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 보부아르와 넬슨 올그런의 사랑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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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진실하게 말하고자 애쓰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됐으며, 그것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보다 더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임을 당신은 느끼나요? 제가 당신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강렬하게 원한다는 걸 느끼나요? 당신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게 하고 정다운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줘요. 어쩌면 제 편지가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제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P88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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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부터 쉰다섯까지
보부아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랑의 속내가 담긴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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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사랑? 예상치 못한 주어가 나타났다. 보부아르와 넬슨 올그런의 사랑이 그것이다. 보부아르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50여년 동안 계약 결혼을 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넬슨 올그런과의 사랑은 생소했다. 그리고 이들의 솔직한 감정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서한집의 존재에 1차 충격이었고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보부아르의 거침없는 애정 표현에 어안이 벙벙했다. 1차 충격적인 요인은 이정도로 사생활 보장이 없었나 하는 부분이었지만(물론 당사자 본인은 예감했던 일이지만) '나의 남편'과 더불어 다양한 애칭은 물론 '제게 키스해 줘요. 아주 강렬하게' 등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오히려 내가 설레곤 했다(네가 왜...?).

달뜬 마음으로 읽다 보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보부아르는 프랑스인, 넬슨 올그런은 미국인이다. 스마트폰은 커녕 E-MAIL도 없던 시절 파리와 시카고는 얼마나 멀던지! 그렇지만 대서양을 횡단하는 편지속에 둘의 모국어가 달랐을지언정 언어적 장벽은 당사자들에게 사랑을 더욱 견고히 하는 매개체처럼 보였다. 게다가 보부아르가 프랑스 이야기를 세세히 서술하기 때문에 21세기의 독자는 당시의 상황은 물론 카뮈, 콜레트, 자코메티, 피아프, 장 콕토 같은 예술가들을 사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몇 안되는 아는 이름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연애 편지로, 내밀하게는 기록문학으로써 읽는 재미가 쏠쏠했달까.

다만 이들의 사랑이 17년동안 한결 같았던 건 아니다. 그사이 헤어짐이 있었고 그후로도 무려 10여 년이나 계속 편지가 오고 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내가 벽돌책을 부지런히 읽은 까닭도 바로 그 지점, 결별 후에 어떤 내용의 편지가 오고 갔을까 하는 궁금증때문이었다. 글쎄, 뭘 기대했던 건진 스스로도 모르겠다. 어떤 극단적인 변화나 혹은 날 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짐작만 했을 뿐이다. 되레 이들을 통해 남녀간의 사랑을 너무 획일적으로 재단하고 있던 나를 다시 알게 되었달까. 굳이 남녀 구분을 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편지는 사랑 너머를 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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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손편지를 즐겨 쓰는 내게 편지지라는 공간은 떠오르는 숱한 말들을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펜을 들기 전까지의 마음과 고심하며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완성하며 짧게나마 소요되는 시일을 계산하고 수신인에게 당도했을 때의 기쁨까지 모두 미리 담겨 있다. 그런 감정을 아니까 편지를 쓰는 보부아르의 모습이 괜히 선하다. 17년, 304통- 숫자가 주는 의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아마 보부아르만이 아는 것이겠지. 나머지는 독자의 몫.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애틋함, 또는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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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아쉬운 점은 넬슨 올그런의 답장을 볼 수 없다는 것 ㅜㅜ 올그런의 미국 대리인들이 거부했다는데... 언젠간 완전판으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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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ul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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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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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 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배명훈,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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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는 연인에게 열두통의 편지를 쓴다. 서간문이 특징인만큼 애틋한 감정이 단연 돋보이는 이 소설의 장르는 무려 SF. 스케일이 가늠도 되지 않는 전쟁의 배경은 우주공간이다.

"한 떼의 별 무리"같은 함선들의 지난한 싸움은 소리도 없이 시공간을 초월한다. 작가는 이 소설로 과학 지식 습득을 만류했지만(ㅋㅋㅋ)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을 이끄는 데에는 큰몫을 했다. 와중에 SF영화 한편이 펼쳐지는데 로맨스 한방울까지! 특히 결정적인 장면은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라는 한문장이었다. 현시점에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지만, 아니지 뜬 별 잡는 듯한 프로포즈 멘트라지만 180시간을 내달려야하는 장거리 연애는 그야말로 "같은 우주에 갇혀 사는데도" 전혀 다른 우주에 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로 들렸다 . 어쩌면 미래의 어느날엔 이토록 낭만적인 프로포즈 멘트를 창조한 작가의 선구안에 감탄할 지구밖 생명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 출신의 '나'와 지구 출신인 연인의 반박자씩 엇갈리는 순간들이 안타까우면서도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사랑이 따뜻한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적재적소에 던지는 유머러스함이 더해져 더욱 매력적인 소설로 깊이 각인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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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필리프 베송 지음, 이슬아 옮김 / 레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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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사건을 치정이 아닌 사회적 사건으로 보아야 했다. 우리는 비극으로 끝난 부부 싸움이 아닌, 지속적인 폭력과 공포가 어디로 치닫는지에 관해 말해야 했다. 살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내세우며 지배하려는 한 남자의 욕구에 관해 말해야 했다. 눈이 먼 사회를 말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이름 붙이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p203

-필리브 베송,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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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도 유추할 수 있듯이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수십차례 칼에 찔러 참혹하게. 그리고 열 세살의 딸이 목격했으며 범인은 남편이자 아빠이다. 그는 범행 직후 자리를 떠났고 레아는 타지에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일이 생겼어."

직관적인 제목이 눈길을 끄는 소설이지만 사실 이 책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제목 너머를 보아야한다. 가부장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가정안에서 가정폭력과 여성살해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전후로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일어나고 있는지, 한 가정안에서의 사건을 "사회적 사건"으로 보아야만 하는 이유까지도 말이다.

