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는 본인은 느낄 수 없는 핵 같은 것이 있어. 내 경우 그건 하나의 도시야. 그 도시에는 냇물이 하나 흐르고, 둘레는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지. 도시의 주민들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있는 건 일각수 뿐이지. 일각수는 주민들의 자아나 에고를 흡묵지처럼 빨아들여서 도시 밖으로 가져 가버리는거야. 그래서 도시에는 자아도 없고 에고도 없지. 나는 그런 도시에 살고 있어. 물론 실제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까 그 이상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이 도시를 만든 것은 너 자신이라구. 네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여기 있는 모든 걸 만들어 낸 거야. 벽에서부터 강도, 숲도, 도서관도, 문도, 이 눈까지도 말이야.”
고백하자면, 이 소설, 무척 지루하고 읽기 싫었다. 대학시절 하루키를 좋아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 이 마음도, 그때의 그 마음도 모두 내가 만든 것일텐데, ‘움직이면서 완전성을 띤다’는 하루키의 세계와 내 마음도 닮은 것일까.
소설이 지루했던 이유는 아마도 하루키의 질문과 답이 똑같기 때문일까. ‘우주와 나의 내면은 연결되어 있다’는 동일한 답(명제)을 가지고, 자신의 답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해낸 두 개의 세계는 지금 보면 무척 낡아보인다. 하루키의 세계인식이 낡아보이는 건, 모두가 클래식과 재즈를 듣고, 프로이트를 읽고 아인슈타인을 알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두가 하루키를 읽는 시대가 되어버려서일까. 어쩌면 위스키와 재즈와 클래식을 사랑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이혼남이 여자 아이와의 구원과도 같은 섹스를 시크하게 받아들이는 하루키 본인의 클리쉐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 늙어버린 것일까.
나 역시도 하루키의 소설 주인공처럼 종종 마음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곤 한다. 내가 지나온 무수한 시간 속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방황을 하던 내 마음은 과연 나의 것이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그런 궁금증으로 프로이트를 읽어왔는데 답은 찾지 못했다. 우주와 인간 내면이 연결되어 있다는 하루키의 대답도 썩 내키질 않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로이트는 말년에 인간에게 새겨진 이상한 마음, 죽음 충동을 자신의 연구에 추가했다. 존재 안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미지, 심연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의 발견에 대한 하루키의 댇바은 살아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그런 하루키의 대답이 틀린 것도 아닌데 여전히 무언가 아쉽고 걸리고 지루하고 지긋지긋하다는 인상을 끝내 지울 수가 없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어쨌건, 나는 더 이상 하루키를 읽지 않을 것이다. 이건 소설 속 주인공이 그림자를 버리는 일과 비슷할 것 같다. 주인공이 자신이 구성한 세계의 끝을 책임지기 위해 그림자를 원래의 세계로 보내버리는 것처럼, 나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시간을 책임지기 위해,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하루키를 즐겁게 버리는 거다. 하지만 하루키처럼 쓸쓸하게 그림자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였다면 웅덩이 속으로 그림자를 밀쳐버렸을지도. 그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사는 대신, 자신이 창조했던 세계의 끝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웅덩이 밖으로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 황량한 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을 텐데.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식의 핵이 아니었을까.
하루키는 처음부터 두 개의 세계의 본질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를 유지시킬 방법을 고안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 궁금하다. 웅덩이 안으로 세계의 끝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밀어버리고 나면 남았을 어떤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