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이트 패러다임 - 프로이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맹정현 지음 / 위고 / 2015년 6월
평점 :
※ 이 서평은 서울정신분석포럼SFP 소식지 FiLUM(2015년 가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 책은 프로이트를 이해해‘버리지’ 않기 위해 쓰인 책이다. 프로이트를 하나의 완결된 프로이트로 이해한다는 것은 더 이상 프로이트를 읽지 않아‘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이해된 프로이트의 언어는 다루기 쉬워진 대신에 낡고 고루해져 더 이상 읽을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연 프로이트를 이해해버릴 만큼 우리는 프로이트를 읽어왔는가? 부제에서 ‘프로이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질문한 맹정현은 1장에서 곧바로 그에 대한 대답을 정식화한다. 프로이트는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읽어야 한다(23쪽).
프로이트를 어렵게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이 통합된 존재라는 환영에 맞서 인간의 분열성을 드러내는 정신분석학적 혁명을 일군 프로이트(9쪽)의 입장에 따르면, 프로이트 자신도 통합된 하나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분열된 여러 프로이트‘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들’ 사이의 이해되지 않는 불연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까다로운 조건을 따라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맹정현은 이 책에서 프로이트를 쉽고 단조롭게 독해하는 방식을 대신하여, 프로이트들 사이의 단절과 도약을 네 개의 ‘패러다임’들로 구분하여 독서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꼼꼼하게 분해하여 네 개의 패러다임들로 구성한다. 각 패러다임들이 구축된 시기와 주된 병리적 증상, 대표개념, 열쇳말 등을 간단히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35쪽): 첫 번째 패러다임(1895-1905)은 히스테리 증상을 탐구하면서 구성된 것으로, ‘유혹설’이라고도 불릴 수 있고 ‘무의식’이 대표개념이며 억압, 억압된 것의 회귀, 욕망 등이 열쇳말이다. 두 번째 패러다임(1905-1911)은 여전히 히스테리를 다루면서 첫 번째 패러다임과 대립하는 ‘환상설’을 도출한다. 여기서는 ‘성욕’이 대표개념이고 충동, 쾌락, 승화, 오이디푸스 등이 열쇳말이 된다. 세 번째 패러다임(1911-1920)에서는 정신병과 멜랑콜리라는 범주를 탐색하면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대표개념을 세우고, 자아 이상, 충동의 운명, 전이, 거세 등이 열쇳말로 삼는다. 네 번째 패러다임(1920-1940)에서는 멜랑콜리와 강박신경증의 범주를 접하면서 ‘죽음 충동’이라는 새로운 대표개념과 함께 이차토픽(초자아)을 정립한다. 이 네 개의 패러다임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봉착하면서 각기 다른 주요 개념들을 고안하여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형성해나간 것이다.
각각의 패러다임에서 파생된 테제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참고하라. “1895년의 유혹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입니다. 1905년의 유아성욕설, ‘태초에 성욕이 있었다’입니다. 1914년 원초적 나르시시즘, ‘태초에 나르시시즘이 있었다’겠죠. 그렇다면 1924년에는 ‘태초에 마조히즘이 있었다’라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49쪽)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차용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다만 “생각이 만들어지는 틀”(24쪽)이라는 기본적인 뜻으로 국한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합당한 문제들이 설정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들이 한계 지워진다는 통찰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도약에 의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통찰 등은 수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맹정현은 쿤이 패러다임을 고안하면서 과학철학의 담론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의 공동체’의 합의하는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정상과학’ 같은 연관 개념들을 배제한다. [토마스 S. 쿤/김명자, 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까치, 2013)]
이때 맹정현의 프로이트 읽기 전략의 전모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쿤의 패러다임 개념과의 연속성보다는 맹정현이 기존의 패러다임 규정에서 단절시킨 불연속성에 보다 더 주목해야 한다. 맹정현의 새로운 프로이트 읽기 모델의 패러다임 개념에서는 이와 결합된 과학성의 뉘앙스가 희석되고, 프로이트 한 사람이 패러다임 네 개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정상 정신분석’이나 ‘정신분석가들의 공동체’ 같은 연관 개념들까지 새로 생성하지 않는다(쿤에게는 필수적인 일이다). 또한 과학사에서는 패러다임 전환 후에 이전 패러다임은 도태되지만, 맹정현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첫 번째 패러다임을 폐기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아무리 최신 패러다임(네 번째 죽음충동 패러다임)이라도 해결불가능한 문제가 있음을 기술한다. 이렇게 맹정현(프로이트)의 언어의 결을 타고 맹정현(프로이트)의 문제의식과 추론의 과정을 파악하는 것(15쪽)은, 맹정현의 프로이트 읽기 전략에서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로이트 패러다임’라는 새로운 개념은 오직 맹정현의 프로이트 읽기라는 맥락과 연관되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저자가 프로이트 읽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면서 네 개의 ‘이론’이나 ‘담론’ 또는 ‘시기’나 ‘단계’ 대신에 굳이 ‘패러다임’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물론 그 문제의 맥락이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개념들이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고, 양립불가한 모순과 대립이 종합되지 않은 채 날 것으로 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개념이 모호하고 모순적인 것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이 지루하고 고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로이트 텍스트 읽기의 난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맹정현은 최소 네 개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며, “개념을 미리 규정해놓고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위치하는 장이나 패러다임에 따라 유동적으로 읽을 필요”(25쪽)를 강조했던 것이다.
맹정현은 이 책을 통해서 단절적이고 이질적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프로이트의 텍스트들을 네 개의 패러다임의 배치 안에서, 개념과 이론을 통합시키려 하기보다는 개념을 고안하게 만든 문제적 현상과 맥락에 초점을 맞추며 읽는 새로운 읽기의 패러다임을 창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 패러다임은 곧 맹정현 패러다임이라고도 바꾸어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것처럼, 네 개의 패러다임들로 프로이트들 사이의 단절과 도약을 읽어내는 ‘맹정현 패러다임’도 결코 완결된 사유가 아니며, 특히 단절과 도약뿐만 아니라 연속과 교차를 포함해야 할 가능성 또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298쪽). 완결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구성적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을 전수하려고 했던(298쪽) 맹정현의 기획에 따르면, 이 책은 철학책이나 심리학책보다는 도리어 요리책이나 여행책과 같은 실용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요리하는 사람에게 요리책의 레시피가 유익하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가이드북의 정보가 유용하듯, 맹정현의 『프로이트 패러다임』도 프로이트를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매우 쓸모 있는 실용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나갈 프로이트 읽기의 역사는 이 책부터,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오해된 것보다 더 널리, 이해된 것보다 더 깊이, 읽혀진 것보다 더 많이 읽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