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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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현암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럴 자유는 있다.
하지만 어떤 자유와 그로 인한 행동은 왜 마음에 걸리는 걸까?


길었던 억압과 통제, 제한의 시대에서 벗어나, 더 이상 구속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물론 특정 국가나 문화에선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오늘 마주한 몇 건의 기사 역시 그랬다. 한 기사에서는 중국의 SNS 샤오훙수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문화를 훔쳐 가고 있다는 날조 영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기후 위기는 점점 심각해져 가는데, 어제는 SNS에서 자신이 만든 물건을 전량 폐기하는 ─ '장인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쓰레기 생산의 ─ 영상을 보고 말았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 할까?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는 노골적이고 가시적인 억압이나 통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유'가 가지는 그 자체를 논의하고 우리가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와 부자유, 그리고 야기되는 사회적 혼란을 이야기한다.


'프리덤'과 '리버티',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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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과 리버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프리덤'이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능력과 권한을 의미한다면, '리버티'는 작위적인 제약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의 권리도 고려한다. 때문에 '리버티'는 행사자의 능력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며, 타인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

─ P.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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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그저 '자유'라는 단어 하나만 존재하지만, 자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지젝은 '프리덤'과 '리버티'로 두 가지 자유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시작한다. 하나의 예시로 등장했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미국의 백신 반대자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했던 것은 그들이 누린 자유로 타인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프리덤'이 된다. '표현의 자유'로 확산되는 수없이 많은 글들도 때로는 '프리덤'에 속하게 된다.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가장 위험한 것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다."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룬 다음, 지젝은 '자유'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다양한 사례들을 들며 지적한다. 가상의 재화와 암호화폐에 열광하는 젊은 사람들, SNS를 통해 상품으로 권해지는 경험들, 나의 성향에 맞게 콘텐츠를 보여주는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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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슬루카의 명료한 공식에 따르면, "하루 중 가공된 환경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삶 자체는 더욱 상품으로 변한다. 누군가 그것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구매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된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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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롭게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만 사실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책은 영화나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 물리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생물 유전학 등 분과학문을 넘나들며 텍스트라는 어원이 가진 '직물'처럼 논리가 촘촘히 짜여있다. 이 한 권의 책은 마치 직물 공예처럼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 되는데, 그 그림은 우리가 미미하게는 느끼고 있지만, 너무 모호해서 달리 설명이 안되는, 이 시대가 가진 '자유'의 역설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지젝의 지적 수준에 얼핏 보면 어려운 책이라 느껴질 순 있어도, 현재의 시대를 담고 있어 아주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도한 향유 속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는 '자유'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지배받고 있지는 않은지 그가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로 세상을 돌아봐야 할 때이다. 모두에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안 읽어볼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부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이 책을 받을 무렵 나는 앤절라 첸의 『에이스』와 아사이 료의 『정욕』을 다시 읽고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들어가는 말에서 '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한다. 『에이스』에서는 성애를 갖지 않음을 뜻하는 '무성애'라는 개념을 까다로운 체크리스트를 통과하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는 언어의 집으로 구축한다. 하지만 『정욕』에서 등장한 물에 대해 성적 욕구를 느끼는 '물 성애자'의 등장,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적당한 언어인 '수도꼭지 절도범' 혹은 '소아성애'로 환원되어 기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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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라고 지시받지 않는다.

지만 우리가 온전히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그 선택을 자신의 운명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에 빠진 이유를 타인에게 설명하지만 그 이유들은 사랑에 빠진 이후에 알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는

편안한 외부자가 될 수 없다.


─ P.18, 「들어가는 말」

/


'물 성애자'라는 기표가 등장해버린 문학적 세계관, 어쩌면 실제로 어디선가 은밀히 잠재하는 '비유기적 존재'에 대한 성애를 지젝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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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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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출판사에서 지난 8월에 처음 국내에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를 선보이고 수개월 뒤, 우연히 읽게 된 브리드라는 잡지에서 해즐릿에 대한 짧은 소개를 마주쳤다. 이토록 유명한 작가인데, 한국에 본격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소개된 건 겨우 작년에 불과하다니. 그런 에세이스트 해즐릿의 두 번째의 에세이,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가 출간되었다.


