리고 당장 눈앞에 놓인 빚이라는 현실.
은재는 유산을 받기 위해 교토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주한 키네장유는 평범한 가문의 저택이나 오래된 간장 공장과는 어딘가 달랐다. 오래된 목조 건물과 거대한 양조장, 쉽게 걷히지 않는 안개, 공간을 가득 채운 묵직한 간장 냄새. 겉으로는 은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사람들마저 어딘가 수상하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하나둘 벌어진다.
방 한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덟 개의 눈알, 2층 창문 밖에 나타난 머리카락, 밤마다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엄마의 다이어리에 적힌 죽은 인간을 흙으로 빚는 법과 반혼술에 관한 기록까지.
은재가 물려받으려 했던 것은 돈이었을까.
혹은 엄마가 평생 도망치려 했던 무언가였을까.
처음에는 유산을 둘러싼 가족의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읽어갈수록 이 작품은 상속 미스터리의 범위를 넘어선다.
검은 씨간장에 발효되는 것은 콩만이 아니었다.
씨간장은 오랜 시간 이어온 간장의 종균이자 새로운 간장을 만드는 바탕이 된다. 오래된 것을 남겨 다음 세대로 이어간다는 점에서 전통과 계승을 상징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씨간장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맛처럼, 키네장유의 역사도 오랜 세월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장인의 정성과 전통만이 아니다. 조선에서 빼앗은 것들, 누군가의 고통으로 쌓아 올린 부, 그리고 그 부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끔찍한 대가가 함께 발효되고 있었다.
모로미(もろみ, 醪)는 간장이나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원료가 발효되는 중간 단계의 덧을 뜻한다. 완성된 간장이 되기 전, 여러 재료가 뒤섞여 오랜 시간을 거치는 과정이다.
이 단어를 알고 나니 작품의 제목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이 남겨지고 무엇이 버려지는가.
그리고 오랜 시간 숙성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을 전통이라 부른다. 하지만 시간이 죄를 씻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춰진 죄를 더 깊숙이 묻어두고, 그것을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 문장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썩은 것은 버려지지만 발표된 것은 칭송을 받지. 죄도 오래 묵으면 향기가 난단다. 인간들은 그 비린 냄새를 전통이라고 부르지.”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된 역사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의 잘못까지 미화되는 현실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운 전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가해자의 후손들이 그 유산을 당연한 권리처럼 누린다고 해서, 그 시작점에 있었던 잘못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 씁쓸한 것은 은재 역시 처음부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키네장유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수탈과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그녀는 당장 살아갈 돈이 필요했기에 그곳으로 향한다.
이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살아온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놓이고, 엄마마저 잃은 상황에서 일억 원의 빚을 떠안은 사람에게 도덕적 선택만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당장의 생존이 절박한 사람에게 돈은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재의 선택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잘못된 역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마음. 자신과 관계없는 과거라고 선을 긋고 싶지만, 그 과거가 자신의 핏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유산을 받고 싶다는 욕망과 물려받아서는 안 될 것을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은재의 모습은 인간의 모순을 보여준다.
🔖“하지만 핏줄이란 건 그렇게 간편하고 서늘한 증명서였다. 애정이나 역사적 부채감이 소거된 채, 유전자 하나로 증명되는 관계.”
가족이라는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 보낸 시간일까, 서로를 향한 애정일까, 아니면 단지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일까.
이 작품에서 핏줄은 원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책임과 굴레에 가깝다. 은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문의 역사를 마주해야 하고, 엄마가 평생 감추고 싶었던 비밀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키네장유라는 가문보다 엄마 준요와 딸 은재의 관계가 마음에 남았다.
준요는 왜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떠났을까.
왜 자신의 과거를 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떠나온 곳에는 무엇이 있었기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 했을까.
은재는 엄마의 죽음 이후에야 엄마가 살아온 삶의 일부를 알아간다.
생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엄마의 과거와 두려움, 그리고 도망쳐야 했던 이유를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사실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삶의 비밀은 존재한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감추기도 하고, 지키고 싶기 때문에 침묵하기도 한다.
준요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엄마가 딸에게 물려준 것은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나 살아갈 기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문장은 그 모든 의미를 한층 무겁게 만든다.
🔖“키네장유의 유산은 돈이 아니었다. 남의 목숨을 태우고 남은 재였다. 그 잿더미 위에 그녀가 태어났다.”
유산이라는 단어에는 보통 긍정적인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누군가가 평생 일구어 놓은 재산과 삶의 흔적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
하지만 이 작품에서 유산은 축복이 아니라 희생의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부라면 그것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손에 넣더라도 그 안에 담긴 비극까지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오래된 양조장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존재와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공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진짜 무서운 것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특히 양조장의 습도와 날씨에 따라 무언가가 달라지고, 그곳의 규칙을 어기면 안 된다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이런 날은 좋지 않아요. 습도가 변하거든요. 그러면 간장에 쓰이는 콩이 콩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요.”
간장을 만드는 공간에서 습도와 발효는 자연스러운 요소지만, 이곳에서는 익숙한 설명이 어느 순간 기이한 경고로 바뀐다. 특히 “여기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는 표현은 오래된 양조장이 품고 있는 비밀을 더욱 불길하게 만든다.
평범한 식재료가 낯선 존재로 변하고, 익숙한 가족의 얼굴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 작가는 독자가 알고 있다고 믿는 일상적인 것들을 조금씩 낯설게 뒤틀어 공포를 만들어낸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거미와 진흙 인형, 반혼술 등의 소재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집착일까.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무너지는 양조장은 오랫동안 감춰온 죄가 형체를 얻어 되살아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읽는 내내 오래된 저택과 양조장의 축축한 공기, 어디선가 풍겨오는 간장 냄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소리와 기척으로 먼저 느끼게 하는 장면들은 직접적인 설명보다 더 강한 불안감을 남긴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의 관계다.
은재를 반기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어긋난 가족들의 태도, 오래된 가문을 지켜온 사람들의 침묵,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은재.
그 집에서 은재는 가족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 친밀함이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이어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지는 쉽게 확신할 수 없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핏줄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서로를 지켜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욕망과 희생을 생각하게 한다.
《모로미의 딸》을 읽고 나서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1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져 온 가문의 역사와 그 안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희미해질 것 같지만,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사라지고 세대가 바뀌어도 그 결과는 다음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에게는 물려받고 싶은 재산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벗어나고 싶은 굴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말하는 저주는 초자연적인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탐욕으로 시작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다음 세대에게까지 당연한 것처럼 물려주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저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재에게 남겨진 선택은 돈과 혈통, 가족과 역사 중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물려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없다. 태어난 곳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이어갈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검은 씨간장처럼 천천히 깊어지는 불쾌한 공포와 함께, 인간의 욕망이 남긴 흔적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오래 묵었다고 모두 귀한 것은 아니며, 대대로 이어졌다고 모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을 끝내는 일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만든 깊은 맛과 세월이 감춘 오래된 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 핏줄이라는 이유로 이어지는 비극,
그리고 엄마가 끝내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는 딸의 이야기.
기이한 존재가 등장하는 오컬트 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뿐 아니라, 가족의 비밀과 역사적 죄의식, 인간의 욕망을 깊이 있게 다룬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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