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특별한 악마 - PASSION
히메노 가오루코 지음, 양윤옥 옮김 / 아우름(Aurum)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가끔 '감'만 믿고 책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선택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이책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특이한 소재로(특이하다 못해 선정적이긴 하지만) 남다른 시각에서 풀어낸 독특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스토리 전개도 무난하다. '개구리 왕자'가 생각나는 깜짝 결말이 허무하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생활판타지의 충족감과 패러디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는 그리 부합하지 않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는 하더라도 '공감'할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금욕적인 삶을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프란체스코는 어느날 자신의 팔뚝에서 이상한 종기를 발견한다. 병원에만 가면 사라지는 요상하고 흉측한 종기를 바라보며 한숨짓던 어느날, 그녀는 자기 팔뚝의 종기와 눈이 '딱' 마주치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종기는 인면창(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종기)이었던 것이다. 놀란 프란체스코가 종기를 없애려고 온갖 시도를 해보지 인면창은 그녀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그곳에 눌러앉는다. 그렇게 프란체스코와 인면창의 이상야릇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가고 씨'라고 부르는 인면창은 그녀의 몸에 무단침입해 거주하는 주제에 시도때도 없이 프란체스코를 향해 온갖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쏟아낸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프란체스코가 아직도 성적 관계를 한 적이 없는 '처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녀가 여자로서의 성적 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며 그래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여자라는 것이 가고 씨의 논리다. 그러나 자극적인 독설들로 그녀를 성적 쾌락의 길로 인도하려는 가고 씨의 의도와 달리 프란체스코는 그의 거친 말들을 별다른 항의없이 순순히 인정하는가 하면 그렇게나마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 독특한 성품을 선보인다. 황당한 커플의 탄생이다.

그러나 가고 씨의 거친 입담을 들어야 하는 프란체스코도 사실은 여러모로 억울하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성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손이 닿기만 하면 성적 욕망에 가득차 불물을 안 가리던 남자들이 가장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오고, 멀쩡하던 성인용품이 불꽃이 튀며 고장이 나는가 하면, 하다못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남자는 신체의 중요 부분에 상해를 입기까지 하니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금욕적인 삶을 이어나간다. 대신 자신의 집에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이름의 연인들을 위한 방, 즉 러브호텔을 운영하며 다른 연인들을 통해 대리만족에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거치면서 중요한 사실이 밝혀진다. 프란체스코가 잠시라도 진심으로 대했던 상대는 그녀의 특이한(?) 능력에 별다른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잠시 짝사랑했던 옛사랑 쿠스가 그렇고(그것을 체험하게 된 과정이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지만), 뒤늦게 발견한 진짜 사랑 지그프리트가 그렇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이제껏 가고 씨의 험담이 무색할 정도로 환상적인 성적 매력을 만개한다. 고군분투 끝에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프란체스코와 그녀의 사랑에 힙입은 가고 씨의 깜짝 반전으로 그렇게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 반전이 어찌보면 황당하기 그지없고 좋게보면 귀엽기도 하다. 다만 허무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소재가 참으로 '일본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종종 엽기적이고 성적인 일본소설의 소재는 가끔 나를 당황케 한다. 그러나 이런 성적 소재를 선정적인 용어들로 채워가면서도 소설은 참으로 차분하고 담담한 일상소설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성(姓)'이 우리 삶의 일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글은 지극히 일상적인 (성적) 이야기에 약간의 판타지가 들어간 소설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모든 가치와 기준이 성(姓)에 있는 양 끊임없이 가학적이고 비하적인 말을 쏟아내는 가고 씨의 발언들은 소설적 상황을 이해한다고쳐도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내 안의 특별한 악마 PASSION>은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오가 비교적 분명하게 갈릴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별로였지만 나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독자들에겐 어쩌면 재미있는 책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1페이지에 3번 씩은 웃을 거라는 책소개에 혹해 읽기 시작했다가 웃음은커녕 가고 씨의 독설 때문에 1페이지에 서너 번은 찡그려야 했던 것이 심히 유감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것에 낚여 타인의 취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웬만해선 공감할 수 없었음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