공화주의자 해즐릿

해즐릿만의 논리와 문체는 여전히 강렬하고 신랄하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모두 까기에 이어, 「패션에 관하여」에서는 겉만 화려할 뿐, 정신은 공허한 유한계급의 '패션'과 거짓 우월성만을 쉽게 모방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뒤를 이어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에서는 타인의 권력을 숭배하며 아첨하는 이와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를 겨냥한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한결같은 신랄함과 대조되는 몇 편의 에세이도 있었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는 삶과 인간에 대한 해즐릿의 따뜻한 시선이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도 있었는데, 「미술가의 노년에 관하여」에서는 노년을 맞이한 베테랑 예술가를 온화하게 바라보고,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에서는 우리들의 인생을 긍정해 준다. 공화주의란 '모두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적 이익과 공동체의 안녕을 중요시하며 각각의 개성은 귀족이나 평민 등으로 다를 수도 있으나 공동체의 입장에서 모두 공화적 개념인 국민이나 시민의 미덕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말한다. 공화주의자 해즐릿이 한결같이 비판하는 대상은 적어도 모든 인간들은 아니었다. 해즐릿은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가면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문장에 '가면 뒤에 숨은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며 한발 물러나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유예를 두는데, 사실 해즐릿은 그 누구보다도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요즘 시대에 필요한 해즐릿의 애티튜드

자본주의가 후퇴하기는커녕 점점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해즐릿의 태도가 필요하다.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를 읽으며 누군가가, 또는 최근의 상황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지금보다 더 부당하고 잔인한 처우를 당할 수 있었을 시기에 해즐릿은 펜촉을 권력가에게 겨눴다. 이런 글 솜씨라면 해즐릿은 어용학자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안녕과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라는 신념 하나만을 고집했기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에세이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논리나 삶처럼 우리들에게도 돈이 아무리 중요한들 결코 꺾이지 말아야 할 모두를 위한 신념이 필요하다.

당대 최고의 에세이스트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의 주장에 맞춰 전개되는 논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빛을 따라가며 글을 쓴다는 것이 궁금하다면 해즐릿의 에세이가 좋은 예가 되어줄 것이다.






+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를 읽으며 또 한 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린다.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서 '눈에 보이는 물체보다 소리와 냄새, 때로는 맛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어쩌면 연상의 사슬에 더 좋은 고리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해즐릿의 문장이 어쩌면 그 유명한 맛과 향기로 과거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프루스트 효과'의 탄생에 영향을 준 건 아닌지. 또 해즐릿이 저 너머에 있을 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는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한 부분을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이름과 고유명사에 대한 몽상을 했다던 주석의 설명이 동시에 떠오른다. 프루스트가 해즐릿에 영향받았다던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러한 주장은 나의 공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다.



시간은 고통의 침을 뽑아 준다. 슬픔을 생각과 격정의 보존액에 계속 담금질하면 그 본질이 변형된다. 원래 가졌던 인상은 우리가 소망을 투영했다는 흔적만을 남긴다. - P57

지극히 보잘 것 없던 일들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먼 관점에서 뒤돌아보면 회상에 회상을 거듭하면서 확대되고 풍요로워지며 급기야 흥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독했던 고통도 시간에 의해 부서져 결국 가라앉는다. - P59

우리는 황량한 허무보다는 수많은 희망과 두려움으로 동요되고, 가지각색의 기쁨과 슬픔으로 다채로우며, 움직임이 있고 번잡한 이 삶이라는 풍경에 더 많은 흥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무어라도 된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낫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흥미를 가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 P88

