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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평점 :
김아인 작가의 "스파이라"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정신을 데이터화하여 제2의 삶을 제공하는 서비스 AE를 둘러싼 이야기는 단순히 미래 사회를 그린 공상 과학 소설을 넘어, 죽음과 삶, 영생과 현재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한 정신을 데이터화하여 죽음 이후에도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설정 속에서, 인간성,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의 배경은 에피네프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휩쓸고 간 세계입니다. 인류는 이 전염병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AE는 인간의 정신을 데이터화하여 죽음 후에도 가상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설정은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죽음이 더 이상 필연적이지 않은 세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발상은 단순히 디스토피아적 상황에서 영생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과연 유토피아일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소설은 죽음이 없는 삶이 과연 진정한 삶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소설은 AE의 영생 서비스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입장 차이를 다룹니다. 웨이쉬안이라는 주인공은 AE에서 반송체를 처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으며, 그의 연인 페이는 이 서비스를 거부하는 인물입니다. 페이는 AE를 통해 얻는 영생이 가짜 천국이라고 믿고, "가짜 천국 같은 곳에 목숨을 의탁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여깁니다 . 반면, 하라바야시 가스미는 AE의 기술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팬데믹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 보는 온건파였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쟁을 넘어, 인간이 기술에 어떻게 의존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다층적인 논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작품에서 눈에 띄는 요소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다룬 서정적 묘사입니다. 웨이쉬안과 페이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삶과 죽음, 기술과 인간성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담아냅니다. 특히, "나는 왜 그렇게 늘 불안했을까? ... 앞날만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야" 라는 페이의 말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염려하는 우리의 불안과 맞닿아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복잡성과 불안정성을 반영하며, 그 감정의 결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전염병과 기술 발전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우려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정신이 가상세계에 전산화되어 신체와 분리됩니다. '스파이라'라는 개념은 나선형으로 반복되는 삶과 기술 발전의 끝없는 순환을 상징하며, 영생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또 다른 형태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작품에서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 없는 삶이 과연 유토피아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AE라는 거대 기업이 제공하는 영생의 서비스는 일종의 가짜 천국으로 정신 전산화 기술을 통해 인류는 물리적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있지만, 삶의 의미를 스스로 상실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페이가 웨이쉬안에게 말한 “나는 앞날만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야”라는 문장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 페이는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소홀히 하는 삶에 대한 경고를 던지며, 죽음과 마주하지 않는 삶이 진정한 삶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정신 전산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를 침해하는 도구로 그려집니다. 이 기술이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다고 믿을 수 있지만, 그 선택조차 AE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웨이쉬안은 자신의 연인 페이가 정신 전산화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AE에 강제로 끌려갔을 가능성을 의심하며, 그 과정에서 기술과 기업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쉽게 조작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설정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경고로 다가왔습니다.
"스파이라"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기술이 인간의 삶에 깊이 들어오면서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의 본질과 의사소통의 방식이 변질되는 과정을 통해, 소설은 기술이 주는 편리함 뒤에 숨어 있는 위험성을 부각시킵니다. 예를 들어, 웨이쉬안이 페이를 떠나보내며 느낀 혼란과 슬픔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기술이 사랑하는 사람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공포를 반영했습니다.
웨이쉬안과 페이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의 소용돌이였습니다. 과거의 홍콩에서 보냈던 평온한 시간들에 대한 묘사는,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애절함을 자아내며,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 기억들은 좋다고 하기에는 차고 건조했고, 나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형형하고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는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잘 드러내는 문장이었습니다 .
이 서정적 분위기는 작품 전반에 깔린 디스토피아적 절망감과도 절묘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전염병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과 슬픔이 생생하게 그려지며, 특히 '스파이라'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책속으로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는 이처럼 웅장하고 정교한 세계관을 구축했으며, 그것을 통해 독자를 몰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냉각 캡슐이 빼곡히 들어선 나선계단 형태의 컨베이어 벨트 와 같은 디테일한 설정들은 소설의 현실감을 높이며, 독자가 마치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로맨스와 스릴러가 결합된 긴장감 있는 서사는 독자의 흥미를 끝까지 유지시키며, 한편의 영화 같은 몰입감을 선사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미래, 죽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가는 이 질문을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SF라는 장르 속에 녹여내고, 독자들에게 깊은 사유를 이끌어냈습니다.
아름답고도 먹먹한 서정과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적 요소를 동시에 갖춘 이 소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의 선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지는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