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전기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 궤적을,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공간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과의 연관성을 찾아 기록한다. 저자는 빈이라는 공간의 풍요로움 뒤에 감추어진 빈곤과 주택 부족 현상 등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이중성이 빈의 여러 측면을 특징짓는다고 말한다. 찬란하면서도 병적인 도시 빈에서는 20세기 사상을 지배하던 천재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빈에서 그들은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도 적고 있다. 그들이 바로 1900년대 초반 모더니즘 문화의 주축이던 인물들,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 코코슈카, 에른스트 마하, 프로이트 등이었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합스부르크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을 레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레들 사건은 “1913년 5월 제국의 육군 정보국 부국장인 알프레드 레들이 반역자이며 그 이유가 동성애 생활에 필요한 유흥비를 마련하는데 밝혀”진 사건이다. 레들의 동성애적 자각은 사관 학교 시절에 찾아왔지만, 이후 군생활을 하면서 동성애 성향을 성공적으로 감추어 꿈의 도시 빈의 부르주아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무질의 자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레들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도 하다. 빈의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은 사실 합스부르브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작위성과 겉치레는 당시로서는 예외라기보다 하나의 규칙이었고, 적절한 외양과 치장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 빈의 이중성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나날 속에서 탄생한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퇴를레스의 인식과 감각의 혼란 속에서 보내는 한 시절을 ‘빈’적인 스타일로 서술해 내려가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와 함께 하는 인물은 인도 철학과 초월적 세계에 심취한 바이네베르크와 음모를 꾸며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권력형 인간 라이팅, 그리고 바이네베르크의 돈을 훔쳐서 라이팅과 바이네베르크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 바시니이다.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은, 바시니가 돈을 훔친 것을 트집잡아 그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퇴를레스 역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시니를 괴롭히고 추행하는데 동참하게 되고 퇴를레스는 자기 앞에 불어닥친 일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퇴를레스의 혼란은 수학의 허수에 대한 의문과 궤를 같이 한다.

 

"그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의 연산을 할 때 우리는 확실한 수에서 출발을 해. 그러니까 미터나 무게 혹은 다른 구체적인 단위로 표현할 수 있는 실수로써 시작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연산의 마지막에 나오는 수도 역시 그러한 수겠지. 그런데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 두 수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이 아닐까? 달리 말하자면 첫 교각과 마지막 교각만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 교각 사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마음놓고 건너다니는 그런 다리 같은 게 아닐까? 마치 한 순간만 발을 잘못 놀리면 허방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거지. 그런데 정말 섬뜩한 것은 사람들이 다시 올바르게 도착할 수 있도록 꼭 붙들어매주는, 그런 연산 뒤에 숨어 있는 힘이야."132-133

 

퇴를레스에게 허수란 완벽하게 정립된 수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부과적으로 도입된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립된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이상한 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이다. 퇴를레스는 이 허수, 인식과 오성의 영역 밖에 있는 이상한 감각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훗날 갑자기 소환된 (특이하게도 미래의 퇴를레스가 소환된다.) 미래의 퇴를레스는 당시의 자신의 혼란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그래서 훗날 자신에게서 청소년기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들은 상대방이 혹시 이런 기억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느냐고 물으면 퇴를레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 일이 타락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걸까요? 그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내게 남아 있어요. 미량의 독은 영혼에게서 너무나도 분명하고 안정된 건강함을 빼앗는 대신, 영혼에 보다 더 섬세하고 예리하고 이해심이 넘치는 건강함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요."” 205

 

퇴를레스에게 세계는 단순한 오성과 과학적 합리성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로부터 소환된 퇴를레스의 명쾌함 속에는 미량의 혼란, 완전한 세계에 이상하게 끼어들어간 허수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릴케, 카프카와 함께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론은 미래의 퇴를레스의 단정한 태도와는 달리, 학교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이 난다. 즉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퇴를레스에게 남겨진 언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의도, 목적을 가진 그 말이 실패했다면 퇴를레스에게는 언어의 결여만이 남겨진 셈이다. 즉, 퇴를레스의 언어에는 언어와 비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비언어가 언어를 지탱하는 이 퇴를레스의 세계는 세기말의 빈이라는 공간을 닮았다. 풍요로움을 가장한 빈곤, 사회혼란과 정치혼란 등이 탄생시킨 지적인 결실(비트겐슈타인과 프로이트, 볼츠만과 같은 과학자들, 쇤베르크와 말러 등의 예술가들)을 보라. 세기말의 혼란과 몰락의 냄새가 발효시켰던 풍요로운 사상처럼, 퇴를레스의 언어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었던 혼란, 자신의 말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비언어라는 허수와 같은 존재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하나의 질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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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앨런 제닉, 스트븐 툴민 지음,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이제이북스, 2005, 94-96쪽.

