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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숍앤센터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8월
평점 :
※본 포스팅은 교보문고 VORA (@kyobobook_vora )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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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
몸인가, 마음인가, 아니면 타인을 대하는 태도인가.
설재인 작가의 《셸리 숍앤센터》는 버려진 인체 기관을 조합해 만들어진 생명체 ‘프랑’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순간이동에 버금가는 교통수단 웨일홀의 부작용으로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버려진 인체 기관들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는 설정부터 파격적이다. 여기에 인간의 취향에 맞춰 제작되고, 사랑받다가 버려지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재활용되는 프랑의 세계가 더해진다.
처음에는 기괴한 신체 묘사와 파격적인 세계관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불편함의 정체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프랑의 모습이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인간 사회가 더 섬뜩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몸이 조각나고 찢기는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고, 자신의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그 존재의 가치마저 없애버리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프랑은 인간이 버린 신체 기관을 재료로 만들어진다. 어떤 프랑은 팔이 여덟 개이고, 어떤 프랑은 코가 여러 개이며,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외형을 가진 존재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프랑을 주문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반려의 모습으로 소비한다. 하지만 그 사랑에는 분명한 조건이 붙어 있다. 인간이 원하는 모습이어야 하고, 인간의 말을 따라야 하며, 인간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
이 설정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소유욕에 대해 생각했다.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생활 방식에 맞춰 행동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라기를 기대한다. 물론 현실의 반려동물과 소설 속 프랑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를 독립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으로만 바라볼 때, 사랑은 얼마든지 통제와 소유의 형태로 변할 수 있다.
특히 프랑을 설명하는 광고 문구인 '개보다 나은 프랑'은 이 세계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훈련하기 쉽다는 점이 프랑의 장점으로 내세워진다. 여기에는 생명체의 가치를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지에 따라 평가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세계.
쓸모가 없어진 순간 사랑받을 자격까지 사라지는 세계.
프랑의 비극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프랑을 만들었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권리까지 정당하게 갖게 된 것일까. 창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소유하고, 이용하고, 폐기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소설 속 가상의 생명체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쓸모없거나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간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프랑 노엘과 거대한 몸집에 거친 성격을 지닌 프랑 허슬이 있다. 노엘은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고, 허슬은 인간의 기준에서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위협적인 존재처럼 취급된다. 두 존재는 외형부터 성격까지 대조적이지만, 인간이 정해놓은 질서 속에서 상처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노엘의 고민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면 인간일까? 인간의 뇌를 가졌다면 인간일까? 생각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고통을 느낀다면, 그 존재를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노엘이 느끼는 혼란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얼마나 견고한지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과 프랑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외형이라면, 노엘은 그 기준을 흔드는 존재다. 하지만 인간과 비슷한 얼굴을 가졌다고 해서 노엘이 인간 사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닮음은 정체를 감춰야 하는 이유가 된다.
책 속에서 노엘은 이렇게 생각한다.
🔖“프랑임을 숨겨야 했지만. 그것은 프랑 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인간들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자신을 소름끼쳐 할까 봐.”
자신이 누구인지 부끄러워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워 숨겨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데도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감추고, 자신의 모습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외로울까.
종종 차별받는 사람에게 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정작 돌아봐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배척하는 사회일 것이다.
다름은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다.
다름을 이유로 타인을 밀어내는 시선이 문제다.
허슬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을 드러낸다. 거대한 몸과 거친 말투,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쉽게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다. 노엘을 괴롭히는 존재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이들이 노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은 존재로서 노엘과 연결된다.
이들의 관계는 우정이라고 부르기에는 거칠고, 애정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모순적이다. 그러나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같은 세계의 폭력에 맞서게 된다는 점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서로 닮아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같은 고통을 알아보기 때문에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
노엘과 허슬의 관계는 연대가 반드시 온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때로는 분노와 불신, 충돌을 거쳐서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작품에서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 있다.
🔖“혹시 인간을 공격한다는 죄책감이 든다면 마음을 편히 먹으렴. 그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하니까, 괜찮아.”
노엘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인물의 태도는 겉으로는 이해와 허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엘은 속으로 되묻는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인간답나요?”
인간은 자신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성과 도덕성, 공감 능력, 언어와 사회성 같은 특성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과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은 다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니며,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악한 것도 아니다.
소설 속 인간들은 프랑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프랑을 학대하고, 사랑을 말하면서 필요에 따라 버리며, 생명을 만들어내면서 그 생명이 겪는 고통에는 무관심하다.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프랑을 사랑스러운 반려라고 부르지만, 불편해지는 순간에는 통제하고 처분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은 인간이라는 신체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인간다움이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돌려주지 못하는 존재, 자신과 다르게 생긴 존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윤리적 태도가 드러난다.
