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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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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진다.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소개받은 책이 아니라면 읽어보지 않았을 책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라벨은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책의 표지가 된 이 그림은 소설 전반을 꿰뚫는 그림이다. 그림 중앙의 왕녀 마르가리타, 그녀를 받드는 시녀와 어릿광대. 이 소설은 한명의 왕녀를 떠받들며 시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파반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위 그림(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3명의 시녀들 중 오른쪽 맨 끝에 자리한 아주 못생긴 여인, 하지만 자꾸 그 여인이 화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20살에 만났던 그녀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뒤늦게 인기배우가 된 잘생긴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였다. 성공을 거머쥐자 아버지는 결국 화자의 가족을 떠나 유명한 여배우와 결혼을 했고,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 속에 삶을 이어갔다. 작가의 꿈을 꾸던 화자는 20살이 되던 1986년에 대학진학을 잠시 보류한 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생의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불온한 청춘의 시기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던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 누구도 쳐다보기 싫어하던 못생긴 그녀를 만난다. 주인공은 외모콤플렉스로 필요이상으로 수줍음을 타고, 낯빛이 어둡던 그녀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느꼈고, 곧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알아갈 수록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박학다식했고, 예술분야에서도 감각이 탁월했다. 서로를 사랑했고, 즐거웠으며 늘 함께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외모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의 상처를 입고 화자의 곁을 떠난다.

  외모콤플렉스가 어떻게 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순히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발전과 함께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 차, 또 집,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328) 1980년이었다. 자신의 외모가 자신의 삶을 어둡게 했던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에게도 같은 피해를 줄 것이라 생각하니 떠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 그림 속 뽀얀 왕녀 마르가리타와 못생긴 시녀의 대비처럼 이 소설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부함과 가난함”, “능력과 무능력” 등이 잠재하고 있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할수록 자신의 빛을 잃게 되는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며 1%의 스타를 만들어내는 99%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속에 담겨있다.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빛을 되찾게 할 유일한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작가는 고린도전서를 인용하며 사랑은 온갖 희생과 손해를 요구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빛이요 힘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맺는다.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을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대책 없이 강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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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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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 이야기

[ 다섯 수레의 책 , 책을 대하는 태도 ]

, 어떻게 읽어야 할까

[ 꼼꼼히 읽을까, 많이 읽을까, 꾸준히 읽어야 힘이 생긴다, 소리 내서 읽어라, 읽고 또 읽어라, 읽으면서 기록해라, 통째로 외워라,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라, 책읽기에도 순서가 있다, 의심하고 의문을 품어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 ]

책 아닌 것이 없다

[ 책과 하나가 되어라, 깨달음의 순간과 만나라, 책 아닌 것이 없다]

 

 