2)위의 책, 195쪽.

3) 위의 책,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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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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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 밑바닥에는 본인은 느낄 수 없는 핵 같은 것이 있어. 내 경우 그건 하나의 도시야. 그 도시에는 냇물이 하나 흐르고, 둘레는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지. 도시의 주민들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있는 건 일각수 뿐이지. 일각수는 주민들의 자아나 에고를 흡묵지처럼 빨아들여서 도시 밖으로 가져 가버리는거야. 그래서 도시에는 자아도 없고 에고도 없지. 나는 그런 도시에 살고 있어. 물론 실제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까 그 이상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이 도시를 만든 것은 너 자신이라구. 네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여기 있는 모든 걸 만들어 낸 거야. 벽에서부터 강도, 숲도, 도서관도, 문도, 이 눈까지도 말이야.”

 

고백하자면, 이 소설, 무척 지루하고 읽기 싫었다. 대학시절 하루키를 좋아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 이 마음도, 그때의 그 마음도 모두 내가 만든 것일텐데, ‘움직이면서 완전성을 띤다’는 하루키의 세계와 내 마음도 닮은 것일까.

소설이 지루했던 이유는 아마도 하루키의 질문과 답이 똑같기 때문일까. ‘우주와 나의 내면은 연결되어 있다’는 동일한 답(명제)을 가지고, 자신의 답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해낸 두 개의 세계는 지금 보면 무척 낡아보인다. 하루키의 세계인식이 낡아보이는 건, 모두가 클래식과 재즈를 듣고, 프로이트를 읽고 아인슈타인을 알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두가 하루키를 읽는 시대가 되어버려서일까. 어쩌면 위스키와 재즈와 클래식을 사랑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이혼남이 여자 아이와의 구원과도 같은 섹스를 시크하게 받아들이는 하루키 본인의 클리쉐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 늙어버린 것일까.

나 역시도 하루키의 소설 주인공처럼 종종 마음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곤 한다. 내가 지나온 무수한 시간 속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방황을 하던 내 마음은 과연 나의 것이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그런 궁금증으로 프로이트를 읽어왔는데 답은 찾지 못했다. 우주와 인간 내면이 연결되어 있다는 하루키의 대답도 썩 내키질 않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로이트는 말년에 인간에게 새겨진 이상한 마음, 죽음 충동을 자신의 연구에 추가했다. 존재 안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미지, 심연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발견에 대한 하루키의 댇바은 살아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그런 하루키의 대답이 틀린 것도 아닌데 여전히 무언가 아쉽고 걸리고 지루하고 지긋지긋하다는 인상을 끝내 지울 수가 없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어쨌건, 나는 더 이상 하루키를 읽지 않을 것이다. 이건 소설 속 주인공이 그림자를 버리는 일과 비슷할 것 같다. 주인공이 자신이 구성한 세계의 끝을 책임지기 위해 그림자를 원래의 세계로 보내버리는 것처럼, 나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시간을 책임지기 위해,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하루키를 즐겁게 버리는 거다. 하지만 하루키처럼 쓸쓸하게 그림자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였다면 웅덩이 속으로 그림자를 밀쳐버렸을지도. 그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사는 대신, 자신이 창조했던 세계의 끝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웅덩이 밖으로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 황량한 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을 텐데.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식의 핵이 아니었을까.

하루키는 처음부터 두 개의 세계의 본질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를 유지시킬 방법을 고안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 궁금하다. 웅덩이 안으로 세계의 끝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밀어버리고 나면 남았을 어떤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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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문제적 인간 8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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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을 받았는데, 책도 잘 나왔고 컵이 단아하고 이쁘다! 책은 내년 초에나 읽기 시작할텐데...어떨까 기대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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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이상한 소설 <바틀비 이야기>는 월스트리트라는 메이저한 공간에서 좀체로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들, 필경사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칠면조, 펜치 그리고 심부름하는 생강비스킷. 그들은 주인공의 말대로 좀체로 관심이나 시선이 가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그들에게 시선을 준 이유는 새로 온 필경사 바틀비 때문이다.

