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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 있나요 - 톨스토이.장 지오노.르 클레지오가 들려주는 행복에 관한 아주 특별한 이야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이병수 옮김, 박정민 그림 / 예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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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일째인지 모른다. 집중은 되지 않고 다시 또 악몽이 떠오른다. 책을 펼치면 그 해맑던 ‘행복’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온통 과거의 상처를 불러 일으켜 의식은 어느새 혼돈의 늪을 헤매이고 만다.
가장 큰 것은 사랑의 상처였을까?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고 그래서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을 가져다 준 것이라서, 결코 이 책의 사랑처럼 행복을 말할 수는 없었겠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하나의 사랑으로 행복을 얻었던 코르스섬도, 은밀하게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를 얘기하던 톨스토이도, 너무나 감동적이지만 상대적으로 행복의 뒤안길에 선 불안감을 일깨웠다.
더구나 이렇게 맑고 순수한 이야기들과는 정반대의 극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조건과 결혼 이라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은 오히려 “새 생명”(루이지 피란델로)과 같은 단순한 소망과 만족이라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그것이 작은 감동일 지라도…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직 과거를 가다듬지도 못하는 처지에, 미래의 행복은 불확실하고 지난 노력는 쓰린 상처였으며, 마음은 행복을 열망하지만 의식은 혼란스럽고 무기력하다.
행복한 적도 없었고, 지금도 행복하지 않다.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지쳐가는 가운데 더 지치게 만들던 말이 있다. 행복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순수하고 단순한 영혼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장 지오노) 게다가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이 필요하다?(앙드레 지드) 
어떤 면에서 행복은 지친 사람을 더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행복을 어떻게 생각했던 것일까?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고 목표가 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노력으로 시간을 보내며,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되어 지쳐버렸다. 어쩌면 목표조차 흐릿해질 정도로… 그야말로 파랑새를 찾아나선 것이다.

거칠고 무력한 현실을 딛고 행복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장 힘든 것은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헤매기 때문이 아닐까?  다그쳐온 현실 속에 잡히지 않는 행복, 실패의 기억 속에 무너지는 욕망, 그 괴리 속을 지친 병정처럼 헤매 다녔던 한 사람에게, 이 책은 파랑새를 찾기 위한 머나먼 여행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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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베른하르트 그라프 지음, 이영아 옮김 / 예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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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타워의 경이로움은 태초의 바벨탑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태초부터 인간이 꿈꿔온 높이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파리의 에펠 탑,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그렇게 High Rise(摩天樓)의 꿈은 이어진다.

빌바오의 구겐하임과 뉴욕, 50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미술관은 공연히도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에 의해 몽환적인 설계로 이루어 졌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낭만적 향수의 결정체이며, 몬테성은 기하학적인 미스테리다. 아토미움은 현대과학의 이정표, 금문교는 첨단의 기술, ...

이 책은 수많은 건축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건축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는 이를 둘러싼 비화(秘話)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신화와 전설, 역사와 기록, 당시의 사회와 문화, 그 건축의 의뢰인, 작가, 비평가, 심지어는 그 건축물에 대한 찬가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추적하여 지나간 시대의 메아리를 환기시킨다. 저자는 이미 건축의 매력이 물질적인 형태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깃든 추억과 정서 - 그 이야기들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되도록 건축과 흥미롭고 재미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잇고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는 헤로도토스가 인용되고, 밀레니엄 타워에서는 성경 속의 바벨탑이 등장한다. 피사의 사탑에서는 탑의 구제대안과 갈릴레이의 낙하실험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독자에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 이유는 건축의 비화(秘話)나 공간적인 정서에만 주력하지 않고, 역사적 건물의 기념성과 의의를  편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건축의 역사상 반드시 회자되는 주요 건물들은 다 들어가 있다. 스톤헨지와 피라미드, 아크로폴리스, 콜로세움, 성 소피아, 타지마할,...  이들은 이 책의 주안점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의식한 맥락으로 보인다. 제목이 <세상을 바꾼 건축>이라고 할 만큼 이책은 기념성과 권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사료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항목에서는 큰 이슈가 없는 화제가 등장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야기 자체가 재미없기도 하다. 결국 더욱 많은 사료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전설은 더 신비하고, 역사는 더 치밀했어야 했다.


이 천일야화와 같은 길고긴 건축사의 역정을 읽어 가노라면, 금문교가 걸린 샌프랜시스코의 시내를 보며 저자가 인용했던 말이 생각난다. “도시의 거리 하나하나가 작가들의 이야기요. 언덕 하나하나가 소설이요. 집 하나하나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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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대를 세계로 옮겨라
안석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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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3월 22일 신문에는 이런 표제의 서평이 실려 있었다.

“한국이 좁다면 세계로 눈을 돌려라”

이 기사가 눈길을 끈 것은 현 시대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이 상황에서 과감하게 “세계”를 외치는 환기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말 통쾌한 일이기도 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불황과 국지적인 ‘한국’이라는 한계 속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깊은 좌절에 빠져있을 때, 과감하게 던진 이 한마디는 마치 탈출구의 불빛과도 같은 메시지였다.

