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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해학 - 인문학 그래픽 노블
폴 브리지.가에탕 브리지 지음, 이세진 옮김, 오느레 드 발자크 원작 / 학고재 / 2024년 10월
평점 :
오노레 드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방대한 사회 소설 총서인 '인간극'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문학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복잡한 계층 구조와 인간의 욕망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들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의 발자크는 사회 풍자와 해학을 통해 억압된 현실을 해방하고자 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 "발자크의 해학"을 집필했습니다.
"발자크의 해학"은 15세기 투렌 지방을 배경으로 한 풍속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자크가 존경한 프랑수아 라블레와 보카치오의 영향이 짙게 깃들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위 성직자, 귀족, 바람난 부인 등 다양한 인간상을 풍자와 유머로 풀어내며,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극'과는 다른 스타일로, ‘즐거움’ 자체를 문학적 가치로 승화한 작품입니다.
발자크는 문학이 단지 사회 비판이나 계몽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에게 유쾌한 해방감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발자크의 해학"은 억압된 욕망을 해방시키고, 규칙을 어긴 자들의 이야기로 독자에게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책은 ‘웃음’이라는 인간 고유의 특권을 활용해 슬픔과 회의를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극'에서 주로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적 현실과 인간 군상을 사실적이고 분석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발자크의 해학"은 15세기 투렌 지방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과장되고 해학적인 문체로 서술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욕망과 쾌락에 충실한 인물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제 욕망을 추구하지만, 예상치 못한 역습을 당하거나 처참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억압된 것의 분출’을 다루며 사회적 관습을 해체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또 하나의 발자크적 세계를 보여줍니다.
한스카 백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자크는 “나의 작품 중에 후세에 남을 만한 것은 '발자크의 해학'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발자크가 이 작품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쏟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웃음과 해학을 통한 위선의 폭로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그가 꿈꾸는 인간 해방의 한 형태로 여겨집니다. 또한 프랑수아 라블레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입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처럼, 책의 이야기들도 과장과 허세, 외설적 유머가 넘쳐납니다. 발자크가 라블레의 정신을 계승한 이유는 사회적 억압과 이성주의를 비웃고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웃음을 통한 치유와 해방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는 라블레의 영향을 받아 "포복절도는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는 말을 인용하며, 유머와 해학이 인류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구절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를 함축하고 습니다. 이처럼 작품은 사회적 통념과 억압을 뛰어넘어 웃음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발자크의 해학"에 담긴 이야기들은 욕망과 탐욕, 그리고 인간의 허영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미녀 앵페리아'에서는 고위 성직자들의 총애를 받던 창녀 앵페리아가 등장하고, '가벼운 죄'와 '원수 부인'에서는 오쟁이 진 남편들의 이야기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집니다. '악마의 상속자'에서는 오컬트와 민담적 요소가 결합된 서사가 흥미를 더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풍자가 아닌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사회의 위선을 비판하는 예술적 시도로 읽힙니다. 발자크는 욕망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폭발시키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적 억압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이와 동시에 욕망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와 역설을 유머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저자에게 욕지거릴랑 삼가주시기를, 그리고 낮보다는 밤에 이 배꼽 빠지는 이야기를 읽어주기를.”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이 단순한 문학적 가치에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경험이 되기를 원했다. 이 구절은 작가가 독자와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하는 유쾌한 초대를 의미한다.
“라블레가 말한 카리마리, 카리마라.”
삶의 불확실성과 갈등을 유쾌하게 넘기려는 발자크의 철학을 상징한다. 발자크는 웃음을 통해 삶의 모순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책은 폴과 가에탕 브리지 형제의 손길을 거쳐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했습니다. 형제는 원작에서 4편의 이야기를 골라 각색했으며, 시각적 연출과 캐릭터 디자인을 통해 발자크의 유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미녀 앵페리아'의 콘스탄츠 항에 세워진 '임페리아' 동상처럼,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재탄생하여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발자크의 언어적 유희와 유머를 잘 살린 그래픽 노블로, 고전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며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이는 단순한 각색을 넘어 고전의 정수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발자크의 해학"은 30편까지만 집필되고 미완으로 남은 작품이지만, 그 안에 담긴 해학과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발자크는 이 작품에서 15세기 지방의 풍속과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억압된 욕망을 해방시키는 해학의 힘을 보여줍니다. 발자크가 제시하는 인물들은 단순히 비도덕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억압된 사회적 규범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며, 이를 통해 문학은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이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 발달하기 전 소설이 가진 고유한 기능을 상기시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발자크가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가 아닌, 유머와 해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한 작가임을 보여줍니다. '인간극'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 본성의 진실을 탐구하며, 억압과 위선 속에서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웃음과 사색을 선사합니다.
발자크의 언어적 재치와 폴 & 가에탕 브리지의 그래픽 연출이 결합된 이 작품은 고전 문학이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고, 현대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미완의 프로젝트이지만, 그 안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이 책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것을 넘어, 웃음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탁월한 문학적 경험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