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
박길룡 지음 / 공간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건축에 ‘유전자’를 비유한 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자의식이 아닐까? 사실 유전자를 따지는 것은 그 만큼 혈통에 자신이 없거나, 그만큼 확인하고 싶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것 같다. 지난 역사의 혼란과 지금의 수도 없이 벌려진 건축의 현상들, 그 속에서 누가 감히 자기 정체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무한의 형태에, 개념은 부정형, 공간은 사이버(cyber) 세계를 넘나들고, 이제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없어, 대지(site)를 넘어서 자연의 원형까지 실험하는 현대의 괴물들.

나는 서있고, 덧없는 손짓으로 “얘들은 다 어디서 온거야” 물어보지만, 역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과거를 알면 더 괴롭다. 언제부턴지 알지도 못하는 서양 건축에 모더니즘(Modernism)이라는 생판 논리까지. 거기다가 제 모태였던 전통의 형태는 사라져 버리고, 이젠 어디서 단초(端初)를 구해야 할지 알 수도 없다. 이렇게 주눅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고민거리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1950년 이후부터 2004년까지 한국에서 전개된 현대건축의 대표작과 사조(思潮)에 관한 비평서이다. 비평이라지만 성격상 역사와 담론을 포함하는 이 책은 그간 동시대 건축가들이 풀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점들에 대한 장편의 문답(問答)이기도 하다. 현대라는 낮선 풍경 앞에서 도대체 알 수 없었던 것들. - 본 적 없는 형태와 이방의 공간, 그 속을 헤매고 정신이 몽롱해지던 느낌, ... 이 책은 그런 비약적인 상황에 대한 통시적(通時的)인 진실과 함께 현대라는 실험 공간의 정서를 규명한다. 통시적인 영향 관계 속에서 한 공간이 담고 있는 정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저자의 설명은 대국적이면서도 섬세한 분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간간히 비치는 역설적인 풍자.(- 이 유머는 수많은 고뇌로 살아온 건축가의 객담을 듣는 것 같다 -) 아마도 저자는 많은 건축인들의 공감대 속에서 비평의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격동하는 역사의 스펙트럼 속에서 저자의 혜안은 날카로운 필치로 혼돈의 맥을 가르고 있다. 


암울한 퇴색기에 불가항력의 시대적 필연이 모더니즘 이었다면, 그것이 어떤 왜곡된 형태와 식민의 논리로 이식되었다고 해도 한국 현대건축에 밑바탕을 이루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미 잠재(潛在)된 유전자로서 서구 모더니즘을 필연적인 전제로 논하고 있다. 또한 근래의 사조는 포스트 구조주의로의 변화를 반영하는 또 다른 유전체의 수용으로 보고있다.

이런 거시한 맥락의 사조는 현대의 흐름 읽기에 적합하도록 시차순으로 서술되었고. 상당히 폭넓은 안목에서 맥을 짚어가고 있다. 비평이라고 하지만 역사성에 입각하고, 서술은 때때로 일화성(逸話性)의 재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현재라는 시간과 방만하게 전개된 실험, 그리고 과다한 저자의 지식, 이 모두에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무수한 논제에 지엽적인 언급이 많고, 난해한 용어와 새로운 뜻찾기의 조어(造語)가 분방하다. (-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이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의 현장감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 

또한 저자의 박식으로 인한 사변과 전문성에는 건축인도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어쩌면 벌써 일반인의 기준은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은 건축인의 질문에 화답하였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적인 건축의 형질를 결정하는 방법론적인 사고의 측면에서

과연 건축가는 어떤 유형의 사고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여러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이념이나 사조로 건축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현실적인 필연성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죠. 당신은 하나의 건축이 탄생하기 위해 제기된 모든 문제에 최선을 다했는지요? 가능한 모든 해결 방법에 노력이 경주된다면, 오히려 당신의 현실에서 찾은 작은 단서가 건축에 어떤 흐름을 일깨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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