출간일을 겨냥한 런칭(launching) 전략이었을까?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가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는 장본인이었고, 몸소 그 실현을 증거하고 있었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 프로의 삶에 도전하라!”


저자가 직접 자신의 길을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인의 꿈을 심고 그 성공을 도와주는 것. 따라서 세계인을 지향한 이 책의 비전과 전략은 상당히 진취적이며 구체적이다.

꿈을 꾸고, 그것을 위해 준비할 것들, 분석과 목표설정, 기회와 결단, 지식과 멘토.

새로운 것을 향한 동경과 준비. 자신을 변화시키는 주체적인 의지와 노력, 자기만의 의사결정법(SWOT), ‘미리 준비하고 먼저 시도하라’, 멀티테스킹. 끊임없는 도전과 추진력. ‘큰 흐름 속에서 타이밍을 읽어라’, ‘구체적인 곤란함과 해결의 방법, 실마리’ ...

그리고 .. ‘목표를 향해 질주하라’

이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세계인을 키워내는데 손색이 없는 비전과 지침으로 채워져 있다. 꿈없는 젊은이에게 책 한 권이 야심을 심어주고 미래를 설계해 줄 것 같은 기세를 품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이런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평가에는 상반된 면이 있다. 수많은 서평과 꼬리말 속에는 반론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체로 그 요점은 이 책에는 저자의 신념이나 그 성취를 위한 역경이나 고난이 없고  또한 그로 인해 감동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 무대의 화려한 이력을 쌓아왔으나, 사람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

“감동을 느끼기에는 너무 쉽게 풀려버린 그녀의 인생”, “이런 책들에 현혹되는 순진한 사람들이 없기를”, “감동이 없는 글”, “알맹이는 어디에” ..

아마도 이런 반론 속에는 이 책이 추구하는 가치에 단면적인 맹점이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떠한 주관이나 신념보다 자본경제와 세계화의 논리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래서 이렇게 성공적인 승자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본경제에 몰입한 우등생의 수기나 세계화라는 우익에 편승한 시대의 우상이 아닐까?  저자의 성공 뒤에 가려진 수많은 가치들의 주검이나 희생과 대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책을 읽는다고 갑자기 달라질 현실은 없다. 안되던 일을 갑자기 이룰 수도 없을 것이고, 막무가내로 해외로 뛰쳐나간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앞을 가로 막던 모든 문제가 이 책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이 책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 같다. 똑같은 현실 똑같은 문제 앞에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한계’와 ‘회의’라는 틀을 벋어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드넓은 세계 속을 변화하는 자신으로 느끼는 것 ...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자유롭게 

이 책은 그저 ‘안석화’라는 한 세계 프로의 화려한 성공담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점차 한 사람의 얘기는 사라지겠지만, 그가 추구했던 세계는 남는다. 운명같은 지경(地境)을 벋어나 넓은 세게 속에서 자신을 변화의 주체로 인식하고, 세계를 적극적으로 개척해 간 - 그것은 바로 비전(vision)의 멘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해 신문 서평을 읽고 구하게 된 이 책은 지금도 내 책상 머리에 놓여있다. 그것은 마치 꺼질 듯 이어오고 꺼질 듯 되살아나는 내 꿈의 일기처럼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도전이 있는 한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말은 나에게는 하나의 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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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
박길룡 지음 / 공간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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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유전자’를 비유한 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아닐까? 사실 유전자를 따지는 것은 그 만큼 혈통에 자신이 없거나, 그만큼 확인하고 싶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것 같다. 지난 역사의 혼란과 지금의 수도 없이 벌려진 건축의 현상들, 그 속에서 누가 감히 자기 정체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무한의 형태에, 개념은 부정형, 공간은 사이버(cyber) 세계를 넘나들고, 이제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없어, 대지(site)를 넘어서 자연의 원형까지 실험하는 현대의 괴물들.

나는 서있고, 덧없는 손짓으로 “얘들은 다 어디서 온거야” 물어보지만, 역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를 알면 더 괴롭다. 언제부턴지 알지도 못하는 서양 건축에 모더니즘(Modernism)이라는 생판 논리까지. 거기다가 제 모태였던 전통의 형태는 사라져 버리고, 이젠 어디서 단초(端初)를 구해야 할지 알 수도 없다. 이렇게 주눅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고민거리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1950년 이후부터 2004년까지 한국에서 전개된 현대건축의 대표작과 사조(思潮)에 관한 비평서이다. 비평이라지만 성격상 역사와 담론을 포함하는 이 책은 그간 동시대 건축가들이 풀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점들에 대한 장편의 문답(問答)이기도 하다. 현대라는 낮선 풍경 앞에서 도대체 알 수 없었던 것들. - 본 적 없는 형태와 이방의 공간, 그 속을 헤매고 정신이 몽롱해지던 느낌, ... 이 책은 그런 비약적인 상황에 대한 통시적(通時的)인 진실과 함께 현대라는 실험 공간의 정서를 규명한다. 통시적인 영향 관계 속에서 한 공간이 담고 있는 정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저자의 설명은 대국적이면서도 섬세한 분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간간히 비치는 역설적인 풍자.(- 이 유머는 수많은 고뇌로 살아온 건축가의 객담을 듣는 것 같다 -) 아마도 저자는 많은 건축인들의 공감대 속에서 비평의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격동하는 역사의 스펙트럼 속에서 저자의 혜안은 날카로운 필치로 혼돈의 맥을 가르고 있다. 