  일 년 중 가장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언제인가? 가을이라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오히려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쁠 때, “아 여유롭게 앉아 책이나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여유로우면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보다는 나가서 놀 생각이나 한다. 문제는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은 손쉽게 책 읽는 방법이나 그러한 습관을 들이는 방법을 소개하기보다는, 책 읽기에 요구되는 바른 자세가 어떤 것인지 말해준다.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헌에서 정통 독서의 맥을 짚고, 책과 책 읽기의 참뜻을 다시 묻는다.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여러 권의 책을 읽기도 했지만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조선 중기 문인 김득신은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린 백이열전伯夷列傳이란 글을 너무 좋아해서 평생 11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는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에 대해 각각 읽은 횟수를 기록해서 독수기讀數記라는 놀라운 글도 남겼다.(83) 김득신은 어렸을 때 무척 머리가 나빠서 가르쳐 주면 금세 잊어버리곤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도 저렇게 머리 나쁜 아이는 처음 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지만, 그의 아버지가 실망하지 않고 아들이 깨우칠 때까지 몇 번이고 가르쳐주었다. 정민 선생은 책을 읽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효과를 보려면 꾸준히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어려운 책을 한 번 읽고도 줄줄 외웠다는 천재들의 글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바는 거의 없다. 공부는 머리보다 엉덩이로 하는것이 라고 말한다.(89)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책을 읽다가 재미난 내용이 있으면 즉시 공책에 베껴 쓰는 메모광이었다. 이덕무는 공부를 하다가 새로운 생각이 문득 떠올라도 글로 적어두곤 했다. 나중에 그런 메모만 다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는데, 책 제목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모두 글로 적어 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덕무는 집안이 가난하고 서얼신분이었지만 온전히 독서의 힘만으로 자기의 조건이나 환경을 뛰어 넘었고, 정조임금에게 무려 500번도 넘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생각은 떠올랐다가 사라지지만 그 생각을 메모하여 붙들어 놓으면 기록이 된다. 그러기에 정민 선생은 책을 읽을 때 늘 곁에 공책과 펜을 놓아두고 메모하며 읽는 습관을 들여 작은 생각을 큰 생각으로 자라게 하라고 권면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책을 읽다 말고 바닥에 집어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이깟 책을 읽어 본들 무슨 소용이야! 책만 덮으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여보게! 그렇지가 안네. 자네가 밥을 먹더라도 그 밥이 뱃속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똥이 되어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밥 속의 정채로운 기운이 자네의 육신에 힘을 주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한다네. 책을 읽고 나서 즉시 잊어버린다 해도 알게 모르게 자네에게 영양분을 주고 있는 것일세. 조금씩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는 법이라네. 그런 말 말고 열심히 읽게나.”

[140,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

 

  오늘날 책읽기는 다른 매체의 발달로 인해 중요성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도구들이 빠른 학습 효과를 준다고 자랑하지만, 정민 선생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에게서 인내심과 단계적 노력의 중요성을 빼앗아간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어찌 보면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독서법이지만 독서는 뜻밖의 위력을 나타낸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책을 통해 깨달은 바는 읽기전과는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한다.

  리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수도사의 독서를 소개한다. “(수도사들은)독서행위 자체가 직접적으로 삶을 형성한다고 믿으면서, 하나의 특정한 독서 방법을 실천했다. 이것은 되풀이하여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통해서 도덕적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서양에 있어서 가장 일관되고 포괄적이며 가장 오래 지속된 시도였다. 독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의 바람직한 변환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활동의 하나였다.”

  수도사들은 단순히 지식축적이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독서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바람직한 변환을 이루기 위해, 즉 수도의 한 갈래로서 독서행위를 하였다.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읽었으며, 몸을 흔들거나 소리를 내서 읽었다. 수도사의 독서행위를 통해 얻는 지혜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책이 나의 존재를 바람직하게 변환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책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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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은혜를 만나다 - 아이에게 은혜를, 부모에게 힐링을!
엘리즈 M. 피츠패트릭.제시카 톰슨 지음, 박상은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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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탄이 도시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은 이미 반세기도 더 전에 장로교의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 목사가 주일 설교에서 이야기한바 있다. 만약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접수한다면 모든 술집이 문을 닫고, 음란물이 사라질 것이며, 깨끗해진 거리에는 서로 미소를 건네는 단정한 옷차림의 보행자들이 가득할 것이다. 욕설을 입에 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어린이들은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주일마다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 다만 그 가운데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10)