인간의 마음은 어딘가 기댈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부심이나 즐거움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면 인간의 마음은 고통과 사랑에 빠지고 압제에 매혹된다. 그 마음은 부와 권력의 무정한 손아귀가 앗아간 자유와 행복, 안락과 지식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고 가난한 채무자는 권력자가 과시하는 모습을 질시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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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기억·서사 교유서가 어제의책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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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좋아서 전자책으로 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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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하는 일
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권진희 옮김 / 사람in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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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야 크게 가리는 것 없이 책을 읽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만화책 아니면 오로지 흥미 본위의 오락 소설만 읽었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로 환상 문학에 눈을 떴고,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으로 공포 소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만화풍 그림 표지에 삽화도 있는 라이트노벨도 읽었다. 사건이 명확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고, 누군가 감상을 물어본다면 "재미있었다" 외에는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책들에 나는 더 익숙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며, 어릴 때에는 잘만 읽었던 '소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소설과 지금 읽는 소설이 많이 달라진 탓도 있겠지만, 국어 수업 시간에 어떤 식으로 문학을 접했었는지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쉽게 떠오른다. 나는 때로 모호하거나 난해한 소설들을 접하며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누군가 하나의 명확한 답을 내려주기를 원했다. 마치 국어 수업 시간에서 문학을 접했던 것처럼. 한동안 내가 평론가의 글이나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으리라. ​

─ 작가 조지프 엡스타인의 에세이, 『소설이 하는 일』은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에 대해 깊게 파고든다. 저자는 오랜 기간 소설을 읽고, 소설과 관련된 강의도 하며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총 18개의 주제로 이야기한다.


​나의 오래고 묵은 고민, 소설을 읽을 때의 고민에 대해 좋은 답이 되어줄 것 같아 집어 들었다. ​소설의 행간에서 무언가 느끼려면, 우리는 어떤 것들을 확인해야 하는가. ​─ 이 한 권의 에세이는 '소설 읽기'에 대한 하나의 강의를 듣는듯한 느낌을 준다. 책은 '소설 읽기'를 통해 우리가 변화하는 방식을 짚어주고, 때로는 우리가 이 형식에 너무도 익숙해 무감각해져버린 소설의 요소들 ─ 등장인물, 플롯, 심리, 사건 등 ─ 을 다루며 독자에게 '소설 읽기'의 감각을 새롭게 불어넣어 준다. ​저자가 왜 3인칭이 아닌 1인칭 시점을 선택했는지, 왜 몇몇 중요한 장면을 더 극화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어떤 장소에서는 복선을 만들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그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에서 등장인물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행간을 읽어나가며 달라지지는 않았는가. ​저자는 인생의 여러 단계마다 우리는 소설에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의 소설을 다른 나이에 다시 읽는 즐거움도 강조한다. ​─ 열거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우리들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로 소설이다. 하지만 16세기부터 등장한 대량 인쇄술로 시작한 소설이라는 형식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무감각해지고 익숙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하나의 답만 정해진 국영수만 좇다 보니 잊고 살지 않았나, 사람들로 구성된 우리의 세상은 굉장히 미묘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이러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잘 쓰인 한 권의 소설이다. 굳이 '소설 읽기'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 ─ 글쓰기와 책 읽기에 대해 쓴 많은 작가들은 '고전 읽기'를 강조한다. 때론 오락 본위의 소설들을 읽는 것을 허튼짓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기성세대 독서인들이 '고전 읽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오락 본위의 소설 속에서 한참을 빠져있는 독자들은 늘 존재하지 않는가. 어린 나이일수록 특히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저자 역시 어릴 때는 힘 안 들이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선호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말했듯 나 역시 고전은 전혀 읽지 않았다. ​23쪽에서 저자는 소설에도 영화처럼 읽기에 적절한 나이를 나타내는 등급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고전에서 서술되는 미묘한 심리나 사회상, 철학적 메시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가 아직 충분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텍스트에 불과하다. ​기성세대가 오락 본위의 소설들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도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세상에 등장해 버린 것들을 다시 추방하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오락 본위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다. ​그렇게 독자들이 텍스트 읽기를 즐기다가 어느 날 진지한 소설을, 아주 모호하고, 아주 혼란스럽고, 아주 어려운 그런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면 이 책이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

어쩌면 부적절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번역 속에서도,

가넷만큼의 러시아어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도 러시아 대문호들의 위대함은 드러났다.

그리고 품질이 낮은 번역 속에서도 그 위대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면

그 대상은 위대한 소설가라는 정의일 수도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했다.


─ P.87


책 번역의 질적인 문제는 늘 존재한다.

이 책도 솔직히 말해 번역이 아쉽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주어는 있는데 긴 인용구 때문에 문장을 마무리하는

서술어가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자주 보였다.

