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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어느 책이든 현재의 자기 입맛을 충족시켜주는 책이 최고의 책이 되기 마련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든가 <느림> 등으로 밀란 쿤데라가 인가작가 반열에 올랐을 때에는 정작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우연히 선배의 추천으로 사두었다가 이제서야 읽게된 이 책을 통해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요즘들어 부쩍 까탈스러워지고, 어떤 화려하고 널리 인정받아온 맛에도 쉽사리 만족하지 못 했던 내 입맛에 딱 들어맞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맛있게. 달게 읽었다.
친구에게 빌려준 지금 정확한 구절이 생각나진 않지만, 슬픔이든 기쁨이든 고통이든 뭐든.. 비웃고 조롱해버리는 농담. 얼마전 우연히 보게된 미국의 '제리스프링거쇼(?)'를 보고는 참 추잡스럽고 유쾌한 농담이구나..싶었다. 인간관계 중 생각도 못해본 사례들을 들고 나온 초대손님과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유쾌한 방청객. 마음을 다치게 할 지도 모르는 말들과 욕들이 난무한 가운데에서도 끝은 웃음과 기립박수로 끝난다. 최고의 쇼라는 칭찬과 함께. 타문화를 매도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런 농담들을 웃어넘겨야 하는 걸 '멋'스러움과 '당연'으로 생각하는 듯한 지금. 물론 적당하고 건강한 농담은 정신건강에도 좋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농담같은 지금.. 농담을 즐기던 주인공이 자신의 농담에 의해 한순간 추락하고, 또다시 농담처럼 지나간 진심들. 사랑..짓궂은 얼굴을 하고 진심을 희롱하는 농담들은 교활하다. 조롱받는 진심은 부끄럽나? 진심은 조롱받아도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그 웃음소리가 참기 힘들게 소음일 뿐이다. 하지만 결국 그 농담에 베이는 건 주인공.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농담. 차라리 농담이라는 고통스런 기억의 진실. 기억의 사실. 삶이 해대는 농담들에 어쩔 줄 모르는 인간. 우리들.. 어쩌면 모든게 농담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이 삶이 지독한 농담이라고 씹어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친한 벗과의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농담.. 진심과 열기와 눈물을 진심과 열기와 눈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농담. 혹, 내가 걸어가는 방식조차 스스로 조작한 농담같은 진심과 열기와 눈물일까.. 그렇다면 그건 너무 슬플거다. 어깨에 힘주고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살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웃음이 아닌 조롱과 냉소로 위장하고 싶지도 않다. 상처를 방치해서 곪게 나두면 안 된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옷을 겹겹이 더 입는 것도 안 된다. 넘어져서 무릎팍이 째지고 피가 나도 금세 일어나 친구들과 뛰어놀던 때가 참 아름답다. 스치는 바람결에 피가 멎고 상처가 상처로 단단해지는 그때가 참 아름답다.
농담.. 삶이 가끔 짓궂은 얼굴로 농담이나 해대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또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한참 그렇게 놀려대다가 잠깐 쉬고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농담. 정말로 진심은 어찌되었건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삶이 농담이나 해댈 때가 다시 오면 기꺼이 같이 농담이나 지껄여 주리라. 그때는 그 짓궂게 지어진 미소에 더 환한 웃음으로 대해줘야지.
'지금'이 참 지리멸렬한 농담으로 억지웃음이나 짓게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나처럼 입맛에 맞을 지도 모르겠다. 맛이 덜 하든 좋든 그거야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근래 들어 정말 배부르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