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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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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현암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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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럴 자유는 있다.
하지만 어떤 자유와 그로 인한 행동은 왜 마음에 걸리는 걸까?
길었던 억압과 통제, 제한의 시대에서 벗어나, 더 이상 구속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물론 특정 국가나 문화에선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오늘 마주한 몇 건의 기사 역시 그랬다. 한 기사에서는 중국의 SNS 샤오훙수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문화를 훔쳐 가고 있다는 날조 영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기후 위기는 점점 심각해져 가는데, 어제는 SNS에서 자신이 만든 물건을 전량 폐기하는 ─ '장인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쓰레기 생산의 ─ 영상을 보고 말았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야 할까?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는 노골적이고 가시적인 억압이나 통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유'가 가지는 그 자체를 논의하고 우리가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와 부자유, 그리고 야기되는 사회적 혼란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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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과 '리버티',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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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과 리버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프리덤'이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는 능력과 권한을 의미한다면, '리버티'는 작위적인 제약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관련된 모든 이들의 권리도 고려한다. 때문에 '리버티'는 행사자의 능력에 따라 범위가 달라지며, 타인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
─ P.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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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그저 '자유'라는 단어 하나만 존재하지만, 자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지젝은 '프리덤'과 '리버티'로 두 가지 자유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시작한다. 하나의 예시로 등장했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미국의 백신 반대자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했던 것은 그들이 누린 자유로 타인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프리덤'이 된다. '표현의 자유'로 확산되는 수없이 많은 글들도 때로는 '프리덤'에 속하게 된다.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동은 '프리덤'인가 '리버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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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것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누리는 비자유다."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룬 다음, 지젝은 '자유'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다양한 사례들을 들며 지적한다. 가상의 재화와 암호화폐에 열광하는 젊은 사람들, SNS를 통해 상품으로 권해지는 경험들, 나의 성향에 맞게 콘텐츠를 보여주는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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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슬루카의 명료한 공식에 따르면, "하루 중 가공된 환경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삶 자체는 더욱 상품으로 변한다. 누군가 그것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구매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된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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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롭게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만 사실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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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영화나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 물리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생물 유전학 등 분과학문을 넘나들며 텍스트라는 어원이 가진 '직물'처럼 논리가 촘촘히 짜여있다. 이 한 권의 책은 마치 직물 공예처럼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이 되는데, 그 그림은 우리가 미미하게는 느끼고 있지만, 너무 모호해서 달리 설명이 안되는, 이 시대가 가진 '자유'의 역설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한다. 지젝의 지적 수준에 얼핏 보면 어려운 책이라 느껴질 순 있어도, 현재의 시대를 담고 있어 아주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도한 향유 속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는 '자유'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지배받고 있지는 않은지 그가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로 세상을 돌아봐야 할 때이다. 모두에게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안 읽어볼 자유'라는 이름으로 거부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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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을 무렵 나는 앤절라 첸의 『에이스』와 아사이 료의 『정욕』을 다시 읽고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들어가는 말에서 '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한다. 『에이스』에서는 성애를 갖지 않음을 뜻하는 '무성애'라는 개념을 까다로운 체크리스트를 통과하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는 언어의 집으로 구축한다. 하지만 『정욕』에서 등장한 물에 대해 성적 욕구를 느끼는 '물 성애자'의 등장,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적당한 언어인 '수도꼭지 절도범' 혹은 '소아성애'로 환원되어 기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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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라고 지시받지 않는다.
지만 우리가 온전히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그 선택을 자신의 운명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에 빠진 이유를 타인에게 설명하지만 그 이유들은 사랑에 빠진 이후에 알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는
편안한 외부자가 될 수 없다.
─ P.18,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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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성애자'라는 기표가 등장해버린 문학적 세계관, 어쩌면 실제로 어디선가 은밀히 잠재하는 '비유기적 존재'에 대한 성애를 지젝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