                                          

 

 

 

 

 

 

바틀비는 두개의 칸막이와 등 뒤의 벽이라는 공간에 파묻혀 오로지 필경한다. 굶주린 듯 필경하던 바틀비는, 필경본 검토를 거부하지만, 고용자이면서 돈을 지불하는 주인공은 이상하게 바틀비의 그러한 거부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만다. 결국에 ‘나’는 바틀비로 부터 도망치지만 원래의 건물 주인과 사무실에 들어간 변호사 때문에 소란은 잦아들지 않는다. 고용인, 돈을 지불하는 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바틀비의 말은 오로지 하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필경마저 거부하며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채 마침내 죽어버린다. 소외된 자, 혼자 있으며 사회, 혹은 공동체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바틀비는 사실 공동체의 본질을 보여준다.

구성원들이 공통의 목적이나 의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가장 흔한 착각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블랑쇼에 의하면 공동체의 본질은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에 있다. 공동체는 ‘단수성들의 차단 또는 단수적 존재들 자체가 유예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즉 우리는 모두 혼자라는 점, 고독하다는 점, 절대 서로를 이해하거나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는 거대한 심연이 단수성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만을 ‘분유(分有)’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있음, 단수로서 함께 있음을 극명히 드러내주는 사건은 죽음이다. ‘내’가 바틀비라는 인간을 ‘인간’일반 즉 자신과 동류로서 인식했던 사건도 죽음이지 않았던가. (‘나’의 탄식을 보라.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하지만 죽음은 괴상하다. 죽음이란 두 가지의 모순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바틀비가 여기-함께-있었음을 증언해주며, 동시에 더이상 여기-함께-없음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타인의 죽음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공동체는 언제나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자아들-결국 不死의 주체들과 실체들-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들인 (또는 아무것도 아닌) 나들의 공간이다. 공동체가 타인의 죽음에서 드러난다면, 그 이유는 죽음 그 자체가 자아들이 아닌 나들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가 타자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나라는 존재는 늘 공동체의 바깥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즉 나는 거기 속해 있지 않음으로써 속해 있는 것이다. 고독의 연원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틀비가 죽고 난 뒤, 공동체는 깨졌는가?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나? 아니다. 그들 사이에 나누었던 어떤 말 혹은 침묵이 거기 있다. 바틀비의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 대해 쓰고 있는 문학이 여기 있지 않은가.

문학작품이 증언한다. 바틀비라는 비가시적인 존재가 있었음을. 그러나 “문학은 오직 무위를 긍정하기 위해 자신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작품에서 뚜렷이 보여준다. 그때 그 문학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소통을 통해 공동체가 계속 유지된다.” 블랑쇼의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의 공동체는 바틀비와 같은 무위의 존재, 즉 문학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소통함으로써만 간신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문학 혹은 쓸모없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1) 장 뤽 낭시 지음,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47쪽.
2)장 뤽 낭시,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문학과 지성사,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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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소설이 시점을 통해 통일성을 추구하는 반면, 척 팔라닉의 소설은 시점을 유지하되 독백과 서술을 넘나드는 불안전하고 모호한 톤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않는다. 마치, 불안을 잃지 않기 위해 떠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독자들은 그의 끊임없이 독백적 수다 때문에 통일성 있는 불안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의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그 불안을 독백적 수다로 메꿀 수 밖에 없었을까. 끊임없이 머리통을 갈겨대는 수다를 다 읽고 나면 허망하기만 한 이 작가의 세계, 이 정신병자의 이야기에 우리는 왜 귀 기울이는가. 