물론 인간다움을 단 하나의 기준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며, 상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려는 태도는 중요하게 여길 만한 가치일 것이다.
그래서 노엘의 질문은 프랑에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독점해온 그 자격이 과연 정당한지 묻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이 프랑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면, 그 우월함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하다면, 인간다움이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책 속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버려진 프랑의 입양 절차와 과거의 동물 입양에 관한 이야기가 대비되는 대목이었다.
🔖“당신은 인간인가? 인간다운가? 인간답다는 개념을 알고 있는가? 끝까지 인간답고 싶은가?”
과거에는 유기된 개와 고양이를 입양할 때도 복잡한 문답을 거쳐야 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어느 순간 인간에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묵직하다.
🔖“왜 유기된 프랑들은 이렇게 죽고 '재활용'되어야 하는가? 왜 인간다움에 대한 문답은 더 이상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가? 아니, 애당초 '인간답다'는 게 뭔가? 인간이 뭔가?”
이 대목을 읽으며 기준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준으로 평가받는 사람 사이의 권력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는 규칙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 규칙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누군가는 판단하는 자리에 서고, 누군가는 판단받는 자리에 머문다. 그리고 그 기준이 불공정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쪽이 그것을 정상적인 질서라고 주장하면, 차별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작품 속 프랑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을 결정할 권리는 갖지 못한다. 인간은 프랑을 소유할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하면서도 프랑에게 인간을 대할 때와 같은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편견을 넘어선다. 한쪽은 다른 쪽의 존재 가치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다른 쪽은 그 판단에 저항할 수단마저 제한당한다.
차별이 무서운 이유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만 있지 않다. 차별이 제도와 관습, 경제적 이해관계와 결합하면 폭력은 개인의 악의가 없어도 반복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잔인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세계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은 프랑을 괴롭히는 행위를 악행으로 여기기보다,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허용된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프랑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프랑의 쓰임을 정하는 것도 인간이며, 프랑이 버려진 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다면 프랑에게 필요한 것은 친절한 주인이 나타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주인의 선의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구조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더 근본적인 변화일 것이다.
노엘과 허슬이 자신들을 파괴하려는 세계에 맞서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작품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들의 저항은 복수하고 싶다는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삶을 다른 존재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자리한다.
노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확신을 얻으려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고 싶어.”
이 말은 노엘이 인간과 프랑 사이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압축한다. 인간과 같은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로 인간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노엘은 인간이 인간을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말과, 프랑을 손쉽게 죽이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노엘의 선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억압받은 존재가 저항하는 것은 정당한 자기방어일 수 있지만, 저항의 과정에서 폭력이 반복된다면 그다음에는 어떤 세계가 만들어질 것인가.
작품은 이 문제를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아주 느리게.”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흔히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더 생각해볼 것은 반복되는 것이 사건 자체인지, 아니면 사건을 만들어내는 구조인지에 관한 문제다.
지배하는 존재와 지배받는 존재가 바뀌어도 누군가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불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며,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과거의 비극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은 권력을 빼앗아오는 일로 끝나서는 안된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이전의 질서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새롭게 얻은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도 기존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장면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후에 어떤 세계가 가능할지 질문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억압받던 존재가 권력을 얻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에서도 누군가는 타인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싶어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더 많은 권리를 원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의 자유를 제한하려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정한 해방은 지배자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누구에게도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흔히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차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가진 존재를 마주하면 누구나 낯섦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낯섦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섦을 이유로 상대의 권리를 빼앗지 않는 태도를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존중은 무엇일까.
상대가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하는 것일까.
상대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존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것일까.
나는 마지막에 가까운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를 좋아할 수는 없다. 모든 차이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존중은 반드시 호감에서 출발할 필요가 없다.
프랑의 세계는 이 사실을 불편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프랑을 사랑하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프랑을 사랑하지 않을 때조차 그들의 존재와 삶을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셸리 숍앤센터》를 읽고 남는 것은 인간다움이라는 말의 무게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다운 것은 아니다.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끊임없이 질문받아야 하는 가치가 아닐까.
물론 타인을 존중한다고 해서 언제나 선한 선택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의로 시작한 행동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정의를 위한 저항도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인간다움은 한 번 획득하면 영원히 유지되는 자격증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봐야 한다.
옳다고 믿는 기준이 누군가를 부당하게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질서가 다른 존재의 고통 위에 세워져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다운 것일까,
아니면 인간답게 행동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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