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해도 괜찮은 내일, 루시 모드 몽고메리 영어 필사 - 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서거 85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ㅣ 이루리북스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이루리 편역 / 이루리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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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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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빨강 머리 앤》을 읽으며 앤의 상상력과 명랑함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어른이 된 뒤 다시 만난 몽고메리의 문장에서 조금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초록 지붕 집과 숲, 호수와 별빛이 아름다워서 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어 있던 외로움과 상실, 자존심과 상처, 그리고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려 했던 한 사람의 단단한 마음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실수해도 괜찮은 내일, 루시 모드 몽고메리 영어 필사》는
‘어른이 된 후 다시 읽는 몽고메리’를 만날 수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빨강 머리 앤]의 유명한 문장만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밀리], [블루 캐슬], [실버 부시의 패트리샤]를 비롯해 몽고메리의 초기 시까지 아우르면서 한 작가가 평생 바라보고 기록했던 세계를 계절의 흐름에 따라 펼쳐놓았다.

봄에서 시작해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을 통과하고 다시 봄을 기다리는 구성은 책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장치 역할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마음도 늘 봄일 수는 없으니까.'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뜨겁게 살아가는 계절도 있고, 지나간 것들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겨울을 견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래서 134개의 문장은 134일 동안 자신의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작은 순례처럼 다가온다.

특히 제목에 들어 있는 ‘실수해도 괜찮은 내일’이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상하게도 지나간 실수에는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면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는 너무 쉽게 겁을 먹는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순간을 복기하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까지 미리 걱정한다. 그런 우리에게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실수한 뒤에도
다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과 맞닿아 있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당신이 멈춰 섰던 그 길모통이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내일은 오늘보다 분명 더 아름다울 거예요.”

이 문장이 좋았던 이유는 길모퉁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한 걸음 내딛어보겠다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몽고메리가 말하는 희망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몽고메리의 낙관은 마냥 해맑은 낙관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삶이 늘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순간까지 지나온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편역자의 말'이라는 책 서문에는 ‘앤의 쾌활함 뒤에 숨겨진 상실의 아픔’이라는 관점도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에는 앤의 상상력과 수다스러움, 엉뚱한 실수들이 재미있었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상상하고, 왜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야 했는지를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상상력은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힘일지도 모른다.
몽고메리의 작품 속 자연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게 된다. 숲과 호수, 들판과 바다, 햇살과 달빛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마음을 비추는 또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그래서 이 필사집의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숲’, ‘햇살’, ‘호수’, ‘달빛’, ‘정원’, ‘바람’, ‘별빛’, ‘들판’ 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을 바라보는 일과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 조금씩 겹쳐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사’라는 형식도 잘 어울린다.

좋은 문장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손으로 천천히 옮겨 적을 때 전혀 다른 속도로 다가온다. 한 문장을 베껴 쓰기 위해서는 평소처럼 빠르게 읽고 지나갈 수 없다. 단어 하나를 보고, 문장의 호흡을 따라가고, 내가 지금 어떤 단어에서 멈추었는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영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놓았다는 점에서 영어 필사의 의미도 있다. 영어를 완벽하게 공부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 한 문장이 다른 언어에서 어떻게 태어나고 번역을 통해 어떻게 다시 내 마음에 들어오는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의 필사 공간은 작가의 문장을 ‘나의 문장’으로 바꾸어가는 공간이 될 것 같다. 몽고메리가 남긴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문장을 쓰고 있는 순간 떠오르는 나의 기억과 감정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수 앞에서’, ‘작은 용기’, ‘자존심과 상처’, ‘오래된 두려움’, ‘스스로 견뎌야 하는’ 같은 제목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기억을 불러낼 만하다.
누군가에게는 실패했던 하루가 떠오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전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떠오를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견뎠던 시간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될 것 같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그날의 내가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마음에 닿는 지점이 달라질 테니까.

특히 ‘내 마음의 사계절’이라는 마지막 부록은 이 책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34개의 문장을 필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기록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몽고메리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다.
몽고메리의 문장은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고, 필사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방법이며,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 길을 걸은 나 자신의 기록이다.

책 속에서 또 하나 마음에 남는 문장은 🔖“사랑스러운 세상아, 넌 정말 아름다워. 네 안에서 살아 있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뻐”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 책 전체를 한마디로 표현주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에는 분명 힘든 순간이 있고, 때로는 세상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세상을 향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은 약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오래 견뎌낸 마음에서 나오는 힘일 수 있다.

그래서 《빨강 머리 앤》을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새로운 독서가 될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앤과 함께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했다면, 지금의 나는 몽고메리와 함께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발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발견은 어쩌면 ‘나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곱씹게 된 것은 ‘사계절’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였다.
사람의 삶에도 봄과 여름만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로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뜨겁게 살아가고, 내려놓고, 멈춰 서고, 다시 기다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겨울이 왔다고 해서 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이 다시 봄을 향하고 있다는 점도 좋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계절을 통과하는 일이고,
성장한다는 것은 모든 계절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계절이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를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실수해도 괜찮은 내일, 루시 모드 몽고메리 영어 필사》는 그런 시간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무언가를 빨리 배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느린 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림 때문에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에 한 편씩, 134일 동안 문장을 읽고 쓰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서 잠시 내려와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될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하루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의 내가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고.
길모퉁이 너머를 아직 알 수 없어도 한 걸음쯤 내디뎌도 괜찮다고.

무엇보다 내일이라는 자리는 아직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르니까.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는,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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