<파이트클럽>은 타일러 더든이 겨눈 총구가 입 안에 쑤셔박힌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는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 주절거리고 있다. 그 모습은 별로 위태로워보이지 않는다. 폭파 직전의 191층의 빌딩에서 입안에 총구가 쑤셔박혀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폭탄 만드는 법과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적당한 묘사를 쏟아내면서 이야기의 긴장을 무너뜨린다. 눈 앞에 있는 죽음은 그를 위협할 수 없다. 그는 수다를 통해, 세상에 관심없다는 듯 냉소하고 있다. 죽거나 말거나 총을 쏘거나 말거나.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름없는 주인공. 그는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타일러 더든 즉 자신의 분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둔다. 불면증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환자들의 모임에 찾아가 위로를 받고, 타일러 자신의 무의식을 향해 도와달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그 모임에서 그는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말라라는 여자를 만나고, 소설의 말미에서야 말라라는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이 갖은 수작을 다른 것이며, 그런 이유로 타일러가 나타난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가 벌인 일은 예상보다 훨씬 큰 사태를 불러들인다. 타일러 더든은, 그가 가진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면서, 구원을 위한 파괴조직 파이트 클럽을 결성한다. 클럽이 커지면 클수록 타일러 더든의 힘은 강력해지고, 그를 괴롭히던 직장 상사를 죽이고, 결국 메이햄 작전(191층짜리 빌딩 폭파작전)에 저해되는 적을 살상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일이 커진 이후에야 그는 타일러 더든, 자기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는 타일러 더든을 앞장세워 저질러진 모든 일들을 멈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향해 총을 쏜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 대신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그곳을 지켜낸 것이다. 이후 그는 정신병원을 천국이라 여기는 바보가 된 채 천국의 메시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 즉 전설이 된다. 

 
소설 속의 이 모든 사건은 의식의 방관과 무의식의 행동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일러 더든의 욕망,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는 그 욕망의 극단에는 무기력하고 바보같은 자기 자신이 있다. 둘의 독백과 서술의 혼돈 속에서, 둘은 이따금씩 조우하지만 의식의 서술자인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의 행위를 자신의 수다로 덮어버린다.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자아 사이의 괴를 감당하기 힘든 자의 잔꾀.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거역할 수 없었던 그는, 자기 내부의 어떤 행위의 인물, 대학 졸업 후 갔던 아일랜드에서의 어떤 기억에서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그런 괴물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의 독백에는 어떠한 책임도 없어보인다. 그가 파국 직전까지 보인 의지는 그야말로 단 하나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독백하는 것. 말의 과잉 속에서 그의 진심 혹은 의무는 단 하나로 드러난다.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 그 의지는 타일러 더든과 그 자신의 의지가 일치하는 유일한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용된 그 독백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쓴다. 자신의 행동의 의지를 외부로 옮겨놓은 무의식이 행위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그저 떠들어 댈 뿐이다.

2. 
 

독백이란 의식의 말일까, 무의식의 말일까. 사실 모든 이들은 늘 독백을 한다. 직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혼자 티비를 보며, 화장실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우리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어떤 말들이 흘러나온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 밖에 없음에도 그 독백은 좀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이 독백의 세계는 너무 혼란스럽다. 누구를 증오하다가 누구를 좋아하다가 금방 그 말을 거둬들이고 끊임없이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자신이 이 독백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표면도 중심도 아닌, 혼란의 정체를 보여주는 카오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부도 외부도 아닌 어떤 경계에서, 우리의 말들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또 어느새 화해한다. 척 팔라닉의 세계가 과격하고 병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 영역의 화자, 우리가 단 한번도 끄집어낼 생각을 하지 못한 내면의 모호함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각자의 내면은 그토록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우면서 불쾌하고 괴물스럽지 않은가. 그는 이 경계의 세계를 택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독백 세계의 1인칭 아닌 1인칭.

척 팔라닉 소설의 주인공의 혼란은 거기서 온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사라진 지대에 갇혀버린 주인공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들, 독백의 문장을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의미는 외부에서 생겨나고, 그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독백만 무의미하게 반복 충돌된다.

 

“사랑하던 것들은 머지 않아 자신을 외면하거나 죽게 된다. 자신이 창조해 낸 것들은 모두 쓸모없이 버려질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것들도 모두 쓰레기로 전락해 버린다. 난 오지만디아스야. 왕들의 왕.”259

 

나의 이름은 왕중의 왕
오지만디아스다.
너희들 위대한 자들아
내 업적을 보고 두 손을 들어라
분괴된 거대한 페허중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적막하고 솟은 것 없이
평평하게 끝없이 뻗어있는
텅 빈 사막밖에는...<오지만디아스, 셸리>


그는 현대의 오지만디아스다. 스스로가 이루어놓은 모든 일이 언제가는 허물어질 것이라는 것. 그에게 셸리의 시가 남겨진 것처럼, 예수에게 성경이 남겨진 것처럼,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독백한다. 독백이 그를 구원할지, 부활하게 해줄지 알지 못하면서 그는 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허무한 세계 인식. 죽음으로도 승부가 안나는 이 세계의 묵시록. 그는 이제 독백을 위해, 남겨질 것을 위해 의지를 실행한다. 죽음을 향해, 무의식의 끝인 동시에 의식의 끝인 정말 끝. 허무한 그곳을 향해. 그 허무주의적 비전은 이미 그의 소설적 형식을 결정하고 있다.

