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소설이 시점을 통해 통일성을 추구하는 반면, 척 팔라닉의 소설은 시점을 유지하되 독백과 서술을 넘나드는 불안전하고 모호한 톤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않는다. 마치, 불안을 잃지 않기 위해 떠드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독자들은 그의 끊임없이 독백적 수다 때문에 통일성 있는 불안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의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그 불안을 독백적 수다로 메꿀 수 밖에 없었을까. 끊임없이 머리통을 갈겨대는 수다를 다 읽고 나면 허망하기만 한 이 작가의 세계, 이 정신병자의 이야기에 우리는 왜 귀 기울이는가. 

<파이트클럽>은 타일러 더든이 겨눈 총구가 입 안에 쑤셔박힌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는 입을 오물거리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 주절거리고 있다. 그 모습은 별로 위태로워보이지 않는다. 폭파 직전의 191층의 빌딩에서 입안에 총구가 쑤셔박혀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폭탄 만드는 법과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적당한 묘사를 쏟아내면서 이야기의 긴장을 무너뜨린다. 눈 앞에 있는 죽음은 그를 위협할 수 없다. 그는 수다를 통해, 세상에 관심없다는 듯 냉소하고 있다. 죽거나 말거나 총을 쏘거나 말거나.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름없는 주인공. 그는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타일러 더든 즉 자신의 분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둔다. 불면증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환자들의 모임에 찾아가 위로를 받고, 타일러 자신의 무의식을 향해 도와달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그 모임에서 그는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말라라는 여자를 만나고, 소설의 말미에서야 말라라는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이 갖은 수작을 다른 것이며, 그런 이유로 타일러가 나타난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가 벌인 일은 예상보다 훨씬 큰 사태를 불러들인다. 타일러 더든은, 그가 가진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면서, 구원을 위한 파괴조직 파이트 클럽을 결성한다. 클럽이 커지면 클수록 타일러 더든의 힘은 강력해지고, 그를 괴롭히던 직장 상사를 죽이고, 결국 메이햄 작전(191층짜리 빌딩 폭파작전)에 저해되는 적을 살상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일이 커진 이후에야 그는 타일러 더든, 자기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는 타일러 더든을 앞장세워 저질러진 모든 일들을 멈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향해 총을 쏜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 대신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그곳을 지켜낸 것이다. 이후 그는 정신병원을 천국이라 여기는 바보가 된 채 천국의 메시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 즉 전설이 된다. 

 
소설 속의 이 모든 사건은 의식의 방관과 무의식의 행동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일러 더든의 욕망,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는 그 욕망의 극단에는 무기력하고 바보같은 자기 자신이 있다. 둘의 독백과 서술의 혼돈 속에서, 둘은 이따금씩 조우하지만 의식의 서술자인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의 행위를 자신의 수다로 덮어버린다.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자아 사이의 괴를 감당하기 힘든 자의 잔꾀.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거역할 수 없었던 그는, 자기 내부의 어떤 행위의 인물, 대학 졸업 후 갔던 아일랜드에서의 어떤 기억에서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그런 괴물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의 독백에는 어떠한 책임도 없어보인다. 그가 파국 직전까지 보인 의지는 그야말로 단 하나 뿐이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독백하는 것. 말의 과잉 속에서 그의 진심 혹은 의무는 단 하나로 드러난다.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 그 의지는 타일러 더든과 그 자신의 의지가 일치하는 유일한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용된 그 독백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쓴다. 자신의 행동의 의지를 외부로 옮겨놓은 무의식이 행위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그저 떠들어 댈 뿐이다.

2. 
 

독백이란 의식의 말일까, 무의식의 말일까. 사실 모든 이들은 늘 독백을 한다. 직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혼자 티비를 보며, 화장실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우리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어떤 말들이 흘러나온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 밖에 없음에도 그 독백은 좀처럼 멈춰지질 않는다. 이 독백의 세계는 너무 혼란스럽다. 누구를 증오하다가 누구를 좋아하다가 금방 그 말을 거둬들이고 끊임없이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자신이 이 독백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표면도 중심도 아닌, 혼란의 정체를 보여주는 카오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부도 외부도 아닌 어떤 경계에서, 우리의 말들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또 어느새 화해한다. 척 팔라닉의 세계가 과격하고 병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 영역의 화자, 우리가 단 한번도 끄집어낼 생각을 하지 못한 내면의 모호함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각자의 내면은 그토록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우면서 불쾌하고 괴물스럽지 않은가. 그는 이 경계의 세계를 택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독백 세계의 1인칭 아닌 1인칭.

척 팔라닉 소설의 주인공의 혼란은 거기서 온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사라진 지대에 갇혀버린 주인공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들, 독백의 문장을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의미는 외부에서 생겨나고, 그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독백만 무의미하게 반복 충돌된다.

