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김에 교토 - 조각난 자존감을 모으는 시간
노푸름 지음 / 상록의서가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아침이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주어진 일을 해내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새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을 넘어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디에서 일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인정받는지가 한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말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를 잃는다면 어떨까.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까지 부정당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보다, 더 이상 자신을 소개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 먼저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해고된 김에 교토》는 회사에서 해고된 한 사람이 교토로 떠난다. 언뜻 보면 실직을 계기로 떠나는 여행 에세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여행보다 더 깊은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으로 가치를 증명해 왔으며, 그것을 더는 증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을 믿을 수 있을지.

해고는 고용관계의 종료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매일 출근하던 곳이 사라지고,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흔들리고, 미래를 위해 세워 놓았던 계획들이 한순간에 불확실해진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타인의 시선보다도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갑자기 의심의 대상이 되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해고된 김에 교토》. 그래서 제목에 해고라는 사건에 여행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순간, 무너진 일상에 작은 틈이 생긴다. 삶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있다. 아무리 성실하게 준비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최선을 다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끝나 버리는 관계와 기회가 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원인을 찾고, 잘못을 돌아보고, 다음에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쓴다. 물론 반성과 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실패를 자신의 부족함으로만 해석하기 시작하면 삶은 끝없는 자기 심사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심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데 너무 익숙하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직장에서는 성과를, 사회에서는 지위와 경제력을 통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확인받는다. 그러다 보면 평가받지 않는 시간조차 불안해진다. 쉬면서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를 보내면 괜히 죄책감이 든다.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여행이라는 공간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이외에 낯선 길에서 헤매고, 계획에 없던 일을 만나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로는 제대로 보지 못한 풍경이 아쉽고, 사소한 실수 하나에 하루의 계획이 어그러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여행은 실패한 하루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길을 잃었기 때문에 발견한 골목이 있고,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에 오래 기억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일상에서는 같은 실수를 그렇게 쉽게 실패라고 단정하는 걸까.
낯선 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과 유쾌한 에피소드들은 잠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지만, 여행이 끝난 뒤에도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취업의 어려움과 면접의 긴장,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 되살아나는 감정까지. 마음은 여행 가방처럼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해고는 내 자리를 지워 버렸지만, 사람까지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직장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쌓아 온 경력과 능력을 펼치는 장소이자,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직장을 잃는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상실의 크기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직장이 나의 일부라는 사실과 직장이 나의 전부라는 믿음은 다르다.
이 문장이 건네는 위로는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다. 직장을 잃었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면 된다는 식의 가벼운 격려도 아니다. 잃어버린 것의 무게를 인정하면서도, 그 상실이 나라는 사람 전체를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는 제안이다.

이 태도가 실직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 관계의 끝에서 자신을 탓하는 사람,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아 조급해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지금 잃은 것은 무엇이며, 그 상실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까지 잃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패는 하나의 사건이지, 사람에게 붙여 놓을 영구적인 이름이 아니다.


책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교토의 오래된 공간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100년 전통의 스마트 커피, 낡은 목조 가옥을 살린 블루보틀 교토, 전통 향과 종이를 다루는 큐쿄도, 지역의 디자인과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디앤디파트먼트 등. 이곳들은 오래된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어 갈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공간들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오래되었다는 것은 종종 뒤처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낡은 것은 새것으로 교체하고,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개선하고, 지금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된 건물은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허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채 새로운 쓰임을 얻을 수도 있고, 과거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지금의 삶과 공존할 수도 있다.

교토의 공간들이 보여주는 매력은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있다.


저자가 교토에서 마주하는 공간과 사람들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지는 것에도 새로운 역할이 생길 수 있고, 완벽하지 않은 것에도 고유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짧지만 마음에 맴도는 문장이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채우려 한다. 남들보다 부족한 능력, 부족한 돈, 부족한 경험, 부족한 성취를 헤아리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결핍을 제거해야만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삶은 끝나지 않는 보충 수업이 되고 만다.

결핍은 무조건 채워야 하는 빈칸이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실패를 경험했기에 내가 그동안 무엇에 지나치게 의존했는지 알게 될 수 있고, 익숙한 역할을 잃었기에 그 역할 바깥에 존재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 순간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결핍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면, 그 안에서도 다른 길을 찾아볼 여지는 남아 있다.

이 책의 유쾌함 역시 그런 여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공항에서의 뜻밖의 만남, 낯선 식당에서 벌어지는 소동, 노래를 부르며 느끼는 소박한 즐거움, 여행 중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가는 난감한 상황까지. 여행은 멋진 풍경과 감동적인 깨달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당황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런 장면들이 해고라는 무거운 주제와 어울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삶이 흔들릴 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웃음이 상처를 없애 주지는 않지만, 상처가 삶의 모든 장면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작은 틈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잠깐 웃었다고 해서 덜 힘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동안 즐거웠다고 해서 내일의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즐거움은 필요하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노래를 듣고, 낯선 골목을 걷고, 누군가와 다정한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야말로 삶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일 수 있다.


🔖“저는 실패 컬렉터인데, 이만하면 훌륭한 컬렉션이죠.”

실패를 컬렉션에 비유하는 시선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컬렉션은 각기 다른 물건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실패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한 경험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무엇을 견뎌 왔는지 돌아볼 수는 있다.

실패를 컬렉션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저 실패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의 의미일 것이다. 실패를 겪은 자신에게도 다시 시도할 기회를 허락하는 것,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자기 존중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의 의미이기도 하다.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얻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을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까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일 것이다.


사람은 종종 쉬기 위해서도 이유를 필요로 한다. 충분히 일했기 때문에, 아파서, 지쳐서, 혹은 다음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휴식마저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로 설명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반드시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하루를 살아갈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시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시간,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까지 실패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언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해고된 김에 교토》가 건네는 위로는 당장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가 앞으로의 삶을 전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책을 덮고 나면 교토의 풍경보다도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이 오래 남을 것 같다.
낡은 공간을 무조건 허물지 않고 새로운 쓰임을 찾아가는 태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여행에서도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는 마음, 실패를 없애기보다 실패한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

남들이 정한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뒤처졌다고 생각하고, 계획에서 벗어나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하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을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과거의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여전히 불안하고, 때로는 자신이 없고, 실패의 기억이 남아 있더라도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선택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괜찮아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아직 괜찮지 않은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절에서, 계획에 없던 웃음에서,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건너온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해고는 한 직장에서의 끝일 수 있지만, 한 사람의 가능성까지 끝내는 사건일 필요는 없다. 실패는 삶의 한 장면일 수 있지만, 그 장면만으로 전체 이야기를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책을 덮으며 나 자신에게도 속삭여본다.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너무 쉽게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함부로 포기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삶의 페이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책 전체를 덮어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_

#해고된김에교토 #노푸름 #상록의서가 #서평단
#에세이 #에세이추천 #여행 #여행에세이 #여행도서
#신간 #책추천 #도서추천 #북리뷰 #책리뷰 #도서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