결론에서부터 시작되는 척 팔라닉의 소설 형식은 이미 소설 속의 결정된 세상, 바뀔 수 없는 결론을 독자들에게 강요한다. 이제 어떠한 의지도 파국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다. 구원되기 위해 스스로 희생되어야 하는, 남겨질 독백을 위한 그들의 행위는 예수를 닮아있다. 

 
3

혼돈의 영역에서 튀어나온 타일러 더든은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모든 무의미를 없애기 위한 파괴를 위한 파괴로서 작용한다. 자신을 둘로 만들어낸 이 기이한 장애는 다른 이들의 욕망과 만나면서 무한한 힘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그들의 힘은 삶을 살 수 있는 진짜 능력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만 뻗아갈 수 있는 무한한 무능력으로 작동한다. 삶이 아닌, 파괴를 위해 애를 썼던 타일러 더든을 메시아라고 인식하는 이 역설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예수 모티프의 사도마조히즘적 전치이다. 각자의 내면에 지옥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파괴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자신들이 구원할 수 있다는 어떤 착각이며, 예수 희생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허상에 대한 척 팔라닉식 성경 패러디이다. 척 팔라닉에 의해 굴절된 메시아는 <서바이버>를 통해 더욱 잘 구현된다. 

 

크리디시 교회 지구의 한 가문에서 태어난 텐더 브랜슨은 쌍둥이 형 장남 애덤만이 교회 지구 안에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교회 교리에 의해, 어른이 되자마자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장남을 제외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 배운 온갖 잡스런 기술을 가지고 교회 지구 밖의 자본가들의 뒤처리를 해주며 살아간다. 유일한 취미인 자살 핫라인을 운영하던 텐더 브랜슨은 크리디시 종교 단체의 집단 프로젝트 이후, 크리디시 교구의 최후 생존자가 된다. 그 사건이 미디어의 조명을 받은 후, 그는 최고의 에이전트에 의해 미디어 시대의 메시아로 부활한다. 대형 풋볼

 

경기장에서 그는 모두가 원하는 쇼를 보여주기 위해 1쿼터가 끝난 휴식 시간을 빌어 자신의 결혼식을 치룬다. 그러나 몇 안 남았던 크리디시 교도들의 죽음이,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텐더 브랜슨을 범인으로 지목한 경찰이 경기장에 들어닥친다. 그는 퍼틸리티(이 소설의 진짜 예언자이며, 석녀이며 창녀)가 알려준 대로 풋볼 경기의 최종 점수를 공개해 경기장은 대혼란에 빠진다. 그를 향한 찬양은 순식간에 분노로 변하고, 그는 쫓기다시피해 포르노 잡지 매립지가 된 크리디시 교구 지역으로 들어가 형의 자살을 돕는다. 그는 이제 퍼틸리티의 계략이자 도움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블랙박스에 대고 최후의 고백한다.

 

서바이버는 자기 희생에 대한 예수의 모티프가 파국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텐더 브랜슨의 변신, 크리디시 교도에서 자본가들의 하인에서 다시 미디어 시대의 광대 같은 예언자에서 살인자로 전락하는 모습은 순전히 외부의 조건들에 의해 행해지며, 그의 자기 희생 역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타인에 의한 희생이다. <파이트 클럽>의 의식의 서술자가 그러했듯이, 텐더 브랜슨 역시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실행하지도, 발휘할 수도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무기력한 메시아를 둘러싼 것은 허상과 은폐의 메타포들이다. 소설 속의 이미지들은 모든 것을 덮고 은폐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심지어 청소 역시도, 깨끗하게 하기보다 사건의 흔적을 덮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피 코트에 묻은 핏자국을 없애는 법, 거실 벽지에 난 총알 구멍을 감추는 법 등등.