 

“사랑하던 것들은 머지 않아 자신을 외면하거나 죽게 된다. 자신이 창조해 낸 것들은 모두 쓸모없이 버려질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것들도 모두 쓰레기로 전락해 버린다. 난 오지만디아스야. 왕들의 왕.”259

 

나의 이름은 왕중의 왕
오지만디아스다.
너희들 위대한 자들아
내 업적을 보고 두 손을 들어라
분괴된 거대한 페허중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적막하고 솟은 것 없이
평평하게 끝없이 뻗어있는
텅 빈 사막밖에는...<오지만디아스, 셸리>


그는 현대의 오지만디아스다. 스스로가 이루어놓은 모든 일이 언제가는 허물어질 것이라는 것. 그에게 셸리의 시가 남겨진 것처럼, 예수에게 성경이 남겨진 것처럼,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독백한다. 독백이 그를 구원할지, 부활하게 해줄지 알지 못하면서 그는 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 허무한 세계 인식. 죽음으로도 승부가 안나는 이 세계의 묵시록. 그는 이제 독백을 위해, 남겨질 것을 위해 의지를 실행한다. 죽음을 향해, 무의식의 끝인 동시에 의식의 끝인 정말 끝. 허무한 그곳을 향해. 그 허무주의적 비전은 이미 그의 소설적 형식을 결정하고 있다.

결론에서부터 시작되는 척 팔라닉의 소설 형식은 이미 소설 속의 결정된 세상, 바뀔 수 없는 결론을 독자들에게 강요한다. 이제 어떠한 의지도 파국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다. 구원되기 위해 스스로 희생되어야 하는, 남겨질 독백을 위한 그들의 행위는 예수를 닮아있다. 

 
3

혼돈의 영역에서 튀어나온 타일러 더든은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모든 무의미를 없애기 위한 파괴를 위한 파괴로서 작용한다. 자신을 둘로 만들어낸 이 기이한 장애는 다른 이들의 욕망과 만나면서 무한한 힘으로 성장하게 되지만, 그들의 힘은 삶을 살 수 있는 진짜 능력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서만 뻗아갈 수 있는 무한한 무능력으로 작동한다. 삶이 아닌, 파괴를 위해 애를 썼던 타일러 더든을 메시아라고 인식하는 이 역설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예수 모티프의 사도마조히즘적 전치이다. 각자의 내면에 지옥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파괴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자신들이 구원할 수 있다는 어떤 착각이며, 예수 희생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허상에 대한 척 팔라닉식 성경 패러디이다. 척 팔라닉에 의해 굴절된 메시아는 <서바이버>를 통해 더욱 잘 구현된다. 

 

크리디시 교회 지구의 한 가문에서 태어난 텐더 브랜슨은 쌍둥이 형 장남 애덤만이 교회 지구 안에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교회 교리에 의해, 어른이 되자마자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장남을 제외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 배운 온갖 잡스런 기술을 가지고 교회 지구 밖의 자본가들의 뒤처리를 해주며 살아간다. 유일한 취미인 자살 핫라인을 운영하던 텐더 브랜슨은 크리디시 종교 단체의 집단 프로젝트 이후, 크리디시 교구의 최후 생존자가 된다. 그 사건이 미디어의 조명을 받은 후, 그는 최고의 에이전트에 의해 미디어 시대의 메시아로 부활한다. 대형 풋볼

 

경기장에서 그는 모두가 원하는 쇼를 보여주기 위해 1쿼터가 끝난 휴식 시간을 빌어 자신의 결혼식을 치룬다. 그러나 몇 안 남았던 크리디시 교도들의 죽음이,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텐더 브랜슨을 범인으로 지목한 경찰이 경기장에 들어닥친다. 그는 퍼틸리티(이 소설의 진짜 예언자이며, 석녀이며 창녀)가 알려준 대로 풋볼 경기의 최종 점수를 공개해 경기장은 대혼란에 빠진다. 그를 향한 찬양은 순식간에 분노로 변하고, 그는 쫓기다시피해 포르노 잡지 매립지가 된 크리디시 교구 지역으로 들어가 형의 자살을 돕는다. 그는 이제 퍼틸리티의 계략이자 도움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블랙박스에 대고 최후의 고백한다.

 

서바이버는 자기 희생에 대한 예수의 모티프가 파국의 세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텐더 브랜슨의 변신, 크리디시 교도에서 자본가들의 하인에서 다시 미디어 시대의 광대 같은 예언자에서 살인자로 전락하는 모습은 순전히 외부의 조건들에 의해 행해지며, 그의 자기 희생 역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타인에 의한 희생이다. <파이트 클럽>의 의식의 서술자가 그러했듯이, 텐더 브랜슨 역시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실행하지도, 발휘할 수도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무기력한 메시아를 둘러싼 것은 허상과 은폐의 메타포들이다. 소설 속의 이미지들은 모든 것을 덮고 은폐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심지어 청소 역시도, 깨끗하게 하기보다 사건의 흔적을 덮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피 코트에 묻은 핏자국을 없애는 법, 거실 벽지에 난 총알 구멍을 감추는 법 등등.