번역이 아쉬워 책을 덮기도 했고,

번역이 아쉽다는 후기에 내려놓는 독자도 봤다.


낮은 품질의 번역이어도 내용이 괜찮다면 상관없을까?

좋은 책,

하지만 번역 품질이 중요한 독자에게는 권하기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최고의 소설이 제공하는 지식은 열거할 수 있는 지식도,
엄격한 시험을 전제할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덜 제한적이고 더 넓고 더 깊은 소설의 주제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이며,
아주 각양각색으로,
가끔 혼란스러우면서 겸허한 형태를 갖춘다.
훌륭한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교육에 관한 최고의 정의와 궤를 같이한다. - P31

정치적 올바름이 문화에 대해 제멋대로 질주하게 계속 놔두면, 정치적 올바름은 소설의 비평, 더 나아가 다른 문화 분야나 교육 분야에서 의견이 다른 비평을 파괴하기도 한다. 남성이 어떻게 여성이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백인이 어떻게 흑인이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이성애자가 어떻게 동성애자가 쓴 소설을 비평하는 게 가능할까? - P146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슈라이버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훨씬 더 미묘하다.
더 애매모호하고 더 우회적이다.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약간 어려워야 한다.
단, 메시지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메시지는 대개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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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름 붙이기 (어나더커버) -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
존 케닉 지음, 황유원 옮김 / 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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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수업 중에 '짜증 난다'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한다고 이야기했다. '짜증'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뭉뚱그려져 있기 때문에, 내 안의 다채로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최근 한국의 부모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다양한 감정의 표현을 교육하는 육아 활동이 대세이기도 하다.

나, 너, 우리,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은 마치 포토샵의 색상 피커처럼 참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동안 내 마음을 얼마나 온전하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는지 곱씹어 보면 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 색의 삼원색처럼 단순했지만...

누군가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다른 누군가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여 표현하고자 한다.

2009년, 존 케닉은 불완전한 언어의 빈틈을 메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직 이름 없는 감정들에 하나하나 이름 붙여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나라는 개인은 찰나의 순간에 느낀 모호했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도, 아니 되려 인식조차 하지도 못했었는데 저자의 생각과 그에 대한 집요함에 마침내 온전한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는 윌북 출판사를 통해 『슬픔에 이름 붙이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제롬 케이건은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라는 책에서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독자에게 첫 질문을 던진다. 물론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게 그 장에서의 주된 골자였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반증하듯이, 존 케닉은 세상의 언어들을 최대한으로 끌어와 조합해 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Mamihalpinatapai라는 단어가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 있는데, 그 단어처럼 어느 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이지만 다소 복잡한 무언가에 대한 것을 한 데 모아 엮은 책인 줄 알았는데 직접 만든 단어들이라고 한다. (※mamihlapinatapai: (명)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굳이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은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하여 해 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

책의 부제인 「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이라는 문장답게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단어와 뜻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의 뜻을 확인하기 위하여 종이 사전들을 재빠르게 손으로 뒤적거렸던 때가 떠오르지만, 그때와는 달리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오래 음미하게 된다.

모호한 감정들은 텍스트화되어 우리는 이런 감정도 있음을, 있었음을 인식하고, 지나간 세월을 반추해 본다.

나 역시 이 감정을 살면서 한 번쯤 느껴보지 않았던가, 하고.


일부 감정 단어에는 저자가 애정을 담아 쓴 글이 있는데, 스스로와 우리네 삶에 대한 글이라 그런지 나에 대입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이 그저 단어와 뜻만 있었더라면 분명 아쉬웠을 텐데, 이렇게 중간중간 삽입된 에세이가 책을 더 풍성하게 해준다.

개념을 만들어내는 순간 실재는 방을 떠나고 만다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확인받고 싶고 복잡한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건 사람의 본성일까?

아니면 나만의 집착일까?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기에는 좋다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이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함께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그런 대담(對談)을 말이다. 또, 오래 곁에 두다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을 이 책으로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 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

예전에 서평단으로 받아봤던 책이었지만, 좋아서 굳이 다시 사는 수고를 한 책.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도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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