“얼룩을 지우거나 어항을 닦거나 집을 치울 땐 늘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 같다.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좀더 열심히 하면 이 대혼란을 잠시나마 지체시킬 수 있을까. 남이 벌여놓은 걸 은폐하는 일 말고도 할 수 있는게 많은데.” 353

주인에게 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그는 납골당의 조화를 이용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문제들은 감추어져 있다. 다 끝난 것 같은 크리디시 교구의 대지 역시, 남들이 버린 포르노 테잎을 폐기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생산될 포르노 테잎은 끊임없이 그것을 은폐하고 폐기하는 행위에 의해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 있는 것들은 모두 은폐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는 사건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 모든 사건과 진실을 끊임없이 뒤덮으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어설픈 믿음을 구성하는 것, 그것은 은폐의 기술이며 이 시대의 예언자의 덕목이기도 한 셈이다. 배 나온 예수가 되지 않기 위해 듀라테스톤, 프랑스제 미페프리스톤, 스위스제 플레네스트릴, 포르투갈제 마스테론. 육체를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이 약들, 일시적이지만 효과적인 이 약들은, 미디어라는 전자마취제의 절취된 통로와 결합되어, 더욱 완벽한 예수가 되어 부활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그 모든일의 원인으로 등장하는 그의 쌍둥이 형이 그에게로 오면서 사태는 역전된다. 그는 예언자에서 살인자로 하루아침에 미디어에 의해 다시 덮어진다. 매일 새로운 진실들이 탄생되는 은폐의 장에서 그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행기 납치범이 되어, 최후의 고백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지금 당신들이 찾아낸 건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잘못되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야. 제 2039편의 비행기록장치지......안에는 똘똘 말린 전선이 잇는데, 바로 그게 영원히 남게 될 기록이야. 당신들이 찾아낸 건 지금껏 묻어뒀던 나의 고백이고.......나의 기도이기도 하지. 나의 이야기이자 나의 주문이지. 사랑스러운 못난이. 어설픈 구세주. 내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주를 찬양하는 찬미자가 될지도 몰라......다 끝났어. 이젠 그냥 이야기로만 남게 되겠지. 텐더 브랜슨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젠 나도 해방이야.”(<서바이버>, 3-2쪽)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뚜렷한 원인도 결말도 없다는 걸 알면서 사람들은 구원을 향해 매달린다. 그러나 구원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구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은 이 삶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삶에 존재하는 것은 구원을 향한 믿음,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이다.

 

4

구원은 우리의 삶 안에 없다. 구원에 대한 열망은 거기서 비롯된다. 여기에 없는 것에 대한 갈망.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열망은 극단적으로 이 삶이 아닌 다른 곳, 즉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괴가 구원이 될 수 있다는 타일러 더든의 믿음은 거기서 온 것이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의 시도는 우리 삶을 둘러싼 허상과 가짜에 대한 파괴 의지였다. 그 파괴의지를 실현한 파이트 클럽은 그러나 이 세상 안의,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또 다른 그들은 헛된 믿음과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이 집단을 이루는 순간 이미 클럽은 파시즘적 파동을 예고하고 있다. 정신병원에 갇힌 타일러 더든의 절망은, 그 허상과 이데올로기를 아무리 깨부셔도 진짜 삶, 혹은 구원된 세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가 잃어버린 육체성과 파괴 의지를 실현하고자 한 파이트 클럽이 또 다시 파시즘적 도착으로 변질되는 순간, 구원에 대한 믿음 역시 저 멀리로 가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 지속되는 한, 다가오는 모든 메시아 역시 가짜이며 그의 구원은 늘 가짜 믿음에 의해 유예된다.

타일러 더든의 정체성 장애는 하나의 능력이 될 순 있었지만 구원은 되지 못했으며 텐더 브랜스의 메시아에 대한 자기 조롱은 어느 누구 하나 듣지 않을지도 모를, 블랙박스에 대고 하는 허망한 독백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독백은 구원과 삶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 된다. 성서가 그렇듯, 그 믿음을 외우고 반복하지 않으면 삶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성서의 역사는 중세에는 진지하게, 현대에는 경박하게 되풀이된다. 성서의 성스러움은 섹스로, 구원에 대한 열망은 구원 불가능함에 대한 절망으로, 신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조롱으로, 이야기는 독백으로 반복된다. 그들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이야기를 반복하는 동안, 이 시대의 불안은 영원히 유예되며, 허상의 메타포들은 세계 안에서 공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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