이 책의 서문에 인용된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서두이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세상이지만 예수가 없다면 과연 그곳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이라 할 수 있을까? 문제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라는 구세주가 필요할까?
  오늘날 신앙교육은 신앙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나 복음 없이도 가능한 도덕과 윤리에 머무를 때가 많다.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의 말에 순종을 잘하거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며 좋은 성적을 내고 교회에서나 학교, 가정에서 모범적인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라”, “악한 것은 하지 말라”, “착한 아이가 되라”고 말한다. 과연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신앙교육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자녀교육을 할 때 신앙으로 교육하고자 하지만 때로 신앙이라는 가면을 쓴 도덕과 윤리의 교육, 율법적 교훈에 머무르며 스스로 만족하는 (또는 기대처럼 되지 않아 좌절하는) 부모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유치부 예배 때 조용히 앉아 설교도 잘 듣고 기도도 바른 태도로 잘했던 그 아이가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이 되면 신앙을 버리고 세상에 속하고자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성장기에 겪는 신앙통증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을 때가 참 많다. 왜 자녀들은 부모의 헌신적인 기도와 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그렇게 쉽게 포기한단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자녀들 중에 성장과정에서 부모를 통해 제대로 복음(하나님의 자비, 인간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들어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한 은혜’보다는 옳고 그름에 기초한 율법적 가르침으로 자녀들을 통제하고 순종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예수님을 모르는 ‘착한’아이, 훗날 예수님이 아니어도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된다. 참 잘했어요! 라고 쓰여 있는 스티커를 나누어주는 것은 자녀에게 착하게 행동해서 엄마아빠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일러주어, 그들을 늘 인정받고 싶어 애쓰는 사람들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준다.(67) 이런 식의 방법은 자신의 성공이나 구원이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구원을 주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혜)을 가르치는 것이 칭찬 스티커보다 중요한 것이다.
  규칙과 질서가 있어야 안정이 되는 세상 속에서 사랑의 법이 규칙과 질서보다 중요한 것을 가르치려면, 먼저 부모가 은혜를 맛보아 알아야 한다. 부모도 자녀들처럼 죄인이며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존재들이다. 자녀의 못된 행동을 보게 될 때면 화가 치밀고, 순간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보다는 매를 들어 혼내는 것이 편하고, 규칙을 세워서 어긋나면 벌을 줄 수 있도록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잘못된 행동하는 자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은혜를 전할 방법과 말을 구하는 것이다. 자녀를 변화시키는 것은 부모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연약함보다 강하고, 우리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은 때 온전해 진다.(고후12:9)
  이 책을 부모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신앙교육에 대한 방법이 획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은혜”로 자녀 교육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녀교육 방식이 훌륭하면 훌륭한 자녀를 배출한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우리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육아에 지쳐있고, 어떻게 자녀를 복음적으로 양육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율법서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에 근거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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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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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진다.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소개받은 책이 아니라면 읽어보지 않았을 책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라벨은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책의 표지가 된 이 그림은 소설 전반을 꿰뚫는 그림이다. 그림 중앙의 왕녀 마르가리타, 그녀를 받드는 시녀와 어릿광대. 이 소설은 한명의 왕녀를 떠받들며 시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파반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위 그림(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3명의 시녀들 중 오른쪽 맨 끝에 자리한 아주 못생긴 여인, 하지만 자꾸 그 여인이 화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20살에 만났던 그녀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뒤늦게 인기배우가 된 잘생긴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였다. 성공을 거머쥐자 아버지는 결국 화자의 가족을 떠나 유명한 여배우와 결혼을 했고,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 속에 삶을 이어갔다. 작가의 꿈을 꾸던 화자는 20살이 되던 1986년에 대학진학을 잠시 보류한 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생의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불온한 청춘의 시기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던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 누구도 쳐다보기 싫어하던 못생긴 그녀를 만난다. 주인공은 외모콤플렉스로 필요이상으로 수줍음을 타고, 낯빛이 어둡던 그녀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느꼈고, 곧 못생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알아갈 수록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박학다식했고, 예술분야에서도 감각이 탁월했다. 서로를 사랑했고, 즐거웠으며 늘 함께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외모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의 상처를 입고 화자의 곁을 떠난다.

  외모콤플렉스가 어떻게 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순히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발전과 함께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 차, 또 집,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328) 1980년이었다. 자신의 외모가 자신의 삶을 어둡게 했던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에게도 같은 피해를 줄 것이라 생각하니 떠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 그림 속 뽀얀 왕녀 마르가리타와 못생긴 시녀의 대비처럼 이 소설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부함과 가난함”, “능력과 무능력” 등이 잠재하고 있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할수록 자신의 빛을 잃게 되는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며 1%의 스타를 만들어내는 99%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속에 담겨있다.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빛을 되찾게 할 유일한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작가는 고린도전서를 인용하며 사랑은 온갖 희생과 손해를 요구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빛이요 힘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맺는다.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을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대책 없이 강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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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 이어령 바이블시학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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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많은 사람이 놀랐다. 딸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지만, 그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본다면 결정적인 사건 이전부터 영적인 허기와 정신적인 허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종교 중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본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이며, 예수님의 이웃사랑과 그 실천에 대해 배우고 했고, 죽음과 생명 사이에 놓인 우리의 과도기적인 삶을 새롭게 살고자 했다.

