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퀘렌시아
온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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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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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집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일 수도 있으며,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낯선 곳일 수도 있다. 너무 지쳐버린 날에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퀘렌시아》를 읽으며 계속 마음에 남았던 단어가 바로 ‘퀘렌시아’였다.

투우장에서 지친 소가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자신만의 안전한 장소. 아무리 거칠게 싸우고 상처를 입었어도 그곳에 들어가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자리.


연우에게는 딸의 죽음이 있고, 아내의 병이 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원망과 죄책감이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건은 끝났지만 기억은 끝나지 않고, 사람은 떠났지만 그 사람과 관련된 감정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우가 청연재로 향하는 것은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삶으로부터 잠시라도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연재에서 연우가 만나는 것은 극적인 구원이나 단번에 모든 상처를 없애주는 해답이 아니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의 춤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는 아주 느린 시간이다.

이 부분이 좋았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이제 잊어”, “용서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실패처럼 느끼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변화는 꽤 현실적이었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그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문장이 있다.

🔖“타인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만큼만 보일 뿐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남과 싸운 적이 없다.
……늘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타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가진 기억과 경험, 기대와 두려움을 통해 상대를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날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어떤 날에는 상처가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상대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늘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는 문장은 생각은 오래하게 만든다.

사람과의 갈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 안의 기준과 싸우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왜 싫을까.
저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왜 자유롭지 못할까.

질문의 끝에는 ‘타인’보다 ‘나’가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철학적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너무 오래 들어서 익숙한 질문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진지하게 바라보면 상당히 낯설다.


《이미, 퀘렌시아》는 불교의 무아와 연기, 인드라망과 현존이라는 사유를 통해 이 질문을 계속 밀어붙인다.

특히 ‘무아’를 “나는 없다”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굉장히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의 사유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정된 ‘나’라는 틀에 모든 것을 가두지 않을 때 오히려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내가 나를 하나의 단단한 실체로 붙잡고 있을수록 상처도, 분노도, 자존심도 단단해진다. 반대로 그것들이 계속 변하고 흘러가는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면 마음에도 틈이 생긴다. 그 틈이 어쩌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보석은 제빛을 품고 있어도 마주한 빛이 있어야 드러나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 서로를 비추기 위해서 아닐까요.”

사람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이 드러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도 내 안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을 수 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준 사람을 통해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좋은 면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드라망’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나는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먹는 음식부터 내가 사용하는 물건, 내가 나누는 말과 관계까지 수많은 존재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 사람의 삶 역시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우의 상처 역시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의 변화 또한 혼자 이루어지지 않는다. 청연재에서 만난 사람들, 함께한 시간, 사소한 음식과 풍경, 대화와 침묵이 조금씩 연우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치유’는 누군가가 나를 고쳐주는 행위라기보다 내가 다시 세상과 연결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치유’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처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경험은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을 잊는 것이 치유라면, 잊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애도는 망각과 다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상태.
슬픔이 존재하지만 슬픔만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닌 상태.

이 책이 말하는 회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 속에서 연우가 마주하는 것은 과거를 삭제하는 방법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법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건이 오늘의 나를 영원히 규정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퀘렌시아에 대한 설명도 인상 깊었다.
🔖“힘들고 지쳤을 때 쉬어 가는 곳. 칼이 등에 박혀 피가 흘러도 그곳에서는 안심하는 거죠. 거기 있으면 소는 두려워하거나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안식처’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 보였다.

안식처는 반드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어야 할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잠시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무너진 채로 있어도 괜찮은 곳이 진짜 안식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방향 전환을 한다.
퀘렌시아를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자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의 ‘이미’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곳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곳.
찾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과 기억과 두려움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었던 곳.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지만 이 고요는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잃고 무너져도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세상이 함께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한 부분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자리를 이야기한다.

사람은 떠나고, 관계는 변하고, 몸은 늙고,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기억마저 언젠가는 흐려진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자리는 남아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소설에서는 ‘현존’과 ‘무아’라는 사유를 통해 접근한다.

그것을 반드시 어떤 초월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의 나’에게 잠시 돌아오는 것.

과거의 한 장면에 붙잡혀 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아주 잠깐 삶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이미, 퀘렌시아》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오래 바라보는 소설에 가까웠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도 ‘무엇을 깨달았다’는 느낌보다 몇 개의 질문이 남는다.

지금 무엇으로 나를 규정하고 있을까.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퀘렌시아는 어디일까.


삶이 무너졌을 때 다시 살게 하는 것은 때때로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오늘 한 끼를 먹고, 한 번 숨을 쉬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다시 잠드는 아주 평범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괜찮아지는 것’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퀘렌시아》의 마지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보다 ‘어디에 이미 있었는가’를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평화를 찾아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오래 바깥만 바라보느라 이미 내 안에 있었던 고요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전한 곳이 어쩌면 아주 멀리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이미 열려 있는 자리일 수도 있다는 것.

퀘렌시아는 도착해야 할 곳이 아니라,
뒤늦게 알아보게 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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