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법정을 열겠습니다 - 정의의 이정표가 된 판결부터 권력의 흉기가 된 재판까지 ㅣ 생각하는 10대
권재원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법정이라고 하면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고, 유죄와 무죄를 판단하는 공간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권재원의 《세계의 법정을 열겠습니다》를 따라가다 보면 법정은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진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한 시대가 무엇을 옳다고 믿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책의 시작을 여는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농업의 미래를 위해 세계 곳곳의 종자를 수집하고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연구했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와 신념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적으로 몰리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과학이 결코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바빌로프와 리센코의 대립은 과학적 근거보다 정치적 이념에 부합하는 주장이 선택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책에서 바빌로프가 🔖“전 세계 수천 명 과학자들이 수십 년의 실험으로 쌓아 올린 진실”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진실은 누군가의 권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검증과 실험, 수많은 반론과 축적을 통해 조금씩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 권력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바빌로프 이야기에서 더 서늘하게 다가온 것은 그의 마지막 말보다도 그가 왜 처벌받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농업을 망치려 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근에 시달리는 조국의 농업을 살리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권력은 그의 과학적 주장을 검증하는 대신 그를 정치적으로 규정했다.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공간이 아니라 권력이 원하는 결론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 ‘법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역사를 돌아보면 법적으로 내려진 판결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 드레드 스콧 판결, 수전 B. 앤서니 재판, 헤이마켓 사건, 사코와 반제티 사건처럼 당시의 법과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한 사례도 있었다. 반대로 한 시대에는 논쟁적이었던 판결이 훗날 새로운 권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판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던졌고,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다.

특히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으로 얻어진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이 책 전체를 의미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너무 쉽게 사용하는 ‘권리’라는 단어 뒤에는 실제로 누군가의 싸움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하루 8시간 노동, 표현의 자유, 여성의 참정권, 노동자의 권리, 동성혼에 대한 법적 인정,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 기술과 창작물에 대한 지적재산권까지 지금은 제도와 법률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누군가는 체포되었으며, 누군가는 목숨까지 잃었다.

그중 헤이마켓 사건은 특히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건은 핑계에 불과했습니다.”라는 책 속 문장처럼, 폭력 사건 자체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한 사람들의 신념과 사상을 억누르려 했다는 점이 섬뜩했다.

법이 범죄를 판단하는 도구만이 아닌 특정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법과 정의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밀로셰비치 재판도 오래 생각하게 했다.
피고인이 판결을 받기 전에 사망하면서 법적으로 유죄라는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남겨진 증언과 기록은 이후 다른 전범들을 심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재판 기록은 남았습니다.”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한 사람에 대한 재판이 반드시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판결에 이르지 못한 재판조차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훗날 다른 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법정에서 남겨진 기록은 그 시대가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외면했는지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역사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다룬 허슬러 대 폴웰 사건 역시 흥미로웠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는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풍자와 패러디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모욕과 혐오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표현을 제한한다면 자유로운 비판과 풍자의 영역 역시 위축될 수 있다.

책에서 🔖“물론 판결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라고 이어지는 부분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중요한 판결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똑같이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하나의 판결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고, 그 논쟁이 사회의 기준을 조금씩 만들어 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법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에도 있다.
갈릴레이부터 바빌로프, 드레드 스콧, 헤이마켓, 뉘른베르크와 도쿄, 밀로셰비치, 전두환·노태우, 워터게이트,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허슬러 대 폴웰, 그리고 애플과 삼성으로 이어지는 특허 분쟁까지 사건의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서로 전혀 다른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옳다고 판단할 것인가?’

과학에서는 진실과 권위가 충돌하고, 정치에서는 권력과 정의가 충돌하며, 사회에서는 자유와 그 한계가 충돌한다. 기술의 영역에서는 창작과 독점 사이의 경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법정에 올라온 것은 사건 하나가 아니라 그 시대가 풀지 못했던 질문들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권리 역시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너무 급진적이고 위험한 주장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반대로 오늘 다수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 훗날에는 잘못된 통념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다수가 믿고 있으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멈춰서서 질문하는 일일 것이다.

정말 그런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침묵시키는가?
지금의 상식은 과연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가?

책의 에필로그에서 🔖“누군가는 말하지 못한 진실을 품은 채 홀로 분투하고 있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역사 속 재판을 읽는 일이 과거의 사건을 공부하는 일만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과거의 법정에는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 서 있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니 ‘법정의 문이 닫혔다’는 느낌보다 지금부터 내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이 다시 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지, 다수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법과 제도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세계의 법정을 열겠습니다》는 법정이라는 장소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권력을 진실보다 앞세울 수 있는지, 동시에 한 사람의 질문과 저항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의 ‘당연함’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만들어진 당연함을 그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옳은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정은 과거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오간 질문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을 읽고 이 한가지를 품게 되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

누군가의 용기 덕분에 지금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 역시
지금의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묻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_

#세계의법정을열겠습니다 #권재원 #북트리거
#사회 #역사 #사회학 #정치 #법 #판결문 #재판
#신간 #신간도서 #새로나온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