 

  이어령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의 은 의식주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늘날 물질주의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지상에 발 딛고 살지만 끊임없이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 삶의 왜소함을 성서 속의 천상의 말씀,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살찌우고자 한다. 성서는 지상에 묶인 삶을 천상의 것으로 환원시켜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바이블Bible의 어원은 비블로스Biblos이라는 뜻이다. 성서는 기독교인들만 읽는 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문화도 많이 다르고 성서의 표현도 해석의 어려움이 있기에 저자는 일상과 성서 간의 격차를 좁히고자 문학적 레토릭과 상상력, 문화적 접근을 시도했고, 그 노력의 산물이 바로 이 책이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어 TV를 사고, 유흥문화와 퇴폐하는 세상의 흐름을 쫓는 사람들에게 분명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세계의 생명이야기를 전한다.

 

 “성서는 종교 이전에 모든 사람들의 시요, 소설이요, 드라마이며, 생생한 철학이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같이 읽을 수 있는 성경, 우리가 쓰러졌다 일어서는 법과 미움을 넘어서는 사랑의 수사법과 등 돌린 사람을 포옹하는 너그러운 몸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11)

 

1육체의 굶주림보다 영적, 정신적 허기에 시달리는 인간. 눈물과 땀이 없이는 한시도 지상에서 살 수 없는 치열한 삶과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육체의 허기보다 정신과 영혼의 허기가 알고 보면 더 급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빵 이상의 가치, 진짜 기적은 영원히 사는 빵을 먹는 거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였습니다”(40)

 

2빵만으로 살 수 없다면 무엇으로 살 것인가? 몸의 한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영원의 집이 됨을 역설한다. 분명 존재하지만 본적이 없는 세계를 온라인상의 세계(사이버 세계)에 접속하는 것으로 비유하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몸집이 집으로, 그 집이 점점 더 넓어져서 영원의 집이 되고 그것이 성전, 성막이 되어가려면 우리 몸집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돼지 집이라도 영원의 집’,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119)

 

3앞뒤가 맞지 않고 비논리적인 듯한 성서의 이야기. 그러나 피가 통하는 생명의 이야기. 의미를 따지고 들면 빈틈없이 앞뒤가 들어맞는 성경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 포도원 농부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이야기 등등)

성경은 겉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그 의미를 따지고 들면 빈틈없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 기독교는 도그마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피가 통하는 생명의 이야기로 읽어야지요. (...) (예수님의)비유가 인간의 상상력의 결과인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만 말할 수 있는 수사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84-186)

 

4욥 이야기를 통해 형식논리를 초월한 세계에서 만난 하나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이해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한다. 또한 성경에 나온 독수리는 육체적인 젊음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젊음, Born again(다시 태어남, 거듭남)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마주침,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끝없이 뻗어나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은 오로지 딱 한 번 만날 뿐입니다. 그것처럼 지구상에서 딱 한번만 일어나는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권력, 돈으로 못할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오만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것을 일깨우려 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만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됩니다. 그게 사람에 따라 빠를 수도, 늦을 수도 있는거지요. 저는 인생의 막판에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고 하는 사람입니다.”(330)

 

 

<성서, 나를 읽는 책>을 쓴 한스R.베버 목사는 성서는 내가 읽지만 내가 읽는 대상으로의 책이 아니다. 나의 믿음과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나를 대상으로 읽어 주시는 책이다. 이것이 성서읽기의 신비요,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성서는 저 멀리 이스라엘의 이야기나 그 옛날 예수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이다.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성서. 성서가 모든 사람들의 책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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