“얼룩을 지우거나 어항을 닦거나 집을 치울 땐 늘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 같다.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좀더 열심히 하면 이 대혼란을 잠시나마 지체시킬 수 있을까. 남이 벌여놓은 걸 은폐하는 일 말고도 할 수 있는게 많은데.” 353

주인에게 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그는 납골당의 조화를 이용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문제들은 감추어져 있다. 다 끝난 것 같은 크리디시 교구의 대지 역시, 남들이 버린 포르노 테잎을 폐기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생산될 포르노 테잎은 끊임없이 그것을 은폐하고 폐기하는 행위에 의해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 있는 것들은 모두 은폐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는 사건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 모든 사건과 진실을 끊임없이 뒤덮으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어설픈 믿음을 구성하는 것, 그것은 은폐의 기술이며 이 시대의 예언자의 덕목이기도 한 셈이다. 배 나온 예수가 되지 않기 위해 듀라테스톤, 프랑스제 미페프리스톤, 스위스제 플레네스트릴, 포르투갈제 마스테론. 육체를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이 약들, 일시적이지만 효과적인 이 약들은, 미디어라는 전자마취제의 절취된 통로와 결합되어, 더욱 완벽한 예수가 되어 부활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그 모든일의 원인으로 등장하는 그의 쌍둥이 형이 그에게로 오면서 사태는 역전된다. 그는 예언자에서 살인자로 하루아침에 미디어에 의해 다시 덮어진다. 매일 새로운 진실들이 탄생되는 은폐의 장에서 그는,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행기 납치범이 되어, 최후의 고백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지금 당신들이 찾아낸 건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잘못되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야. 제 2039편의 비행기록장치지......안에는 똘똘 말린 전선이 잇는데, 바로 그게 영원히 남게 될 기록이야. 당신들이 찾아낸 건 지금껏 묻어뒀던 나의 고백이고.......나의 기도이기도 하지. 나의 이야기이자 나의 주문이지. 사랑스러운 못난이. 어설픈 구세주. 내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주를 찬양하는 찬미자가 될지도 몰라......다 끝났어. 이젠 그냥 이야기로만 남게 되겠지. 텐더 브랜슨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젠 나도 해방이야.”(<서바이버>, 3-2쪽)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뚜렷한 원인도 결말도 없다는 걸 알면서 사람들은 구원을 향해 매달린다. 그러나 구원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구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은 이 삶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삶에 존재하는 것은 구원을 향한 믿음,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이다.

 

4

구원은 우리의 삶 안에 없다. 구원에 대한 열망은 거기서 비롯된다. 여기에 없는 것에 대한 갈망.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열망은 극단적으로 이 삶이 아닌 다른 곳, 즉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괴가 구원이 될 수 있다는 타일러 더든의 믿음은 거기서 온 것이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의 시도는 우리 삶을 둘러싼 허상과 가짜에 대한 파괴 의지였다. 그 파괴의지를 실현한 파이트 클럽은 그러나 이 세상 안의,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또 다른 그들은 헛된 믿음과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이 집단을 이루는 순간 이미 클럽은 파시즘적 파동을 예고하고 있다. 정신병원에 갇힌 타일러 더든의 절망은, 그 허상과 이데올로기를 아무리 깨부셔도 진짜 삶, 혹은 구원된 세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가 잃어버린 육체성과 파괴 의지를 실현하고자 한 파이트 클럽이 또 다시 파시즘적 도착으로 변질되는 순간, 구원에 대한 믿음 역시 저 멀리로 가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 지속되는 한, 다가오는 모든 메시아 역시 가짜이며 그의 구원은 늘 가짜 믿음에 의해 유예된다.

타일러 더든의 정체성 장애는 하나의 능력이 될 순 있었지만 구원은 되지 못했으며 텐더 브랜스의 메시아에 대한 자기 조롱은 어느 누구 하나 듣지 않을지도 모를, 블랙박스에 대고 하는 허망한 독백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독백은 구원과 삶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 된다. 성서가 그렇듯, 그 믿음을 외우고 반복하지 않으면 삶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성서의 역사는 중세에는 진지하게, 현대에는 경박하게 되풀이된다. 성서의 성스러움은 섹스로, 구원에 대한 열망은 구원 불가능함에 대한 절망으로, 신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조롱으로, 이야기는 독백으로 반복된다. 그들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이야기를 반복하는 동안, 이 시대의 불안은 영원히 유예되며, 허상의 메타포들은 세계 안에서 공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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