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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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비채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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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우리의 위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설정할 수 있다.


미국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이러한 혼란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그런 혼란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호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따라서 우리와 타인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해준다"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독단적 태도를 고수하면서 털끝하나 상처입지 않는 것보다

"서로가 서로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 더 낫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

라고도 말한다.


버틀러는 인간의 상호작용이란 합리와 모순, 붕괴와 구축 사이의 끊임없는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 마리나 반 주일렌


지독했던 운명을 딛고 일어나 프랑스 페미니즘 문단의 주목을 받는 비르지니 데팡트의 소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는 이 시대의 증오와 반목, 그리고 연대를 묻는다.


소설의 처음은 40대 남성 작가 오스카가 50대 여성 배우 레베카를 '긁는' 글로 시작한다.

그리고 20대 여성 페미니스트 블로거 조에가 '미투'의 신호탄을 터트리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기꺼이 붕괴하라


구설에 오르며 공격을 받은 오스카는 레베카와의 메일에서 자신의 슬픔에만 도취된 모습, 자신의 불쌍한 처지만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런 오스카를 동정해 주지 않고 강하게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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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계층을 미워하지 않는 이러한 편집증적 열기가 이상하다고요.

그저 당신의 이웃, 언제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만 골라가며 증오합니다.

진짜 안전지대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 P.178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했듯이, 이러한 혼란은 오스카가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걸까. 그 붕괴에 이르기까지 꽤 긴 과정이 필요했지만, 결국 그는 출판사 홍보담당 직원이었던 조에를 향한 집착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고, 361쪽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딸에게도 이런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음을 느낀다. 조에의 고발 '덕분에' 평소보다 인세를 더 받게 되는 잭팟이 터졌다고 기뻐하는 모습엔 어떤 권력의 견고한 혜택을 마주한듯해 씁쓸함이 감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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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을 공중분해 시킨 후,

그녀 역시 난생처음으로 엄청난 공격을 받았음을 깨닫는 중입니다.

그땐 제 슬픔에 몰두한 나머지 그녀 입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글에서 언급한 여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딸이 떠올랐습니다.


그 일이 우리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으며,

온라인의 어떤 여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은거죠.

그리고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 P.361

분노한 여성의 외침에 깨달음을 얻고 기꺼이 무너지는 기득권의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느낀 것이 나뿐만이 아니기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한 '개자식'들과의 완전한 격리는 불가능하다. 오스카와 레베카는 술과 마약이라는 유해한 쾌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NA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타인의 취약한 모습을 마주한다. 그 과정이 오스카가 무너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이러한 장치의 등장은 술과 마약만이 유해한 쾌락은 아님을, 권력 또한 마찬가지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남성 작가와 여성 배우가 주고받는 이메일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따로 블로그를 통해 외치는 페미니스트의 글들. 각각의 절규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타인에 의해 연대로 이어진다. 서간 형식을 많이 띠는 이 소설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오스카의 변화를 느끼고, 영원한 분리만이 해답이 아님을 읽어내기를, 또 어떤 특권의 도취에서 벗어나 서로가 붕괴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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