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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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서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르고,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클레이 키건의 소설. 또 최근 개봉한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소설이기도 하다. 클레이 키건은 24년의 활동기간동안 4권의 책만 냈다고 하는데 모두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앞선 책 소개에 대한 내 반응은 그냥 미지근했으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20년 전부터 주목한 작가라는 말에 앞뒤 안 재고 6월 첫날의 읽을 책으로 선택했다.

아일랜드 단식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 빠듯한 살림에 제대로 된 돌봄은 커녕 복작복작한 형제들 사이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소녀는 먼 친척집에 잠시 맡겨지게 된다. 새롭고 낯선 곳에서의 일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장면은 소녀가 킨셀라 부부에게 환대 받는 순간들이다. 손을 잡고, 눈울 맞추고, 함께 동행하고, 격려하는 순간들. 부끄러운 비밀이 없는 이곳에서 소녀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그리고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소녀가 화자라 간결한 문체가 가독성을 높여주는 건가 싶었지만 하루키가 말하길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책 전반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소녀의 응축된 감정이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드러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는 꽤나 아릿하다. 그렇게 100여 페이지가 못되는 이야기에서 킨셀라 부부와 함께 지내며 받았던 다정함과 넉넉한 사랑은 차곡차곡 쌓여 마지막 한문장에서 터지는데... 그게 제일 아픈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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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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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이란?
두 물질이 서로 만나 상호작용하여 새롭게 결합하는 현상을 뜻하는 화학 용어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대위와 오틸리에, 네 남녀의 관계를 비유하는 제목이다. 확 와닿는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의 교차하는 감정선을 좇다보면 꽤 재밌는 비유였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젊은 시절에 서로를 사랑했지만 뜻하지 않게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배우자와 사별 후 재혼한 부부다. 어느날 에두아르트는 샤를로테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지가 딱한 자신의 친구 대위를 집에 머물도록 불러들인다. 샤를로테도 마찬가지로 기숙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조카(죽은 친구의 딸) 오틸리에를 데리고 온다. 이렇게 네 남녀가 한 집안에 모였고 예상했듯이 사각관계가 형성된다.

먼저 샤를로테와 대위는 서로의 감정을 알면서도 표현하기 보다는 절제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반면에 오틸리에를 향한 에두아르트의 구애는 적극적이고 오틸리에 역시 뜨거운 열정으로 답한다. 두 커플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독일어로 중재자란 의미를 가진 미들턴은 끊임없이 결혼과 부부에 대해 설교한다. 전개 흐름상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미들턴의 설교에 누군가는 수긍하며 지키려하고 누군가는 저항하며 강경하게 행동한다.

미들턴의 주장 중 극히 일.부.만 발췌해보자.

"결혼이란 모든 문화의 출발이고 정점"이며 헤어져서는 안 되고,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므로 그에 비하면 하나하나의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불행이 이따금 덮쳐도 그 순간만 넘기면 "오래 지속되어 왔던 관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잇음을 알고는 행복해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서로 갈라서기에 충분한 이유도 없고 "인간이 처한 상황이란 게 원체 그때마다의 고통과 기쁨에 내맡겨진 것이어서 한 쌍의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고 그것은 영원토록 짊어져야 하는 무한한의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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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욕심과 파괴적 힘을 제어하려는 도덕률 사이에서 불안정한 관계를 드러내는 이 작품"이 괴테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는 것과 별개로 개인적인 감상은... 괴테판 막장 드라마라는 이미지를 쉽게 지울 수 없으나 그럼에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반짝이는 삶의 진리. 무엇보다 부부사이에는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인물이든 상황이든 어느하나 공감가는 게 없어서 애정을 갖고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미들턴이 주구장창 말하는 시대배경에서 보았듯이 현재에도 유지되는 결혼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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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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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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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헤집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올라 새벽을 서성이게 만든 책이다.

사적인 감정 이상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 연결 고리를 발견한다는 것. 뒤늦게 당도한 알아차림에 그리움만 듬뿍 묻어나더라도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한다면-

무엇하나 섣부른 판단으로 재단하지 않고 지그시 오래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이에 두터운 기억의 통로를 놓고 기쁘게 오간다면 더 좋겠다. 그렇게 가족과 이웃이 그리고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씩씩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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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소망이 움츠려들 때마다 펼쳐봐야지:)

사소한 알로 노심초사할 때 기억해야할 말
🔖"괜찮아. 대세에 지장 없어."

그리고
"너나 잘하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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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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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
내게는 증오할 시간이 없었다 -
왜냐하면
곧 죽음이 방해할 것이라서 -
남은 생이
그다지 길지 않아서
증오를 - 멈출 수 있었다 -

내게는 사랑할 시간도 없었다 -
그래도
애써야만 했으므로 -
조금만 애써 사랑하면 -
내게는
충분할 것 같았다 -

-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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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인이 남긴 1,800여 편의 시 중에서도 그녀를 대표하는 명시들을 엄선해서 한권으로 엮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를 두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시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문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사랑받는 에밀리 디킨슨. 사실 그녀의 시를 읽기 전부터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 평생 독신이라거나 은둔생활, 대인기피증 같은 이미지들이 더 강렬하게 와닿았던 적도 있다. 그럴땐 시들이 음침하고 낮은 슬픔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언제까지나 그녀의 시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사실은 시를 읽으면 읽을 수록 분명해진다.

시를 해석하며 의미를 좇는 독자는 아니기에 그저 읽는 행위에 충실한다. 그것만으로도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함성과 외침의 환청속에 탄성과 감탄이 오가다가도 어느 페이지 앞에서는 침묵을 지키기도 하지만 그냥 이대로도 좋다고 충분하다고, 만족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시알못은 그렇게 필사를 이어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시를 누리고 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전부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열차의 짐은
철로가 견딜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행복한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
고통은 날개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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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여러권 소장중이지만 이 책은 양장본에 300페이지의 분량에 주와 해설도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에밀리 디킨슨 입문자나 오랜 시간 천천히 즐기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 크리스티앙 보뱅의 「흰옷을 입은 여인」은 마치 에밀리 디킨슨 자체로 시를 쓴 문장처럼 아름답다...🥹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야심을 드러내며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할 때 그녀는 그 무엇도 되지 않고 이름 없이 죽겠다는 당당한 꿈을 꾼다. 겸손이 그녀의 오만이며, 소멸이 그녀의 승리이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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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입니다.
@eul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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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문실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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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중 "각자의 온도로 서로를 끌어안는, 오늘을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

▪️정지아, 「말의 온도」
▪️손보미, 「담요」
▪️황정은, 「모자」
▪️김유담, 「멀고도 가벼운」
▪️윤성희, 「유턴 지점에 보물 지도를 묻다」
▪️김애란,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자주 언급되는 '정상가족' 형태의 가족 소설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상상해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맹목적인 가족주의를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의미 이상의 확장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마침 독서모임 《독사과》에서 5,6월은 가족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회원님들께도 추천하고 싶어졌다:)

여섯 편의 단편중에서는 뭐가 더 좋고, 아니고 우열을 따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두 재밌게 읽었다(사실 그러기 쉽지 않은 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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