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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와
유희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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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위즈덤하우스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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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필사를 즐기지만, 최근 여러 이유로 구매에 소극적이게 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가격에 비해 글이 너무 적어서.
두 번째, 내가 왼손잡이라서 책에 글을 잘 안 쓰게 돼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만년필과 잉크로 필사를 즐겨 하는데 대체로 책의 종이가 버티질 못해서.
이 세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니 궁금한 필사 책이 눈에 들어오더라도 일단 구매를 보류하게 된다. 그냥 책 읽고 내가 직접 문장을 수집하지 뭐, 만년필 버티는 노트에, 같은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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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하우스의 필사 책 기강 잡기
위즈덤하우스에서 다양한 필사 책이 나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온 두 시인의 필사 책들은 정말이지 보법이 다름이 느껴진다. 이러한 개인적 단점들을 모조리 상쇄해 준 이번 필사 책이 오은 시인의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과 유희경 시인의 『천천히 와』였다. 받았던 그 주의 주말에는 무아지경으로 이 필사 책만 끌어안고 살았으니...
이번에 나온 두 권의 필사 책은 시인의 에세이가 주로 있고, 에세이 편마다 좋은 문장들을 일부 발췌해 말미에 필사할 수 있는 페이지를 따로 마련했다. 시인의 글이라 매 편 유려한 문장들에 깊이 빠지게 해서 사실 통필사를 하고 싶게 만든다. 필사의 페이지가 확 줄어든 건 이 좋은 글들을 더 많이 누리라는 출판사와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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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드러내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때 세계는 정지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고정된 채 고스란하다.
텍스트는 포착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포착이다.
텍스트는 순간을 영원의 방향으로 이끈다.
텍스트는 소유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텍스트는 오직 텍스트의 것이다.
텍스트를 기입하는 사람은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이동하며
텍스트로부터 멀어진다.
자꾸 멈춰서려는 텍스트를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야기이다.
오직 이야기를 통해서만 텍스트는 흐름 속에 편입된다.
─ P.8-9, 「천천히 와, 우리의 이야기로」
유희경 시인의 『천천히 와』는 기다림에 대한 키워드를 주로 다룬다. 서점을 운영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리고,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겨울날 버스의 의자를 보며 생각한 것을 글로 옮겨 적기도 한다. 시인만의 시선, 그렇기에 읽을 가치가 충분하고 또 그렇기에 시인이지만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의미를 읽고 글씨로 써 내려가면 마음이 어느새 따뜻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 혹은 기다리고 있는지.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필사책을 권하고 싶다. 그 기다림이 더욱 사랑스러워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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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필사 책에 권태감을 느끼던 와중 필사 책의 넥스트 레벨을 본 듯해 너무 반갑고 기쁘다. 앞으로 다양하고 많은 시인들이 이런 책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땐 구매?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