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평점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처음에는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의 등장부터가 흥미롭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찾아와 화성의 토지를 알선하겠다고 하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는 남자라니.
얼핏 보면 엉뚱한 사람의 기이한 행동을 다룬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베 고보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정말 화성인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다.
그가 화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당연하게 믿어온 현실의 기준이 하나씩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쉽게 비정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상식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을 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다수가 동의하는 생각과 행동을 정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그 기준은 얼마나 확실한 것일까.
다수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작품 속 남자는 자신이 화성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일 수밖에 없다. 아내의 경고와 주인공의 의심은 독자에게도 그를 경계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의 주장을 펼칠수록 상황은 복잡해진다.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의 말이 지나치게 치밀하고,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의 근거가 부족하다.
그렇게 독자는 어느 순간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이것이 아베 고보가 만들어 내는 문학적 긴장감이 아닐까 싶다.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 하는 독자의 욕구를 이용하면서, 정작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특히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이라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허구를 만들어 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 온 이야기와 닮은 인물을 현실에서 마주한다는 상황 자체가 상당히 역설적이다. 방송 속에서 화성인은 흥미를 끌기 위한 소재였지만, 어느 날 실제로 자신이 화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집 앞에 나타난다.
허구를 만들어 내던 사람이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매일 접하는 뉴스와 이야기, 타인의 경험과 주장도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정보는 사실처럼 전달되고, 어떤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언제나 명확할까. 익숙한 이야기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낯선 이야기는 충분히 살펴보기도 전에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베 고보는 SF라는 형식을 빌려 미래의 과학기술보다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의 화성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았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작품의 제목인 《인간 판박이》 역시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게 한다. 판박이라는 말에는 원본과 복제본, 진짜와 가짜라는 구분이 들어 있다.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닮았지만 어딘가 다르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외형일까, 사고방식일까, 언어와 행동일까.
아니면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의식 그 자체일까.
인간과 꼭 닮았다는 것은 과연 인간이라는 뜻일까.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대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인간답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기준에 상대를 맞추려 할 때가 많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면 낯선 존재로 밀어내기도 한다.
이 작품이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유는 타인을 판단하는 방식까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속 문장에서도 그런 불안과 혼란이 느껴진다.
🔖“그 기묘한 남자는 5월 어느 맑은 날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 재봉틀 외판원 같은 한가로운 발걸음으로 나타났다.”
첫 문장부터 묘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맑은 날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재봉틀 외판원처럼 한가롭게 등장하는 낯선 남자. 특별히 위협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범하다고 넘기기에도 어딘가 이상하다. 이처럼 일상적인 풍경에 아주 작은 이질감을 끼워 넣는 방식이 작품의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사건이나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이 얼마든지 낯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남자가 자신을 화성인이라고 밝히는 장면은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보통의 인간이 아닙니다. 화성인입니다.”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히 외계인이라는 정체성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보통의 인간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이라는 기준은 누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요컨대 거스르는 것이 무서웠을 뿐이잖습니까.”
이 문장은 누군가의 행동을 지적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했을 때 감당해야 할 시선과 불이익이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로는 자신의 판단보다 주변의 분위기를 먼저 살피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갈등을 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접다 보면 어느 순간 무엇이 자신의 진짜 생각이었는지조차 흐려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을 넘어 지금 우리의 모습에도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혹시 당신이라면 대답할 수 있을까. 뭐라고 대답하면 의사가 만족할지,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부디 가르쳐 주길 바란다. 내가 특별히 좋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니.”
이 문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과 무력감이 함께 담겨 있다.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 다르다. 침묵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하고는 한다.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고, 자신의 행동을 납득시키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전달되지 않는 감정이 있고, 어떤 질문에는 정답을 알고 싶어도 끝내 대답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일과 같은 것인지도 생각하게 된다.
이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침묵을 거부나 무관심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침묵에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혼란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인간 판박이》는 화성인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다수의 의견에 순응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특히 아베 고보가 SF를 상상력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현실을 의심하는 문학적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를 잠시 낯설게 만들면,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모순과 불안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으로 내가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사회가 정한 기준을 따르는 것, 다수가 옳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의심할 수 있는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누군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 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낯선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그 사람의 세계에는 어떤 논리와 사정이 있는지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기묘한 이야기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낯선 화성인이 아니라 익숙한 인간의 모습이다.
읽는 동안에는 기이한 상황과 논리에 이끌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인간과 정상성, 진실과 침묵에 관한 질문이 남는 작품. 《인간 판박이》.
내가 믿고 있던 정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에 가깝다.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낯선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일은 인간인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똑같은 모습만을 요구하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_
#인간판박이 #현대문학 #아베고보
#소설 #장르소설 #일본소설 #sf #sf소설 #소설추천
#신간 #책소개 #책추천 #도서리뷰 #책리뷰 #독서후기
#도서추천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