암울한 퇴색기에 불가항력의 시대적 필연이 모더니즘 이었다면, 그것이 어떤 왜곡된 형태와 식민의 논리로 이식되었다고 해도 한국 현대건축에 밑바탕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미 잠재(潛在)된 유전자로서 서구 모더니즘을 필연적인 전제로 논하고 있다. 또한 근래의 사조는 포스트 구조주의로의 변화를 반영하는 또 다른 유전체의 수용으로 보고있다.

이런 거시한 맥락의 사조는 현대의 흐름 읽기에 적합하도록 시차순으로 서술되었고. 상당히 폭넓은 안목에서 맥을 짚어가고 있다. 비평이라고 하지만 역사성에 입각하고, 서술은 때때로 일화성(逸話性)의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현재라는 시간과 방만하게 전개된 실험, 그리고 과다한 저자의 지식, 이 모두에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무수한 논제에 지엽적인 언급이 많고, 난해한 용어와 새로운 뜻찾기의 조어(造語)가 분방하다. (-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이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의 현장감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 

또한 저자의 박식으로 인한 사변과 전문성에는 건축인도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어쩌면 벌써 일반인의 기준은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은 건축인의 질문에 화답하였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적인 건축의 형질를 결정하는 방법론적인 사고의 측면에서

과연 건축가는 어떤 유형의 사고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여러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이념이나 사조로 건축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현실적인 필연성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죠. 당신은 하나의 건축이 탄생하기 위해 제기된 모든 문제에 최선을 다했는지요? 가능한 모든 해결 방법에 노력이 경주된다면, 오히려 당신의 현실에서 찾은 작은 단서가 건축에 어떤 흐름을 일깨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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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당 인생
함성호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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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알게 된 건 저자(함성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처음 난 ‘이런 책도 썼나?’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만화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신선함과 충격,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만화를 즐겨보던 때는 대학 4년이었다. 한참 취업 고민하고, 졸업 작품으로 밤새고, 어디하나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하게 들른 만화가게, 그리고 난 그 만화가게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저 일탈행위이고  그에 따른 만족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대학 4년에 다시 접한 그 만화 속에는  어렸을 적에는 느끼지 못한 상상의 꿈과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유로움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자유로움이었다. 

  당시 즐겨보던 만화는 SF, 무협, 이현세... 등이었는데, 특히 난 만화 속에 그렇게도 넓은 세계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 최첨단의 과학적인 명제가 우습지 않은 소재가 되고, 거기에 철학적인 시구들, 문학적인 상상력과 재미있는 역사의 패러디까지... (사실 난 삼국지도 만화로 읽었다.)

  그 후로 한 동안 난 만화가게를 들락거렸다. 그리고 취직을 하고서 난 천천히 심각한 현실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인생을 살게 된 건 만화와 멀어지면서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이렇게 빛나는 과거속의 한 추억을 이 책은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만화라는 마약에 빠져있는 것 같다. 그것도 금단현상마저 일으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저자는 수많은 지적인 편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어를 내뿜는 어려운, 그러나 훌륭한(?) 시인이었다. 아닌가? 그런데 그도 만화책를 보는 사람이었다니!

  이야기도 추억도 이 책은 쉽게 풀어쓰고 있다. 어렵거나 힘든 상황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해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만화 본 기억을 더듬어 우리에게 편안한 이야기를 해준다. 다만 그의 이야기에는 친근한 경험담이나 공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분석이 실려 있다. 아마 작가로서 건축가로서의 눈매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쩌면 그게 이 만화 안내서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이 책 때문에 ‘존나깨군’(이우열의 만화)은 상심(傷心)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찐득한 표현으로 ‘존나깨군’이 보여주는 성 담론과 육두문자에 병적인 사회적 스트레스가 있음을 지적한다. 미안하지만 이 부분 상당히 웃긴다.(p54)

  아이완의 -사실 난 이 만화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에 대한 분석에서는 저자의 감성과 예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화면을 구성한 의도, 공간에 스민 감정과 표현의지, ... 아마도 그린 사람보다 더 분석을 잘 해놓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저자는 비평가이자 건축가이다.


  이렇게 가끔씩 드러나는 실랄한 독설은 아마도 저자의 만화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아득한 어린시절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에서 만화를 보며 자라난 사람들 - 사실 이런 기억은 우리 세대만의 추억일지도 모르지만 - 그 사람들, 바로 우리는 만화를 보며 즐겁고, 슬프고, 애닮은 인생을 배워왔다. 저자는 만화를 통해 그런 인생의 진실을 가르쳐 주려는 것 같다. 어쩌면 만화 속에는 우리의 생각과 꿈, 우리가 느끼며 꿈꾸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 관한 모든 얘기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보다 더 진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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