현장을 목격한 레아의 트라우마가, 화자인 '나'가 과거를 되짚어보며 엄습하는 죄책감에 앞서 이 사건은 일상에 징후가 만연해 있었다. 남매의 묵언이, 무시된 피해자의 신고가, 목격자의 주저함 같은 것들 말이다. 회피하고 싶었고(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고) 모른척 하고 싶었을 뿐(역시나 어쩔 수 없었다면 말이다). 이 순간이 무던하게 지나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일상에 작은 비극들은 결코 그렇게 쉽게 놔줄리가 없을텐데. 그래서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독자 입장에서도 아프기 그지없었다. 다만 은유 작가님의 추천사처럼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은 문학이다"라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사건 발생 후에도 이들은 순탄치 않다. 집을 잃었고 증언해야 했으며 재판에 참석하고 가해자인 아빠를 마주해야했다. 포기와 체념이 반복되는 와중에 언론에 가시화 된다는 것이, 대중을 경악케 하는 만큼 동정 어린 눈길을 동반한 이 사건이 얼마나 소비되는지에 대해선 기시감마저 든다. 그리고 이내 잊히거나 다른 사건으로 묻히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 제동을 걸 것이다. 외면하지 않도록, 쉽게 잊히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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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들의 무너진 삶은 어떻게 다시 재건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나'는 "눈에 띄어서도, 목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는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파괴된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글을 쓴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p236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삶도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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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엄마를죽였어
#필리프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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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4·16재단 엮음, 임진아 그림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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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전 오늘의 내가 기억하는 내 모습은 변함이 없다. 기억의 왜곡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선명하다. 그날 나는 첫돌이 지나서도 통잠없는, 그러니까 밤부터 아침까지 딱 4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엔 울기만 하는 딸과 씨름 후 두어시간 눈을 붙이기 위해 누웠다. 이어서 잠결에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확인했고 기울어진 커다란 배 화면 위로 '전원 구조' 속보를 보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전원 구조'가 꿈이었나, 아니면 지금이 꿈인가 구분조차 되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10년동안 딸은 자랐고 세월호를 알게 되었고 "왜 구하지 못했어?"라는 물음에 나는 눈을 마주치고 대답하지 못하는 엄마가 되었다. '수학여행' 소리만 들어도 남편과는 눈빛교환을 한다. 안심하고 보낼 수 있을까? 4월 언저리부터 저릿한 어떤 통증이 올라오지만 운전하면서, 걸으면서도 노란 리본을 보면 가슴 한켠엔 따뜻함이 일렁인다. 그래, 기억은 힘이 세지.

올해는 『월간 십육일』을 읽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인 이 책은 2020년 6월 16일부터 매월 16일, 4·16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연재해 온 동명의 에세이 <월간 십육일> 가운데 50편을 담았다. 기억은 힘이 세다는 것을 매장마다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특히 함께 기억한다는 것,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죽음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그만할 때가 됐다고도 하고 더 험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때론 반복되는 참사 앞에서 같은 말이 되풀이 되곤 한다. 나는 잔뜩 움츠려들지만 다시금 몸을 바로 세운다. 그럼에도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추모와 애도에는 기한이 없다고 말이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우리를 한꺼번에 울릴만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슬픔이 세상을 맑게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일 때. 잊지 않고 함께 깨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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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30년째 - 휴일 없이 26만 2800시간 동안 영업 중
니시나 요시노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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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점주가 되었을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장시간 서서 일하다가 생긴 요통도 아니고, 사람을 써야하는 어려움도 아니고, 바로 인간에 대한 불신이었다. 불신아리가보다 공포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중략) 툭하면 손님이 소리를 질렀다.영수증을 주면 주는 대로 "쓰레기를 주고 난리야"하는 소리를 들었고, 안 주면 안 줬다고 "영수증을 줘야 할 거 아냐"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언제, 무엇을 했을 때 소리를 지를지 알 수 없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p98

-니시나 요시노, 『편의점 30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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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표지만 보고 편의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힐링소설을 예상한 독자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그게 나다....👀 그러나 이 책은 진정한 '편의점 인간'의 생활 밀착 극한 에세이로 휴일 없이 26만 2800시간 동안 영업 중인 일본의 편의점 '패밀리 마트'의 점주의 업무 일지이다:)

한국에 편의점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시골의 작은 동네 슈퍼 자리에도 편의점이 들어왔다. 참새방앗간 마냥 들락날락하면서도 점주&알바생과 형식적인 대화가 전부였던 내게 이 책은 익숙하디 익숙한 편의점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동안 물리적 공간의 편리함을 우선시 했다면 이제 이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기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다는 사실. 진상은 차고 넘치는 현실, 휴일 없음, 알바 없음, 돈 없음의 쓰리 콤보가 활개를 쳐도 일은 계속 된다는 깨달음 같은 것들을 줄줄이 나열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사정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수수한 일상의 기록이라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마음의 지옥문이 열리는 별별 사건과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덤덤함이 묻어나오는 건 3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삶을 이어온 저자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치솟는 인건비와 전기 요금과 씨름하면서도 다음 계약 갱신을 해보려" 하는 이들 부부에게 패밀리 마트는 사랑일까, 증오일까.

정답은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에 버젓이 쓰여있지만 나는 내 안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비록 30년의 반절도 안 되고, 업종도 전혀 다르지만 천천히 일을 정리하고 있는 때가 되니까 알겠더라. 다사다난한 지난 시간을 다시 돌아가 겪으라고 한다면 극구 사양하겠다만 그래도 증오보단 사랑이었다고.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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